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피해자가 겪었던 식고문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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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식(食)' 행위가 고통으로 바뀌는 순간, 인생은 지옥이 된다.

가혹행위에 의한 '트라우마'로 섭식장애, 미각상실, 영구 뇌손상과 같은 후유증을 얻게 되면, 평생 먹는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변질시킨다.

넷플릭스 인기드라마 '더글로리' 시즌2가 본격 시작되고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전력이 논란이 되면서 '학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학폭'의 수단 중 하나로는 음식도 거론된다. 이른바 '식고문'이다. 먹지 못할 만큼의 음식을 먹이거나, 오물 등을 음식에 섞어 억지로 먹이는 가혹행위다.

헤럴드경제는 10여년 전 중학생 시절 식고문을 당한 학폭 피해자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고 사건을 재구성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침 뱉은 급식 안 먹었단 이유로 '오줌 빵' 먹였다

[헤럴드DB]

"제발...형식아 아..진짜 제발"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 빨갛게 울상을 지은 13살 진영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씨, 야 빨리 입 벌려. 너때매 이거 손에 묻을라 하잖아" 형식은 짜증과 조롱이 섞인 웃음을 참아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있는 곳은 방과 후 학교 화장실. 형식의 손에는 막힌 변기에 고여있던 오줌에 담갔다 뺀 빵이 들려 있었다.

형식의 괴롭힘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됐다. 살갑게 굴던 형식이 어느날부터 장난을 걸어왔다. 시작은 그랬다. 장난은 얼마 안 가 괴롭힘으로 둔갑했다. 급식으로 나온 우유를 진영에게 터뜨리고, 숙제나 체육복을 가져간 뒤 숨기기도 했다. 선생님에게 말해도 2~3일 잠잠해질 뿐, 괴롭힘은 강도가 더 세져 돌아왔다.

어느날 점심시간, 형식은 진영의 급식에 침을 뱉었다. 진영은 툴툴거리며 급식을 모두 버렸다. 그 후로 재미가 들렸는지 형식은 점심시간이면 진영의 급식에 침을 뱉거나 잔반을 붓는 등 괴롭힘을 이어갔다. 그럴 때마다 진영은 '하지말라'고 발버둥쳤고, 형식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재밌다는 듯 웃거나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갔다. 그 모든 게 형식에게는 재밌는 장난거리에 불과했다.

급식 자료사진. [연합]

"하지 말라고 좀!"

이날은 진영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식판을 잔반통에 내던지며 형식에게 소리쳤다. 형식의 표정이 굳어졌다. 식판은 진영에게 다시 날아왔다. 교복이 음식물로 더러워졌다. 한번도 누군가와 싸워본 적 없던 진영은 무서워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학교 끝나고 4층 화장실로 와라' 5교시가 시작될 무렵 형식에게 문자가 왔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내일을 생각하니 차라리 오늘 맞더라도 끝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찾아갔다. 웃음기 띤 얼굴로 진영을 기다리던 형식의 손에는 빵이 들려 있었다.

'트라우마→섭식장애→미각상실'…후유증에 끝은 없다

[헤럴드DB]

"빵을 먹는 순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지금도 그 찌린내만은 느껴져요. 계속 구역질을 했던 거 같아요."

전화 넘어로 들리는 피해자 김진영(26) 씨의 음성은 떨렸다. 10년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몸에는 공포가 남아 있는 듯 했다.

그 때의 기억은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 후로 몇 달 간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었어요. 50kg 정도였던 몸무게가 한달여 만에 40kg까지 빠졌었어요. 거식증인지 음식을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나중에 먹는 것은 가능했지만 지금까지도 이상하게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저 스스로 맛을 차단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몸이 기억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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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추궁에 사실을 털어놨다. 어머니는 맞벌이로 신경을 못 써줘서 미안하다며 진영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형식을 만나 직접 해결하겠다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뜯어 말렸다. 학교에 사실을 전달했고, 형식은 며칠 뒤 전학을 갔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한 마디 사과는 하지 않았다.

지난해 진영은 이 일을 뒤늦게 폭행·성폭행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그가 형식에게 당했던 학폭은 식고문 외에 폭력과 성폭력 등 상상 이상의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최근 진영은 경찰로부터 '불송치' 통보를 받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진영은 포기하지 않고 경찰에 이의신청을 했다.

"가해자가 일부 폭행을 개인적으로 저에게 인정했음에도, 경찰에게는 발뺌을 하니 불송치가 나오네요. 피해자는 분명히 있고 저는 아직 괴로운데, 응징할 방법이 없어져서 너무 힘들어요.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그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느껴졌다.

영구적인 '뇌손상' 가능성도…의학적 치료가 시급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지금 빨리 병원에 가보셔야 합니다. 영구적인 뇌손상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어요." 헤럴드경제를 통해 진영의 상태를 전달받은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트라우마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당시 사건 직후 섭식장애가 있었고 이어서 맛을 느끼지 못하는 건 뇌의 어떤 부분이 충격으로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임 교수는 설명했다.

'혼자서는 극복할 방법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임 교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없습니다. 트라우마는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치료를 해야 하는 병입니다. 한국은 트라우마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주먹으로 때리는 신체적 폭력이 아니라 식고문과 같은 정서적 트라우마입니다. "

게티이미지뱅크

학폭 가해자는 어째서 이토록 끔찍한 식고문을 했을까. 임 교수는 '피해자가 더 큰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더 큰 쾌락을 얻는 가해자의 심리'를 원인으로 꼽았다.

"학폭 가해자들 또는 누군가를 괴롭히는 이들의 공통점은 피해자의 고통을 보고 쾌락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 고통이 클수록 쾌락은 더 커지죠. 학습을 통해 점점 더 강한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게 식고문 또는 성고문이었던거죠. 주먹으로 때리는 것보다 티는 나지 않으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방법 말입니다."

'식고문'의 비극적 종말은 '극단적 선택'…그것은 타살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진영의 사례만이 아니다. 지금도 학폭을 당하는 누군가는 식고문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식고문은 드라마 소재로 이용될 만큼 학폭의 수단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만큼 식고문으로 인해 섭식장애 등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 끝은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임 교수는 "실제 식고문과 같이 음식과 관련한 끔찍한 기억으로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우려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섭식장애 환자 수는 2017년 8168명에서 2021년 1만900명으로 증가했다. 진영이 겪었던 대표적 섭식장애인 '신경성 식욕부진증(거식증)' 진료인원은 같은 기간 1661명에서 2201명으로 늘었다.

[자료=건강보험심사평가원]

문제는 실제 통계에 잡히지 않은 섭식장애 수가 훨씬 많을 것이라는 데 있다. 섭식장애로 고통을 호소해도 주변에서는 그저 입맛이 없는 것 정도로 치부하니 병원에 가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섭식장애클리닉의 김율리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섭식장애의 유병률은 인구의 3%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만 약 155만명이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는 셈이다.

학폭 등의 이유로 섭식장애를 호소하는 이들의 나이도 점차 어려지고 있다. 안주란 백상정신건강의학과 부설 백상식이장애센터 센터장은 "환자들의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섭식장애는 결국 '자살'이라는 끔찍한 선택으로 종말을 맡기도 한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신경성 식욕부진증으로 인한 사망위험율은 일반 인구 대비 6배 높으며, 그 중 20%는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다.

학폭 근절과 트라우마 치료의 시작,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헤럴드DB]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 가장 시급한 건 학폭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입니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 범죄자에게 관대하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접수된 소년 보호 사건은 3만5438건인데 이 중 63.2%(2만2144명)가 보호 처분을 받았다. 이들은 주로 호기심(40.3%)이나 우발적 행동(39.2%) 등의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는데 강한 처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학폭 역시 마찬가지다. 학폭이 발생하면, 학교는 학폭위원회를 열고 학생부에 기록을 하고 심하면 전학조치를 한다. 이게 끝이다. 학생부 기록이라고 해봤자, 대입에도 영향이 없고 졸업 후 2년이면 삭제된다.

피해자에 대한 보호 조치도 아쉽다. 한국교육개발원(KEDI)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 1만1794개 초중고 중 정규직 전문상담교사가 배치된 학교는 4193개교(35.5%)에 불과했다. 비정규직 등 전체 전문상담교사로 범위를 넓혀도 배치율은 41.8%에 그쳤다. 전문상담교사는 학폭을 초기 감지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 안내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그나마 학폭이 사회적 이슈가 되니, 이제야 여당을 중심으로 대입에 불이익을 받도록 조치를 취하고 학폭 기록 보존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마저도 야당의 반대로 현실화되기까지는 상당한 험로가 예상된다.

2022학년도는 추정치 [자료: 교육부]

학폭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0학년도 2만5903건이던 학폭 신고 건수는 2022학년도 6만건으로 두배를 훌쩍 넘어섰다.

임 교수는 "학폭 근절의 핵심은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라며 "이는 학폭으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