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디토(Ditto·찬성)와 비토(Veto·반대)'로 갈등이 첨예한 세상 속 먹고 사는 이슈를 탐구합니다.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1만원은 3개월 할부로 끊어야 제맛이지."
'짠테크(짠돌이+재테크)족' A 씨는 몇달전 기존 신용카드를 해지하고 새 카드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1만원도 3개월 무이자 할부가 되는 카드입니다.
연이율을 3%라 치면 1만원의 한 달 이자는 25원. 3개월 무이자 할부면 약 50원을 절약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단돈 1원을 위해 '온라인 폐지줍기'(각종 앱의 출석체크 등 이벤트에 참여해 소액을 버는 것)도 유행하는 판에 가만히 앉아 50원이란 목돈을 버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죠. 매달 30만원의 소액 결제를 무이자 할부로 한다면 1500원씩 절약할 수 있습니다.
경기침체로 아우성인데…할부 거래 사상 최고
물가 상승, 경기 침체로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지면서 A 씨처럼 카드 할부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개인 신용카드 할부거래(2개월 이상)는 지난해 8월부터 5개월 연속 4000만건 이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4045만건으로 4000만건을 돌파한 이후, 9월 4021만9000건을 거쳐, 10월엔 4296만5000건으로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11월과 12월도 각각 4208만6000건, 4216만9000건입니다.
연간으로 봐도 지난해 4억7664만6000건으로 사상 최고치입니다. 2019년 처음으로 4억건을 넘어섰는데, 3년만에 5억건을 바라볼 정도가 됐습니다.
"매달 3333원씩 나눠 낼게요" 밥값도 부담스러워…소액 할부 급증
눈에 띄는 것은 A 씨 사례와 같은 소액 할부거래도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롯데카드가 자사 회원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10만원 이하 할부거래 건수는 2019년 대비 19.36% 늘었습니다. 10만원 초과 할부거래는 8% 정도밖에 늘지 않은 것에 비해 증가폭이 훨씬 큽니다.
카드사는 대개 5만원 이상 거래에 대해 무이자할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런 소액 할부족을 겨냥해 현대카드는 온라인쇼핑 등 일부 가맹점에 대해 1만원 이상 거래를 3개월(몇달전만 해도 7개월 할부였으나 축소했습니다) 무이자 할부로 해주고 있고, 롯데카드도 3만원 이상 거래를 3개월 무이자 할부로 지원하는 상품을 내놓았습니다.
밥값마저 부담돼서 할부로 계산한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것입니다.
전달 월세도 밀렸는데, 이달 월세가…할부로 월세 내는 자영업자
비단 밥값만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월세도 할부로 내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월세 납부 대행업체'를 통해 내는 건데요. 임대인에게 내야할 월세를 대행업체 측에 카드로 결제하면, 대행업체가 임대인의 계좌로 월세를 입금해주는 것입니다. 이용자는 대행업체에 이를 할부로 갚는 방식입니다.
월세 자체가 다달이 나가는 것인데, 이를 또 다달이 할부로 나눠서 갚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분도 있을 겁니다. 당장 이달 월세 낼 형편도 안될만큼 급박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이용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자영업자들이 이용한다고 하는데, 빠른 시일 내에 영업이나 자금 사정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월세와 할부금을 감당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수수료도 결제금액의 9%로 매우 높은 편입니다.
벌금, 추징금, 과태료를 카드 할부로 내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현금으로만 내야했는데 2018년부터 가능해졌습니다. 얼마 전 창원에서는 한 20대가 불법 촬영 범죄에 대한 벌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짓을 하다 살인미수까지 범하게 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는 일이 있었는데, 그에게 갱생의 의지가 있었다면 이런 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겠죠.
"일단 쓰고 봐" 돈도 못 버는데 할부 쓰는 10·20대
할부 거래는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은 10대 후반, 20대에게까지도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디지털 외상'이라 불리는 BNPL(Buy Now Pay Later) 서비스를 타고 말이죠. '지금 사고 지불은 나중에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서비스는 학생 등 소득·금융이력이 부족해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는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후불결제 서비스입니다. 네이버, 토스, 카카오, 쿠팡 등 핀테크 업체들이 서비스 중이고, 만 18세 이상이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 기준 네이버파이낸셜·카카오페이·토스의 BNPL 서비스 잔액은 406억원으로 6개월 전에 비해 143%나 늘었습니다. 가입자 수도 3사를 합해 222만475명에 달합니다. 우리나라는 신용카드가 널리 확산돼 있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지만, 미국, 유럽 등에서는 MZ 세대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기존에 할부 서비스로부터 소외됐던 이들에게까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는 그럴 듯 해보이지만, 문제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과도한 소비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쓰지 않는다는 게 기존의 경제적 상식이지만, BNPL은 '일단 지르고 나중에 생각해'라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카드 할부도 안고 있는 문제죠.
네이버파이낸셜 BNPL 연체율은 지난해 8월 1.48%에서 12월 2.14%로 늘었고, 토스도 1.15%에서 3.48%로 올랐습니다. 신용카드사 연체율 1.2%에 비하면 2~3배가 높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할부 인생'…할부→리볼빙→파산
전문가들은 향후 할부 거래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카드사들은 그간 금리 인상을 반영해 무이자 할부 등의 혜택을 줄여왔는데, 금리가 다시 하락하면 혜택을 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드사들은 여신전문금융채권(여전채)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데, 여전채 금리는 올해 1월초 연 5% 중반이었던 것이 최근 3% 후반까지 떨어졌습니다.
하반기에 경기 침체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점 역시 변수 중 하나입니다. 경기 침체가 본격화될 경우 전반적인 카드사용액은 줄어들지만, 할부 거래 비중은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입니다.
이는 일각에서 '제2 카드 사태'를 우려하는 이유입니다. 할부만 적당히 쓰고 잘 갚고 끝난다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 할부금을 갚지 못해 리볼빙 서비스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리볼빙은 할부금의 일부만 갚고 나머지는 다음달로 미뤄 갚는 상품이죠.
문제는 리볼빙 수수료율이 법정 최고금리(20%)에 가까운 연 18%대라는 점입니다. 리볼빙을 통해 연체를 피할 수 있지만, 수수료가 18%로 대부업 대출에 버금가는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제도권 금융에서 거의 한계에 다다른 사람이 이용하는 상품으로, 그 끝은 대개 '파산'입니다. 이는 카드사들의 건전성도 위협합니다.
지난 2월 말 기준 주요 카드사 7곳(롯데·삼성·신한·우리·하나·현대·KB국민카드)의 리볼빙 잔액이 7조2893억원으로 1년새 1조원이나 늘었다는 점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