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디토(Ditto·찬성)와 비토(Veto·반대)'로 갈등이 첨예한 먹고 사는 이슈를 탐구합니다.

산은 직원들이 지난해 6월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의 출근을 막기 위해 드러누워 있다.[연합]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자기들은 강남에 수십억짜리 집 갖고 있으면서 힘 없는 사람만 지방 가라니 이게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아니면 뭡니까."

얼마 전 만난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으로 벌써 8년째 가족이 있는 서울과 직장이 있는 지방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지방 출신으로 지역균형발전을 누구보다 찬성하지만, 자기 잇속만 챙기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화가 난다는데요.

대체 어떻길래 그리 분통을 터뜨리는지, 국회의원들의 재산을 전수조사해봤습니다.

'산은 부산 오라'는 부울경 의원들… 42.5%가 서울에 집

산은 부산 이전 법안 발의에 참여한 국회의원 중 서울에 집을 보유한 의원. 왼쪽부터 김도읍, 김희곤, 이주환, 이헌승, 조경태 의원]

요즘 공공기관 지방이전 이슈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는 산업은행(산은)의 부산 이전이죠.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약속한 일입니다. 산은을 부산으로 보내려면 '한국산업은행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법에서 '본점은 서울에 둔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국회에는 개정안이 제출돼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이 낸 것인데요, 법안을 공동발의한 김도읍·김미애·김희곤·박수영·백종헌·안병길·이주환·이헌승·장제원·전봉민·정동만·조경태·하태경·황보승희 등(이상 국민의힘) 15명의 의원 모두 부산을 지역구로 둔 의원입니다.

그런데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공개된 이들의 재산 상황을 살펴보면, 이들 중 5명이 서울에 아파트를 갖고 있습니다. 김도읍 의원은 송파구 잠실에, 이주환 의원은 마포구에, 김희곤 의원과 조경태 의원은 각각 강서구에 있습니다. 이헌승 의원은 서초구 래미안원베일리 분양권을 갖고 있고, 자녀 명의로도 서초구 반포미도2차 아파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 의원 소유였지만 증여한 거죠.

산업은행으로 수혜를 입는 소위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은 총 의원 40명 중 무려 17명(42.5%)이 서울에 주택을 보유 중입니다. 앞서 언급한 5명 외에도 김영선, 김태호, 박대출, 서범수, 서일준, 윤영석, 이달곤, 정점식, 조해진, 최형두, 하영제(이상 국민의힘), 민홍철(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있습니다. '산은과 그 직원들을 부산으로 옮겨오라' 하고서는 정작 본인들은 서울에 양다리를 걸쳐놓은 셈입니다.

지역구는 지방인데 서울에 집 가진 의원이 30%

영남 지역구 의원들이 서울에 집을 가진 비율이 다소 높은 편이긴 하지만, 특정 지역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 국회의원 299명 중 서울에 부동산을 갖고 있는 의원은 134명입니다. 이 중 서울이 지역구(33명)이거나 비례대표(23명)인 경우를 빼면 78명이 자기 지역구가 아님에도 서울에 부동산을 갖고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지역구 의원 총수가 252명인데요, 30.9%가 서울에 집을 둔 겁니다.

지역별로 보면, 강원도와 충청북도는 각각 총 의원 8명 중 6명씩 서울에 집을 갖고 있습니다. 75%로 비율이 가장 높습니다. 대구·경상북도는 총 의원 25명 중 14명(56%)가 서울에 집이 있습니다.

대전·충남·세종은 20명 중 7명(35%)이, 광주·전남·전북은 27명 중 8명(29.6%), 인천·경기는 72명 중 20명(27.8%)입니다. 제주도를 지역구로 둔 의원만 서울에 집이 없습니다.

물론 여의도에서의 의정 활동과 지역구 활동을 다 하려면 양쪽에 주거지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명 중 7명은 오피스텔을 임차하는 등의 방법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굳이 서울에 집을 살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특히 지역균형발전을 내세우며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주장하는 입장이라면 '내로남불'이 아닌 '솔선수범' 차원에서 서울의 집을 포기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도 나옵니다.

"지방은 소멸 직전" vs "서울도 소멸할 판, 누굴 떼어줘?"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해 6월 취임해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본점 부산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최근 "1분기 중 지방이전 대상기관으로 지정되는 프로세스를 밟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합]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이슈에 대해 찬반 입장을 정하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지역 소멸 위기에 대응해 지역 균형 발전을 해야 하고, 자금 공급 능력이 있는 산업은행을 내려보내면 뭐라도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산업은행이 부산만을 위한 은행이 아니고 국가 전체를 위한 정책금융을 집행해야 하는데, 경제·금융의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지방에 보내는 것이 국가적 손실 아니냐는 의견도 팽팽히 맞섭니다.

산은의 부산 이전은 이미 노무현 정부 때부터 관련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세웠던 지방 이전을 통한 균형 발전 계획이, 2023년인 현재도 유효한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역 소멸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합계출산율 0.78명으로 대한민국이 통째 소멸될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은 합계출산율 0.59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낮습니다. 기존에는 인구가 서울로 쏠려서 문제였다면 지금은 다같이 빠져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일은 사회적 의견 수렴이나 검토 과정 없이 일방통행 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해 기자간담회에서 지방 이전을 추진하는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국가 최고 책임자가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까라면 까' 식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최근에는 1분기 중 지방이전 대상기관으로 지정되도록 하겠다며 밀어부치고 있습니다.

지방 이전 '나눠먹기식' 진행되나

이동걸 전 산은 회장은 회장 시절부터 산은이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2일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산은은 기업과 긴밀히 소통해야 하는데, 단순히 지역균형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국책은행을 지방으로 이전한다면 지역균형 발전에 도움이 되지도 않으면서 국가 전체에 뼈아픈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산은 제공]

"다른 데 같으면 '찍' 소리 못하고 갔을텐데, 확실히 산업은행 파워가 대단하긴 해요. 그럼 뭐 합니까. 결국 '졌잘싸'(잘 싸웠지만 졌다)가 될 거라 봅니다."

서두에 언급했던 공공기관 관계자의 말입니다. 그가 결국 '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이유는 이미 토론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닌 힘의 문제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은 산은의 편은 아닙니다. 정부는 산업은행만이 아니라 수도권 소재 다른 공공기관들도 지방으로 옮길 계획입니다. 한국은행, 기업은행, 농협·수협중앙회 등 굵직한 기관들이 거론됩니다. 이미 지자체들은 유치 계획을 세우고 경쟁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산업은행을 부산에 내주는 대신 우리 지역에는 다른 것을 얻어올 수 있다는 계산이죠. 정치권에서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산은의 서울 존치를 주장해 줄 이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입니다.

지난 2일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는 산은 이전 문제를 놓고 토론회가 열렸는데요, 이동걸 전 산은 회장이 오랜만에 등장해 부산 이전을 비판하면서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정작 권한이 있는 사람은 참석하지 않아 다소 힘이 빠지는 행사였다는 말도 나옵니다.

이동걸 전 산은 회장은 이날 "산은은 기업과 긴밀히 소통해야 하는데, 단순히 지역균형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국책은행을 지방으로 이전한다면 지역균형 발전에 도움이 되지도 않으면서 국가 전체에 뼈아픈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한국의 '디아스포라'들

현재 서울 여의도 산은 본점의 모습. 본점을 부산으로 이전할 경우 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수 있다. [산은 제공]

산은 직원들은 '부산 이전'에 반대하며 무려 9개월 동안 매일 아침 서울 여의도 본점에서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본점 근무 직원이 2000명 가까이 되는데 매일 300~400명이 집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 집회를 처음 열었을 때 산은 노동조합 집행부가 일부 노조원만 데리고 집회를 했는데, 직원들이 '그래 가지고 부산 이전 막을 수 있겠냐', '소극적인 노조 집행부 물러나라' 등 성화를 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를 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거죠.

누군가 지방 이전으로 옮겨간 공공기관 직원을 '디아스포라'라고 표현한 기억이 납니다. 기원전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로 이주하게 된 유대인을 디아스포라라고 하죠. '강제 이주'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도 씁니다. 유대인의 핍박받은 삶만큼은 아니겠지만,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상당한 인권 침해를 수반한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야 할 수도 있고, 가족이 다 함께 옮겨가더라도 친구·지인들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 초중고 자녀를 키운다거나, 나이 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경우라면 또 다른 어려움이 생깁니다. 한 사람 혹은 그 가족의 인생을 뿌리째 뽑아 옮겨 심는다 해도 무방한 일입니다.

실제 공공기관 지방 이전 초반에는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도 적잖은 이슈가 됐습니다. 불륜이나 외로움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보도도 간간이 있었습니다. '지역균형발전', '국가경쟁력강화', '금융중심지조성'과 같은 거대담론에 묻어버릴 수 만은 없는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