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구촌 이색적인 장소와 물건의 디자인을 랜 선을 따라 한 바퀴 휙 둘러봅니다. 스폿잇(Spot it)은 같은 그림을 빨리 찾으면 이기는 카드 놀이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헤럴드경제=한지숙 기자] 그녀는 생애 첫 집을 1962년 마련했다. 나이는 20대, 대학생 신분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여성이 모기지(주택담보대출)를 신청하려면 남편의 서명이 필요했다. 즉 미혼이나 이혼한 여성이 본인 명의의 집을 갖는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처럼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계 소녀들의 로망 바바라 밀리센트 로버츠(Barbara Millicent Roberts), 즉 바비(Barbie)는 별 난관 없이 내 집 마련의 소망을 이뤘다. 상속인지, 증여인지, 주택구입 자금의 출처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바비는 꿈의 집 ‘드림하우스(Dreamhouse)’를 장만했고 TV, 전축까지 남 부럽지 않게 들였다. 비록 골판지로 만들어진 장난감 집이긴 하지만 말이다.
‘드림하우스’는 바비 제작사 마텔(Mattel)이 1962년 첫 출시한 바비의 집 시리즈 이름이다.
실사 영화 ‘바비’의 개봉을 앞두고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선 그녀의 패션 스타일 뿐 아니라 실사 집과 인테리어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 촬영을 위해 영국에 실물 크기 ‘드림하우스’ 4채가 한꺼번에 지어졌는데, 그 바람에 분홍색 페인트 공급이 달렸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바비, 그녀의 집과 아메리칸 드림’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말리부에 실제 크기로 만들어진 ‘드림하우스’는 온통 분홍색으로 칠해진 게 집 주인의 몸매 만큼 비현실적이다. 탁 트인 바다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해안가에 바비 인형의 집을 실물에 가깝게 재현했는데, 총 1억달러(약 1300억원)가 들었다고 한다.
이 집은 실제 숙박 공유 플랫폼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해 묵을 수 있다. 에어비앤비 사이트에는 7월 21~22일에 이틀간 각각 최대 손님 2명에게 1박 2일의 무료 숙박을 제공한다고 돼 있다.
60년 간 여성의 욕망과 트렌드 반영해 온 바비의 집
NYT와 비즈니스인사이더가 책 ‘바비 드림하우스: 건축적 연구(이하 ‘바비 드림하우스’)’를 바탕해 작성한 보도를 보면 그동안 나온 바비의 집은 미국의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반영한 거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비의 드림하우스는 지난 60년간 크게 6~7가지 변천을 겪었다.
바비의 생애 첫 집은 수수했다. 고등학생으로 설정된 바비가 1959년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데뷔해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지 3년 만이다. 골판지로 만들어진 랜치 하우스(옆으로 긴 단층집)다. 가구들도 모두 골판지로 접게 돼 있다. 노랑색 벽지가 3면 벽에 발려져있고, 분홍색 체크 무늬 패브릭 소파와 나무 무늬 소파 테이블, TV장이 있다. 책장에는 대학 원서(바비가 대학교로 진학했을 것으로 추정)로 보이는 두툼한 책들이 꽂혀있다. 바비의 남자친구 켄(Ken)으로 추정되는 남자 얼굴을 담은 액자 사진이 한 구석을 차지했다.
전축과 배불뚝이 TV 일체형인 TV장은 바야흐로 TV가 대중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안방TV’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침대는 싱글사이즈, 침대 주인은 독신이란 뜻이다. 종이 침대는 2022 도쿄올림픽 선수촌의 종이 침대보다 먼저다. 이 집에 부엌이란 없다. 이는 당시 다른 많은 인형의 집들이 소녀들에게 요리 등 가사 일을 가르치기 위해 주방이 있었던 것과 다른 점이라고 NYT는 분석했다.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은 집에서 가사 일이 아닌 음악과 엔터테인먼트를 즐겼다는 점을 이 집은 강조한다. 이 집은 접어서 서류 가방처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가격은 8달러였다.
이 집은 출시되자마자 미국 전역에 판매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1974년 바비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3층 짜리 타운하우스로 집을 옮겼다. 분홍, 주황, 초록, 하늘색 등 화사함이 물씬 풍기는 집이다. 1층 다이닝 공간에는 스위스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의 유명한 세스가(Cesca) 의자가 떡 하니 등장한다. 2층 천정에는 1980년대 재유행한 티파니(Tiffany) 램프가 달려있다. 티파니 램프는 주얼리업체 티파니앤코를 설립한 찰스 루이스 티파니의 아들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루이 컴포트가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스타일의 램프 갓을 말한다.
3층에는 테니스 라켓이 세워져 있어 바비의 취미 생활도 엿보인다. 집의 형태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가 창시한 모델 ‘메종 돔-이노(Maison Dom-Ino)’와 유사하다. 1914년에 전후(戰後)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주택 대량 생산을 위해 고안된 도미노 집은 2층 구조를 만드는 3개의 슬라브, 이를 지지하는 가느다란 기둥,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으로 이뤄지는 건물 구조를 말한다. 현대 콘크리트 건물은 거의 대부분 이 구조를 따른다.
1979년에야 바비는 비로소 입체 집을 갖게 됐다. 그 전까지는 집의 한 면이 평면으로 이뤄져 가구 등이 이미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세번째 집 ‘에이 프레임(A-frame)’은 앞뒤가 트여있는 개방형 구조에 원하는 공간에 마음대로 가구를 배치하며 꾸밀 수 있었다.
당시엔 교외로 인구가 확산하면서 모듈러(조립식)형 주택이 인기 있었다고 한다. 에이 프레임은 모듈러 주택이다. 1층 화단 뿐 아니라 지붕 창문에 까지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책 ‘바비 드림하우스’는 “‘A프레임’의 개방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인테리어는 1970년대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주택 경향 시랜치(Sea Ranch)와 환경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소개했다.
팝문화가 발달한 1980년대 바비의 집은 처음으로 ‘올핑크(all-pink)’ 미학을 선보였다. 1985년 ‘글래머 홈(Glamour Home)’은 1층서 2층까지 아치형 계단이 달렸고, 분홍 캐노피를 한 침대 등 여성성을 강조한 게 특징이다.
1990년 ‘매지컬 맨션(Magical Mansion)’은 전작들과 비교해 가장 화려하고 가장 정교한 집이다. 도리아식 기둥과 아치형 창문, 장미 문양 벽지로 잔뜩 멋을 부렸다. 어찌보면 분홍색 속으로의 퇴보, 세기말적 퇴폐미까지 풍긴다. 그 시대의 낭만주의와 풍요를 반영한다고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지적했다. 매지컬 맨션의 출시 가격은 399달러였다. 2022년 시세로 환산하면 대략 900달러(117만원)이다. 현재 수집가를 위한 중고 가격은 4000달러(522만원)를 족히 넘는다고 한다. 매지컬 맨션에 2인용 소파에는 붓질 문양이 들어간 쿠션들이 놓여있는데, 그로부터 3년 뒤인 1993년에 나온 비슷한 문양의 재즈 문양 보다 앞섰다고 책 ‘바비 드림하우스’는 소개했다.
바비의 집은 점점 더 크고 화려해졌다. 2015년 집에는 컨버터블을 위한 차고와 작은 벽난로가 설치됐다. 2019년에는 휠체어를 탄 바비가 등장하면서 2021년부터 드림하우스는 휠체어에 맞는 엘리베이터까지 갖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전세계적인 대유행 속에 2021년 출시된 드림하우스는 평평한 지붕 형태의 3층 집으로 가장 현대적이다. 3층에는 노래방 시스템과 디스코볼을 갖췄다. 2층에서 1층까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갈 수 있고, 흔들의자도 걸렸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봉쇄 속에서 집 안에서 일과 휴식, 놀이를 다 할 수 있게 꾸며졌다.
마텔에 따르면 바비의 드림하우스 장난감은 지금도 2분에 한 개 꼴로 팔려나간다.
욕망과 퇴폐의 절정을 상징하는 핫핑크로 만들어진 드림하우스. 계단 대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고 인피니티풀과 보드, 승마, 테니스 등 온갖 취미와 호사를 다 누릴 수 있는 곳. 내 명의의 집 마련 자체가 꿈인 현실에서 이런 판타지는 바비랜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