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 본사 르포 + TA-50 시뮬레이터 체험기
올해 창립 24주년…조립장마다 수출 대비 분주
“대한민국 항공우주산업의 역사” 직원 자부심 가득
‘2050 글로벌 톱7’ 비전 위해 구슬땀
〈그 회사 어때?〉 세상에는 기업이 참 많습니다. 다들 무얼 하는 회사일까요. 쪼개지고 합쳐지고 간판을 새로 다는 회사도 계속 생겨납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도, 수년을 하던 사업을 접기도 합니다. 다이내믹한 기업의 산업 이야기를 현장 취재, 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쉽게 전달해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은희 기자] #. 영화 〈탑건: 매버릭〉을 보셨나요? 주인공 매버릭과 그의 대원들은 F/A-18 전투기를 몰고 적진에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구불구불한 협곡에서의 초고속 저공비행과 급하강·급상승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미션이었죠. 특히 고속상승 후 3000피트, 약 900m까지 하강했다가 다시 급상승하며 산을 넘는 장면은 입을 벌어지게 만듭니다.
탑건에 도전해 봤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당연히 진짜 전투기는 아닙니다. 조종사의 비행 연습을 위해 전투기와 똑같이 디자인된 시뮬레이터에 올라타 영화 속 임무를 수행해본 건데요. 미션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전술입문훈련기 TA-50을 타고 출격해 고공비행을 하다 900m까지 하강하고 다시 올라가는 겁니다.
먼저 조종석에 앉았습니다. 눈앞 스크린엔 활주로가 펼쳐져 있었죠. 족히 100개는 넘는 버튼을 보니 진짜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자전거만큼 쉬울걸요.”
KAI 관계자분의 응원을 받으며 왼손으로는 가속기를, 오른손으로는 조종간을 쥐었습니다. 가속기를 앞으로 밀자 속도가 났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관계자분의 사인에 맞춰 조종간을 당겼습니다. 오, 떴다! 순식간에 날아올랐습니다. 창공을 가르며 하늘로 치솟았죠.
고도가 1만피트(3048m)쯤 됐을 때 속도를 살짝 낮추며 조종간을 밀어내니 항공기 앞코가 내려왔습니다. 스크린 속 초록색 선에 맞춰 수평비행을 시작했죠. 그제야 뒤로 쏠렸던 몸도 바로 섰습니다. 무사히 이륙 완료. 고개를 돌려보니 양옆으로 사천 시내가 보였습니다.
조종간을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곡예비행을 하고 360도로 뱅그르르 돌기도 했습니다. 괜히 멀미가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요리조리 움직여 보니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그렇게 도전! 결과는 어땠냐고요? 그건 마지막에 공개하겠습니다.
#. 지난 10일 경남 사천시에 있는 KAI 본사를 찾았습니다. 사천공항까지는 김포에서 비행기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요. KAI는 사천공항 바로 옆. 활주로를 공유하다 보니 사실상 문 방향만 달랐습니다. ‘이 정도면 출퇴근도 가능하겠는걸’, KAI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습니다.
언뜻 연구원인가 싶은 KAI는 그야말로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 한국의 항공과 우주 산업을 영위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올해로 창립 24주년을 맞은 청년기업이지만 대우중공업과 삼성항공우주산업, 현대우주항공의 항공사업을 통합해 출범한 만큼 오랜 기간 하늘길, 우주길을 향한 여정을 걸어왔다고 볼 수 있죠.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한국형 전투기 KF-21을 개발·생산하고 한국형 고등훈련기 T-50 계열을 현재 양산하고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한국형 헬리콥터 수리온은 물론 차세대 위성, 한국형 발사체 개발 사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죠. ‘KAI의 역사가 곧 대한민국 항공우주산업의 역사’라는 자부심 넘치는 말이 마냥 허세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조만간 폴란드 상공을 날아오를 경공격기 FA-50이 만들어지고 있는 고정익동부터 찾았습니다. 고정익동 입구에는 ‘말레이시아 공군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습니다. 올해 초 FA-50 수출 계약을 체결한 말레이시아 측이 견학을 왔다고 현장 관계자분은 설명했습니다. 플래카드 위쪽으로는 인도네시아, 태국 등 수출 9개국 국기가 태극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FA-50은 뭐고 T-50은 어떤 기체일까요. 항공기는 날개부에 따라 고정익과 회전익으로 분류되는데요. 전투기나 여객기처럼 날개가 고정된 게 고정익, 헬리콥터처럼 날개가 회전하는 게 회전익입니다.
KAI가 만드는 고정익은 크게 소형민간항공기인 KC100 계열, 기본훈련기인 KT-1 계열, 고등훈련기인 T-50 계열, 전투기인 KF-21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개 플랫폼을 가지고 여러 종류의 파생형 기종을 만드는 건데요. FA-50은 T-50을 기반으로 다양한 정밀 유도무기 등을 탑재해 만든 전투기입니다. 경공격기 시뮬레이터로 조종해본 TA-50 역시 T-50의 파생형 기종이죠.
축구장 3개 크기의 고정익동에선 최종 조립 작업이 분주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부식방지를 위해 프라이머(primer·전 처리 도장용 도료)를 바른 연두색 항공기가 미완의 모습으로 공장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죠.
TA-50 7대가 줄지어 있는 모습은 마치 진화과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라인에 따라 흐름 생산을 하고 있었기에 앞으로 한 워크스테이션 한 워크스테이션 갈 때마다 완성품의 모습을 갖춰 갔죠. KF-21 5~6호 시제기는 사실상 조립을 끝내고 문 바로 앞에서 점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방·중앙·후방동체를 만들고 이들을 동체를 만드는 작업은 대부분 자동화돼 있었지만 한기당 25만~30만개에 달하는 부품을 장착하는 건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TA-50을 기준으로 동체에 뚫는 구멍만 수천개에 달한다고 하니 구멍 뚫는 작업의 자동화만으로도 많은 수고가 덜어졌겠구나 싶었습니다.
실제 대형로봇드릴링시스템(LRDS)을 도입하면서 숙련된 작업자를 기준으로 180초 걸리던 구멍 가공 작업이 25초로 줄었다고 해요. 전방·중앙·후방동체 결합도 자체 개발한 동체자동조립시스템(FASS)을 통해 진행하는데 정밀도가 크게 향상됐다고 합니다.
동체가 완성되면 그때부터는 항공기 내부를 채웁니다. 수십㎞에 달하는 전선을 깔고 각종 시스템을 장착하죠. 바퀴도 답니다. 중간중간 전기는 잘 통하는지 유압 계통에 문제는 없는지 점검도 하죠. 마지막 공정까지 마치고 문 앞에 서면 제법 항공기 태가 납니다.
완성된 항공기는 격납고로 옮겨지는데요. 끝은 아닙니다. 도장을 하고 연료를 첫 공급해 확인하고 엔진 테스트까지 마쳐야 비로소 하늘을 날 수 있죠. 그렇게 시험 비행까지 마치면 KAI 손을 떠나게 됩니다. 이 과정까지 통상 30개월이 걸린다고 해요.
KAI는 생산라인 효율화, 공정 최적화 등을 통해 월 생산량을 T-50 계열 기준 2배 이상 늘려 리드타임(주문부터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 확 줄일 계획입니다.
격납고에는 폴란드에 수출되는 FA-50 1호기가 늠름하게 서 있었습니다. 오전 시험비행을 마친 KF-21 시제기도 대기하고 있었죠. 하늘이 아닌 땅에 있었지만 위용은 넘쳤습니다.
회전익동에선 수리온 6대가 줄지어 조립되고 있었습니다. 뒤편으로는 지난해 말 양산에 들어간 소형무장헬기 LAH가 구조 조립이 한창이었죠.
회전익 부문의 경우 크게 2개 플랫폼이 있습니다. 수리온으로 불리는 기동헬기 KUH와 소형무장헬기 LAH입니다. KAI는 KUH를 기본형으로 군과 산림청, 해양경찰청, 경찰청 등의 요구에 맞춰 여러 파생형 헬기를 만들고 있죠. 소형민수헬기인 LCH는 LAH와 유사하다고 해요.
헬기도 중앙 동체에 전방 조종석과 후방 꼬리를 연결한 뒤 전선과 각종 항공전자장비 등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만듭니다. 고정익과 비슷하죠. 수리온을 기준으로 총 24개월 정도 소요되는데 한 달에 4대 정도 생산된다고 하니 고정익보다는 확실히 빠릅니다.
수리온 양산으로 헬기 국산화가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회전익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전달장치(기어박스)는 아직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완전 국산화는 아닌 거죠. KAI는 2030년 동력전달장치 개발을 목표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완전 국산화가 이뤄지면 KAI가 추진 중인 유무인 복합체계(MUM-T) 구축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격납고 역할을 하는 뒤편으로 자리를 옮기니 수리온 계열인 상륙기동헬기 MUH-1에 블레이드를 부착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길이가 무려 7m를 넘는 거대한 블레이드가 장착되면 완성입니다. 23026, 2023년 납품하는 26호기는 이제 곧 시험 비행에 들어갑니다.
수리온 시제기와 LAH 시제기도 나란히 있었습니다. KUH001의 경우 상태감시시스템(HUMS) 국산화를 위한 개조 등 시험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관계자분은 귀띔했습니다.
명색이 ‘한국항공우주산업’에 왔는데 항공만 둘러볼 수는 없겠죠? 바로 우주센터로 향했습니다.
우주센터에선 차세대중형위성 4호기 본체를 조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위성체계실은 설계부터 조립, 시험, 최종 준비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지도록 돼 있습니다. 워낙 민감한 장비다 보니 온도와 습도, 청정도 유지는 필수라고 합니다.
항공기 훈련체계를 최종 점검하는 곳도 우주센터에 마련돼 있었는데요. 각종 항공기 시뮬레이터는 물론 사내 공모전 수상을 계기로 개발된 VR(가상현실) 훈련장비 등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강구영 KAI 사장은 최근 기자간담회를 열고 오는 2050년 연 매출 40조원 달성으로 글로벌 톱7 항공우주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밝혔습니다. 이른바 ‘글로벌 KAI 2050’입니다.
1999년 창립 이후 2016년까지 KAI는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2017년부터 긴 침체기를 맞았죠. 경영압박에 시달렸고 사활을 걸었던 미 공군 고등훈련기 교체사업(APT) 수주에 실패했으며 코로나19라는 글로벌 위기까지 마주했습니다. 3조원대였던 매출은 2조원대 중반까지 떨어졌고 한때 10만원을 넘던 주가는 반토막 났습니다.
KAI는 올해를 원년으로 성장 모멘텀을 확보하고 펀더멘털(기초체력)을 강화해 2차 성장을 이룩하겠다는 구상입니다. 퀀텀점프(비약적 도약)를 위해 연구개발(R&D)에만 2027년까지 1조5000억원, 이후 5년간 3조원을 쏟아부을 예정이죠.
초록창(?)에 KAI를 치면 항상 뒤따라 나오는 게 매각설입니다. 한국수출입은행과 국민연금공단이 1·2대 주주인 KAI는 민간기업이지만 공기업적 성격이 강한데요. KAI에 눈독을 들이는 기업이 많다 보니 꾸준히 민영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찬반 의견은 팽팽합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매각해야 한다는 의견도, 매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죠.
강구영 사장의 대답은 ‘노(NO)’입니다. 수요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공급자인 정부도, 임직원도 팔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고 실패 위험성까지 큰 항공 우주 사업이 민간기업에 넘어간다면 감당하기 어려울뿐더러 안보에도 마이너스”라고 강 사장은 말합니다.
KAI는 올해 수주 4조5000억원과 매출 3조8000억원 달성을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현재 전투기 수출 협상을 진행 중이고 UAE(아랍에미리트) 시장에서도 좋은 소식이 기대되는 상황이라고 해요. 올해가 퀀텀점프의 원년이 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아, 그래서 미션 결과는 어땠냐고요? 진짜 비행이 아니니 중력가속도를 느끼는 것도 아니었는데 실패했습니다.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여기에 쿵, 저기에 쿵. 세 번이나 도전했는데 말입니다. 실은 착륙도 실패했답니다. 역시 아무나 탑건이 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