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빛나·김영철 기자] “소유한 빌라 외에 다른 건물들도 많다면서 안심하라고 공인중개사 자격증까지 보여줬어요.”
직장인 장모(35)씨는 악성 임대인·공인중개사 부부에게 2년 전 전세 사기를 당했다. 계약 당시 장 씨는 공인중개사가 임대인의 남편이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장 씨는 “‘우리 부부는 돈이 많다’는 이야기도 했고, 공인중개사가 소개해준 매물이니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하지만 임대인은 민사소송에서 졌음에도 돈이 없다며 빌라 전세보증금 8000만원을 안 주고 있다. 경매를 한다 해도 깡통 전세라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고 울분을 토했다.
전세 사기 범행에 가담한 특정 공인중개사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공분이 거세지고 있다. 이른바 ‘빌라왕’, ‘건축왕’이 판매하는 매물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거나, 숨기는데 가담한 일부 중개인들이 경찰 조사 결과 다수 드러났기 때문이다.
실제 경찰청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3월말까지 전세사기 전국 특별단속을 벌인 결과, 전세사기로 입건된 피의자 2188명 중 414명(18.9%)이 공인중개사였다. 가짜 임대인 1000명(45.7%) 다음으로 높은 비율로 공인중개사가 범행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개사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확산하면서 ‘실적 경쟁’에 따른 도덕적 해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1일 경찰 등에 따르면 ‘건축왕’, ‘화곡동 빌라왕’ 등 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에는 임대인과 공모한 공인중개사들이 있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의자인 건축업자 A(61)씨와 함께 사기와 공인중개사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공인중개사만 6명이다. 화곡동 빌라왕으로 불린 임대사업자 B씨도 공인중개사와 공모해 화곡동 일대 빌라 282채를 매입했다. 오피스텔 253채를 보유한 동탄 전세사기 사건의 피의자도 문제의 전세 거래 300건이 특정 공인중개사를 통해 중개됐다.
대형 전세사기에 공인중개사들이 잇따라 연루되면서 현장에서 체감하는 중개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늘었다. 서울 마포구에서 공인중개소를 운영하는 김모(48) 씨는 “시선이 따갑다. 가뜩이나 부동산 경기가 안 좋은데 사람들이 전국 공인중개사들을 사기꾼으로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고 했다. 김 씨는 다만 “공인중개사가 10만명이 넘는데 전세사기에 가담한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5년차 공인중개사 임모(30) 씨도 “선량한 공인중개사들도 타격을 입고 있다”고 호소하며 “사실 전세제도가 100% 안전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집주인의 가세가 기울어서 망해도 결과적으로는 전세사기가 된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의도적 범행 가담과 달리, ‘깡통 전세’ 판매 자체가 중개사의 도덕적 해이라는 지적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조항준 공인중개사 법률소비조합 대표는 “윤리 의식을 저버린 일부 중개인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사기 의도를 가지고 매물을 판 중개인인지, 아니면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깡통전세를 판 꼴이 된건지 구분하기 어렵다”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매물들은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판 것인데, 당시에는 ‘몇 년뒤면 무조건 오른다’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공인중개사법을 위반해 300만원 이상의 벌금을 선고받거나 거짓으로 중개사무소를 개업할 경우 자격이 박탈당한다. 하지만 벌금형을 선고받기 위해서는 중개사가 문제가 있는 매물을 팔 의도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처벌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김인만 부동산연구소장은 “인천 사례는 확실히 공인중개사가 사기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만, 최근 논란된 동탄 사례는 ‘결과적으로’ 중개사가 사기꾼이 된 사례같다”며 “전세 가격이 급등했을 때 공격적으로 오피스텔 매물을 중개한 것이라 도덕적 해이가 생긴 듯 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리해서 실적을 올리는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지해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일련의 사건 통해 중개사의 행태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자영업자인 공인중개사가 당장의 벌이에 집중하다보니 도덕적 의무를 지키는 것보다 실적을 우선하는 상황이 생겼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