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연 ‘셰익스피어 인 러브’
사랑과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미안해요. 난 그저 여러분들처럼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 중 비올라 대사)
여성은 무대에 설 수 없던 시절, 연극을 동경한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인도는 내줄지라도 이 사람은 줄 수 없다”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언의 주인공,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뮤즈는 남장을 하고 무대에 서려던 것이 탄로나 극장 문을 닫게 되자 이렇게 말한다. 여름날의 아련한 향기를 품은 음성이었다. 2003년 CF를 통해 데뷔, 스크린과 TV를 종횡무진했다. 어느덧 데뷔 20년. 배우 김유정(24)은 ‘고전의 세계’를 통해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제게 연극은 늘 꿈이었어요. 항상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는데, 앞으로 살면서 힘든 순간에 생각날 만큼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아요.”
배우 김유정은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해 “처음엔 무섭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두 달여간 이 작품을 위해 한 장면 한 장면 많은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러브 스토리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셰익스피어의 사랑에서 영감을 받았을 거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1998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때는 1593년. 영국 런던의 촉망받는 신인 작가 셰익스피어가 ‘창작의 고통’에서 깨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뮤즈’를 찾아다니다 부호의 딸 비올라를 만나 쌓아가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다. 셰익스피어와 비올라의 이야기에 그의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엮이며 무대는 ‘신비로운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한국 초연으로 막을 올린 연극은 개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청춘스타로 성장한 김유정과 이상이 김성철 전소민 채수빈 정문성에 이르는 화려한 캐스팅 때문이었다. 여섯 명의 주연 배우들이 다양한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시너지에 연극은 이미 반응이 좋다.
첫 연극에 도전한 김유정도 ‘합격점’을 받고 있다. 남장을 하고 배우가 된 켄트와 본체인 비올라를 자유롭게 오간다. 이미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MBC)을 통해 역대 최고의 ‘남장 여자’를 연기한 경험은 무대에서도 어색하지 않게 그려졌다. 특히나 연극은 물론 셰익스피어와도 사랑에 빠진 비올라의 눈빛이 객석까지 고스란히 와닿고, 여름밤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문학적인 대사와 소네트 구절을 오가며 정확한 발음으로 전달된다.
20년 간 카메라 앞에 선 만큼 연극 무대에서의 연기는 사실 낯선 경험이었다. 김유정은 “어렸을 때부터 대본을 수없이 읽었지만, 연극 대본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분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연습할 때마다 많은 의견을 나누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끝나는게 아쉬울 만큼 많은 걸 배웠다”며 “두려움을 잊을 만큼 동료 배우들이 좋은 길로 이끌어줬다”고 돌아봤다.
배우 정소민도 첫 연극이다. 정소민은 “오랜 꿈을 이뤄 행복하다”며 “데뷔 이후 경험하지 못한 설렘을 만나고 있다. 이 작품이 지금의 내게 숨구멍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의 가치’와 매력에 현대적인 감수성을 입혔다. 송한샘 쇼노트 프로듀서는 “고전은 시공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가치를 굳건히 하는 것”이라며 “소네트를 현대적으로 변주하며 재생산했고, ‘로미오와 줄리엣’ 대사는 원작에 충실해 시연했다. 16세기의 화법에서 현대적인 말투를 쉴새없이 오가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분들을 빠른 템포로 녹아나게 했다”고 말했다.
무대 예술도 인상적이다. 10m 가량 올라가는 승강무대를 활용해 16세기 영국의 예술가들이 모이던 술집 장면으로 바꾸고, 360도로 돌아가는 회전 무대로 암전 없이 장면 전환을 꾀했다. 송 프로듀서는 “대부분 앉아서 이야기하는 신이 많은 응접실 연극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연극이 됐다”고 말했다. 섬세하게 고증된 무대와 기존 연극에선 볼 수 없던 뮤지컬과 같은 장치들이 이 연극이 VIP석 11만원까지 오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총 22명의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며 무대 예술의 묘미를 살려낸다. 송 프로듀서는 “다수의 배우들이 나와 무대를 채우고, 공연 내내 단 한번의 암전도 없이 쉬지 않고 무대가 전환된다”며 “공연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와 비올라의 사랑, ‘셰익스피어 시대’에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 안엔 대문호의 실제 작품과 당대의 실존 인물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당대의 천재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 영국 최초 남성 극단 ‘체임버레인스 멘’의 주연 배우 네드 앨린, 극장 경영의 기틀을 닦은 필립 헨슬로까지. 송 프로듀서는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연극을 만들며 꿈을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라고 했고, 연출을 맡은 김동연은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며 “연극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임을 관객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그들 스스로의 이야기인 만큼 이 작품을 만나는 배우들의 마음도 남다르다. 전소민은 “연극은 배우와 제작자들의 꿈과 염원이 담긴 일”이라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공연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공연 시작 전의 루틴도 생겼다. 이상이는 “아코디언과 기타 연주자의 음악으로 막이 오를 때, 배우들은 무대 뒤에서 춤을 추면서 기다린다”며 “그 마음이 관객들에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 개막이지만, 벌써 폐막의 아쉬움까지 걱정한다. 김유정의 이야기다.
“첫 공연을 올리는 날이 생각이 나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이 첫 공연이라 너무 좋은 것이 아니라 오늘 공연을 하면 앞으로 공연할 날 중 한 번이 지나가는 구나 싶어 슬프고 아쉬웠던 기억이 있어요. 제겐 매일매일이 아쉬운 작품이고, 앞으로 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힘들고 지친 순간이 올 때마다 이 곳에서 느낀 열정과 사랑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