‘말아톤’·‘달콤한 인생 등 넓은 연기 스펙트럼
연이어 찾아온 시련에도 “연기로 위안 받았다”
연극 제작자 변신…“‘위기’ 대학로, 지원 절실”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배우 홀로 무대를 압도하는 모노 연극을 보고선 연기의 꿈을 키웠다. 쉽지 않은 배우 생활. 생애 첫 드라마를 촬영하다 얼굴을 크게 다쳤고, 상처가 겨우 가실 때쯤 암 덩어리가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연기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배우 이기영의 이야기다.
거칠고 강한 킬러나 조직 보스부터 다정다감한 아빠 역할까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이기영은 연극 시절부터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자랑했다. 그가 참여한 영화와 드라마만 약 200편에 달할 정도. 배우 경력만 올해로 40년에 이른다. 헤럴드경제는 최근 서울 상암동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연기 인생을 되돌아봤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연극 한 편이 바꾼 인생
그가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다.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모노 드라마 연극을 보고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미 친형인 이효정은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터였다.
“배우 혼자서 무대를 휘젓는 걸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어요. 그 배우가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혼자서 무대를 이끌고 어마어마한 박수를 받을 때 그 희열이 보였죠. 그게 부러웠어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그는 배우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서울예대 출신들 가운데 최정예 선수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레파토리 극단의 일원이 됐다. 졸업생만 받아주는 극단이었는데, 재능이 남달랐던 재학생인 이기영은 예외였다. 그는 연극 ‘리어왕’(1984)으로 성공적으로 데뷔한 후 각종 연극에서 주연 자리를 꿰찼다.
“당시 ‘리어왕’ 때 기계 체조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광대 역할이 필요했어요. 근데 제가 드럼이나 체조를 다 할 수 있었죠. 사실상 특채로 뽑힌 거에요. 운이 좋았어요.”
“폭발 사고로 생긴 얼굴 상처…배우 생활 깜깜해졌다”
대학 졸업과 3년 간의 호주 유학을 마칠 무렵 다양한 작품의 제의가 들어왔다. 그의 생애 첫 드라마인 ‘머나먼 쏭바강’(1993)도 이때 만났다.
월남전을 다루는 작품이어서 베트남에서 장장 8개월 간 촬영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군복을 입은 채 M16 소총을 들고 쉼 없이 움직였다. 그러다 대형 사고가 터졌다. 촬영 도중 발생한 폭발 사고의 여파로 왼쪽 얼굴을 크게 다친 것. 현지에서 긴급 봉합 수술을 받았지만 왼쪽 뺨엔 커다란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엔 더욱 굵고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배우 한다는 사람이 얼굴을 다치니 이젠 카메라 앞에 서질 못하겠구나 싶었어요. 기분 자체가 확 가라앉았죠. 그때 그냥 몇 개월 내내 쉬었어요.”
위기가 기회였던 걸까. 얼굴의 난 상처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물했다. 얼굴의 상처를 이유로 들며 영화 제의를 거절했는데, 그 감독이 이기영을 위해 ‘왼쪽 뺨에 칼 자국이 있는 캐릭터’로 인물 설정을 바꾼 것. 그 작품이 바로 영화 ‘테러리스트’(1995)다.
그는 극중에서 악덕 재벌의 칼잡이 춘우로 나온다. 긴머리를 휘날리며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등장하는 장면은 거친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며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작품에 나온 할리 데이비슨은 이기영이 32년째 타는 개인 바이크다.) 오죽하면 이후 제의받은 역할이 대부분 킬러나 조직 두목과 같은 강한 캐릭터였다고.
그는 그때부터 얼굴의 상처를 가리기보단 캐릭터의 특징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동시에 흉터 제거 수술을 수 차례 받으며 지우려고 애썼다.
“되게 속상하고 힘들었어요. 카메라에 너무 확연하게 잡히니까 상심이 컸죠. 그런데 맡은 캐릭터들이 세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상처를 잘 모르더라고요. 그게 오히려 위안이 됐죠.”
친근한 ‘말아톤’ 코치에서 냉정한 ‘달콤한 인생’ 킬러로
이기영은 드라마 ‘임꺽정’(1996), ‘백야 3.98’(1998), ‘은실이’(1998), 영화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등을 통해 작품 활동을 쉼 없이 이어갔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말아톤’(2005)이다. 그는 마라토너의 삶이 꺾인 뒤 술과 담배에 의지하며 살다가 초원이(조승우 분)에게 마라톤의 재능과 열정을 일깨워주는 코치 정욱으로 등장한다. 마라톤을 통해 초원이와 정욱이 함께 성장하는 감동적인 이 작품은 당시 5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두 달 뒤, 이기영은 이러한 감동은 뒤로 한 채 냉혈한 킬러로 관객들을 다시 찾았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벙거지 모자를 쓴 채 총을 겨누던 백상파 킬러 오무성 역이다. 그는 극중에서 주인공 선우(이병헌 분)에게 “사과해라.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했.음. 딱 이 네 마디야” 라는 강렬한 대사를 남긴다 그리고선 주인공과 거친 총싸움을 벌인다.
당시 ‘벙거지 모자의 오무성’은 젊은층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연극영화과를 지망하던 남학생들 사이에선 자유 연기 면접을 볼 때 가방에서 벙거지 모자부터 꺼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벙거지 모자는 제 거였고, 점퍼는 저희 아버지의 유품이었어요. 바지와 신발도 평소에 제가 착용하던 거였죠. 김지운 감독님이 일상적이지만 살벌한 이미지를 주문하셔서 제 일상복으로 준비해갔는데, 감독님이 ‘그래, 이거잖아’ 하시면서 흡족해 하셨어요. 그 모자는 사실 굉장히 아끼는 모자였는데 총에 맞는 바람에 날렸죠.”
그는 같은 해 두 작품으로 극과 극의 연기를 선보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존재감을 각인했다. 그 역시 두 작품을 연기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았다.
“같은 시기에 찍었던 두 작품이 다행히 참 잘 됐어요. 개봉 시기가 두 달 정도 차이 났었죠. ‘말아톤’에서 말랑말랑한 캐릭터로 나왔다가 곧바로 ‘달콤한 인생’에서 지독하게 센 캐릭터로 나오니 본의 아니게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됐어요.”
또 다시 찾아온 시련…“아내 힘으로 버텼다”
지난 2006년 말, 함께 작업하던 촬영 감독이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했다. 그가 아파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연이은 밤샘 촬영으로 피로가 누적된 탓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알고 보니 갑상선 항진증이 이미 위험 수준으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후 약 5년 간 건강 관리에 힘쓰며 회복하는 듯 했지만, 2012년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몸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는 곧 갑상선암으로 발전했다. 갑상선 항진증의 여파로 눈에 문제가 생긴 데 이어 알 수 없는 희귀 증상이 잇따라 나타났다. 결국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당시엔 마음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배우 생활을 아예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유명 의사들도 생전 처음 보는 희귀 증상이라고 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증상들이 나타났으니까요.”
당시 그는 이 사실을 아내 외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유학 중이던 두 딸에게도 비밀로 했다. 딸들은 한국에 귀국해 공항에서 아빠를 만나고서야 모든 걸 알게 됐다. 그 때 딸들은 펑펑 울었다고.
깜깜한 터널을 걷는 듯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내 덕분이었다. 아내는 그의 눈과 손이 되어줬다.
“아내는 늘 제 손이 닿는 반경 내에 있었어요. 병실에 보호자용 침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자지도 않았죠. 제 최고의 아군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각종 치료 부작용에 시달렸지만 연기를 놓고 싶진 않았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촬영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고선 꿋꿋하게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아팠던 시간이 절망스럽진 않았지만, 병마로 인해 변할 수 밖에 없었던 외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몇 년 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화면에서 특정 각도로 제 얼굴이 부각되면 보기 싫었어요. 그런데 드라마나 연기에 대한 반응은 너무 좋은 거에요. 나중에 깨달았죠. 이 문제가 시청자나 관객들에겐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서야 스스로 자유로워졌어요.”
연극 제작자로 변신…“대학로에 빚 갚는 마음”
그는 지난 2021년 연극계 창작자들과 함께 극단 돋을양지를 창단해 연극 제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연극 ‘거짓말’, ‘언택트 커넥션’, ‘하우스 키핑’에 이어 내달 1일부턴 대학로에서 연극 ‘만선’을 선보인다. 연극 배우이자 그의 아내인 김은현도 무대에 선다.
그가 배우 생활 도중 연극에 뛰어든 이유는 바로 연극계에 대한 ‘채무감’ 때문이었다.
“전 연극으로 시작한 사람이에요. 연극이 절 빛나게 해줬죠. 때문에 연극계에 빚진 듯한 마음이 늘 있어요. 절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할 것 느낌이랄까요. 뭐라도 작게나마 연극계에 힘이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그는 어려운 연극계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 중이다. 특히 문화예술에 관심 있는 기업들과 연극계를 체계적으로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K-드라마나 K-영화의 산실은 대학로에요. 그런데 대학로는 정작 무관심 속에서 고사 직전의 위기에 놓여 있죠. 젊은 연극인의 열정으로만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거에요. 문화예술인들의 노력과 열정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그렇다고 그의 본업인 배우 생활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니다. 연기는 언제나 그의 최우선이다. 연기가 주는 재미가 삶의 원동력이나 다름 없어서다.
“계속해서 다른 삶을 산다는 건 굉장히 짜릿해요. 야성미 넘치는 인물부터 고위 관료, 국회의원, 병원장 캐릭터까지, 다양한 직군을 연기하면서 공부도 많이 하게 됐어요. 일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깊이 공부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에요.”
먼 훗날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냐는 ‘우문(愚問)’에 그는 ‘현답(賢答)’을 내놨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이 업계에선 오래 기억되기 쉽지 않아요. 그래서 오래 기억되기보단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을 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이 ‘오케이’ 싸인을 줄 때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컷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노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