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현관에서 신발을 신지 않고 나가려는 아이. 취침 전에 목욕을 하지 않으려는 아이. 나쁜 말을 계속 내뱉는 아이.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이들과 씨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이들의 대꾸는 보통 비슷하다. “왜?”, “왜 그래야 하는데?”, 혹은 “싫어!”. 아이들을 설득하려는 부모들은 이유를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만 대부분 먹히지 않는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부모들은 단 한마디로 상황을 종결하려고 한다. “엄마 말 좀 들어!” 혹은 “아빠가 하라면 좀 해!”
미국 미시간대 법학·철학과 교수이자 전설적인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법률 서기 출신인 스콧 허쇼비츠는 신간 ‘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책’을 통해 이러한 일상적인 순간에 다양한 물음표를 던진다. “왜 아이는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가?” 혹은 “무엇이 처벌을 정당화하는가?”
허쇼비츠는 그의 자녀 렉스와 행크의 엉뚱한 대화에서 심도 깊은 철학을 꺼낸다. 저자는 아이들의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며 문제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준다. 착하게만 살자는 마음만으론 대답하긴 어려운 질문들도 거침없이 던진다. 결국 대화의 끝자락에선 도덕이 무엇인지 밑바닥부터 생각하게 한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은 형 렉스 때문에 “나는 (형에 대한) 권리가 없어”라며 우는 행크에게 ‘권리’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지켜지는지, 신발을 신지 않겠다고 떼 쓰는 아이에게 신발을 신기는 부모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지, ‘바보, 멍청이’라고 부른 친구에게 똑같이 욕설해도 괜찮다는 행크에 대해선 ‘복수’가 교정적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지 탐구한다.
‘나’를 만드는 수많은 정체성에도 질문을 던진다. 인종차별의 역사를 공부하고선 자신이 흑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아들에게 그가 느끼는 죄책감이 타당한지, 마라톤 대회에서 여자 친구보다 늦게 결승선에 들어와 창피해하는 아들에게 운동 능력이 남성성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러한 대화는 곧 차별의 문제로 이어진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거나 차별하는 존재가 되는 현실을 탐구하며 우리 삶이 어떤 조건에 묶여 있는지, 우리가 개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저자는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이 아닐지라도 차별에 따른 혜택을 누리는 순간 수혜자에겐 변화의 책임이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도덕과 정체성을 넘어서서 순수 철학 세계로도 인도한다. 남이 보는 빨간색이 내가 보는 빨간색과 같은지 알 수 없고, 무한한 우주에서 우리의 삶이 가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현실. 저자는 이러한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생각의 재료가 되는지 보여준다. 이는 곧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자녀의 대화를 단순히 책의 도입부로만 활용하지 않고, 아이의 ‘생각하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꿀팁도 전수한다. 저자는 철학이 곧 ‘생각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자녀와의 대화에서 질문으로 반응해주는 것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 이유는 뭘까?”, “네가 그렇게 말한 것은 무슨 뜻이야?” 등이 대표적이다.
렉스와 행크는 철학자의 자녀들이니 대화 수준이 애초 다를 것이라는 일각의 의구심에 대해 저자는 자녀들이 철학을 다루고 있을 때 이를 알아차리고 격려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신비와 불가사의를 알아차리는 눈을 가진 아이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둔감해지는 것은 어른들의 의도치 않은 훈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심리학자 미셸 쉬나드가 200시간이 넘는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 시간을 분석한 결과, 약 2만5000개의 궁금증이 포착됐다. 아이들은 1분에 두 개 이상의 질문을 던졌고, 그 중 4분의 1은 ‘왜’ 혹은 ‘어떻게’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이러한 궁금증마저도 아이들이 특정 나이를 넘어가면 크게 줄어든다. 철학자 개러스 매슈스에 따르면, 만 3~7세 아이들은 ‘즉흥적인 철학 여행’을 흔하게 하는 반면 만 8세를 넘긴 아이들은 철학적 궁금증이 크게 줄어들었다.
어쩌면 자녀와 대화하는 시간은 ‘꼬마 소크라테스’들을 통해 부모가 진정한 소크라테스로 거듭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제는 ‘불결하고, 잔인하고, 짧은(Nasty, Brutish, and Short)’이다. 이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쓴 영국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쓴 표현에서 따왔다. 홉스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연 상태의 사회에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자연 상태의 삶에 대해 “고독하고, 빈곤하고, 불결하고, 잔인하고, 짧다”고 묘사했다. 저자는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의 상태가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제목을 이같이 지었다.
‘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책’/스콧 허쇼비츠·안진이 옮김/어크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