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율이 만난사람]
개그맨·사업가 겸 작가 고명환의 독서법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당장 1초 뒤에 의식을 잃을 수 있어요. 길어야 이틀입니다."
끔찍한 교통사고였다. 2005년 1월, 전남에서 드라마 '해신'을 촬영하고 서울로 오던 차는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박살이 났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즉사자가 발생해도 이상할 것 없던 일이었다. 다행히 고명환은 살았다. 보조석에 있던 그는 왼쪽 눈 주위와 이마가 크게 찢어졌다. 뇌출혈까지 왔다. 그런데도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언제 심장이 터질지 모르니 빨리 신변 정리를 마치라는 말도 들었다. 일단 살았을 뿐, 아직 고비를 넘긴 게 아니었다.
고명환은 맥없이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그 순간부터 고명환은 삶을 생각했다. 정확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뇌가 알아서 삶을 재생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방에 홀로 있는 느낌이었다. 죽음과 바짝 붙은 그의 뇌가 보여주는 건 의외의 장면이었다. 패기 어린 시절 밀어붙인 4개월간의 재수생 생활, 그것이었다. 대학개그제에서 금상을 탄 순간도,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남자 우수상을 받은 장면조차 '1'도 나오지 않았다.
'내 삶에서 100% 내 의지로 산 기간은 그 4개월이 전부구나. 34년을 살았는데, 진짜 '내 인생'을 산 기간은 4개월밖에 안 되는구나.'
고명환은 깨달았다. 그 4개월이 아닌 나머지 모든 삶은 끌려가는 생이었다. 휘둘리는 생이었다. '내 의지로 이끌어가는 삶의 순간을 4개월에서 40개월, 아니 400개월 그 이상으로 만들겠다. 다시 일어설 수만 있다면….' 고명환은 거듭 되새겼다. 기적이 또 문을 두드렸다. 그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다. 멈추지도 않았다. 이틀이 지났다. 일주일을 넘겼다. 고명환은 일반실로 옮겨졌다. 얼마 뒤 퇴원까지 했다.
고명환이 가장 먼저 찾은 건 책이었다.
당장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유익한 게 독서라고 봤다. 그때부터 지겹게 읽었다. 잡히는 대로 탐독했다. 일이 없으면 하루에 15시간씩 책만 잡았다. 어느새 집에는 책만 5000여권이 쌓였다. 그사이 삶은 조금씩 달라졌다. 의욕이 생겼다. 옭아매는 모든 일을 뒤로한 채, 무언가 마구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고명환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제대로 책을 읽은 지 18년이 지났다. 현재 고명환은 메밀국수 음식점과 돼지갈비 음식점 등 사업체를 다수 운영 중이다. 연 매출도 10억원 이상씩 내고 있다. 입소문이 나 방송 프로그램 '서민갑부'에도 출연했다. 쉬는 날에는 책을 쓰고, 강연도 나간다. 내놓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가는 곳마다 인기 강사로 대우받는다. 사고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삶이다. 지난 17일 서울 양천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고명환(50·사진)은 에너지가 가득했다. 개그맨, 성공한 사업가 겸 작가, 무엇보다 독서 전도사가 된 그에게 변화한 삶을 물었다.
“책 안 읽고 한 사업, 다 실패…읽고 한 사업은 다 성공”
-교통사고 전후로 삶을 보는 태도가 특히 달라지셨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끌려가지 않는 하루, 매 순간 행복한 하루를 평생 보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텐데 그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지요. 경영인 짐 콜린스는 어떤 계기를 맞고 '내 인생이 30초만에 바뀌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어요. 저로서는 병실에 누워있는 그 순간이 제 인생을 바꾸는 시간이었어요.
-고민 이후 일단 책부터 잡으신 것이군요.
▶결국 생각의 끝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어요. 죽음 문턱에 다녀와봤더니 이게 참 궁금했어요. 답하기가 힘든 질문이지요. 답답했어요. 그래서 책을 읽었어요. 그때도 물론 인터넷은 있었지만, 스마트 기기로 유튜브 강연 같은 걸 들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어요.
-책이 사업에도 영향을 줬나요.
▶사실은요. 책을 안 읽었던 시절에 제가 한 사업은 다 망했어요. 책을 읽고 나서 한 사업은 다 성공했어요.
가령 백종원(더본코리아 대표)과 일반인이 식당을 차린다면 둘 중에는 당연히 백종원이 성공할 것 같지요. 이는 백종원이 요식업 분야에서 '사유의 시선'이 높은 덕이라고 봐요. 독서를 통해 그 사유의 시선을 높일 수 있고요. 과거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동남풍이 불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감과 미신에 기댄 게 아니고, 지구와 별의 움직임을 보고 파악한 것이에요. 이 또한 책을 통해 사유의 시선을 높인 덕에 예측할 수 있던 일이라고 봅니다.
-책의 유익함이야 알지만, 습관이 되기는 힘든데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독서 습관도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로 꾸려진다고 봐요.
독서에 입문하는 분은 낙타 단계지요. 우리 뇌는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하면 겁부터 줍니다. 생각하는 건 힘이 드는 일이니까, 아예 '내가 힘들어지니까 하지 마'라는 식으로 졸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낙타 단계를 어떻게 넘나요?
▶저만의 독서 입문법이 있어요. 특히 어린 아이에게 효과 있는 방법인데요.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면 '딱 1분만 책을 만져보라'고 하는 것이에요. 딱딱한 무게감도 느껴보고, 종이 특유의 냄새도 맡아보게 해요. 그리고 아무 쪽이나 펼쳐서 딱 한 줄만 소리 내서 읽게끔 해요. 그다음에는 책을 놓고 놀게 해도 상관없어요. 부모님은 딱 6개월만 이렇게 노력하면 돼요. 그러면 (아이의)뇌도 속아요. 책에 익숙해지고, 거부감이 없어져요. 강원국 작가님도 "참신한 방법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사자 단계가 되는군요.
▶사자 단계에선 유명한 책을 읽는 게 맞아요. 많은 분이 추천하는 책, 베스트셀러 위주로 읽어도 돼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용기가 생겨요. 내가 읽을 책을 스스로 찾고 고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린아이 단계네요.
▶한 3000권 정도 읽으면,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돼요.
그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요. 과거로 치면 에디슨과 아인슈타인, 요즘으로 치면 일론 머스크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쯤부터는 내가 책을 그간 몇 권이나 읽었고, 얼마나 많은 문장을 봤는 지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저도 교통사고 이후부터만 헤아려도 어느새 3000권 정도를 읽었더라고요.
요즘은 어떤 날은 1~2장밖에 못 읽어요. 운 좋게도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는 문장을 보면 그대로 멈춰서 생각해요. 사색이지요. 제가 저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쾌감의 시간이에요. 물론 날 잡고 읽으면 하루에 15시간씩도 읽어요. 제 정신은 책을 볼수록 더 맑아져요. 스마트폰은 30분만 해도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게 됐어요.
-'인생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으시겠어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면 농담 투로 혼을 내요. '좀 더 빨리'라는 조급함이 인생 책을 찾도록 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요즘 유튜브 문법으로 보면 '3년 만에 100억원을 번 비법' 같은 콘텐츠를 찾는 일과 비슷하다고 봐요. 그런데요. 외려 이런 게 사람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들 각자의 때가 있고, 각자의 타이밍이 있어요. 인고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했을 때, 그때 맞이할 수 있는 게 진짜 깨달음이라고 보거든요.
“그놈의 안정이 문제…‘진짜 안정’ 맞는지 질문하라”
고명환은 교통사고 이후 '안정'을 버렸다. 잘 나가고 있는 개그맨의 길이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고명환은 "'왜 그래, 여태 해온 게 아깝지 않아?'라고 하면, '더 이상 끌려다니기가 싫었다'고 답했다"고 했다. 개그맨 시절 일상은 TV 편성표에 맞춰졌다. 개그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으면 오전 3~4시까지 집에도 가지 못했다. 그는 "물론, 정해진 스케줄에 맞게 움직여야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분도 있다"며 "그런 분이라면 직장인이 천직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물었을 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다"고 했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놈의 안정이 문제입니다. 한탄은 하지만 정작 안정이 깨질까 봐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있는 분이 다수입니다. 저는 10년 넘게 대학생들에게 뮤지컬을 가르치고 있어요. 제가 제시하는 주제는 항상 '나의 꿈'이에요. 10년간 대학생 수백명을 만났어요. 꿈의 99%가 대기업·공기업·공무원이에요. 모두가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이 있어요. 대기업·공기업·공무원의 삶은 진짜 안정적인 삶일까요.
대기업에서 일하는 50대의 제 또래 친구들은 자신이 100명 중 3명만 된다는 임원이 될 수 있을지, 되지 못할 지를 알아요. '전교 1등 하라고 해서 했고, 명문대 가라고 해서 갔고, 그렇게 대기업·공기업 갔는데 결국 50대가 넘어 임원을 못 달면 쓸쓸하게 퇴직해야 한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최근 제 친구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해요. 그러고는 그제야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요. '내 인생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100살까지도 사는데, 은퇴하고서도 30~4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 놓일 수 있지요.
-그때부터는 안정은 더 이상 안정이 되지 않는군요.
▶임원으로 은퇴한다면야 먹고살 만하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97명은요. 우울한 삶을 맞이할 수 있지요.
저는 많은 분이 계속 새로운 걸 배우고, 관심을 두고, 도전하면 좋겠어요. 결과만큼 과정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그 자리가 안정적이라고 머물지 말고, 어떻게든 흘러가기를 바라요. 지금 당장 사직서를 내라는 게 아니에요. '나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뒤 직장생활이 맞으면 그 안에서 변화를, 이 생활이 맞지 않으면 과감한 도전을 해도 괜찮으리라 생각해요.
(개그맨)박명수 형도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 성공했어요.
명수 형은 '나는 죽어도 2인자'라고 하지요. 그 형도 메인 MC로 1인자에 오를 수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 형은 그 자리를 마다했어요. 아마 그때 욕심을 냈다면 지금만큼 잘 되지는 않았을 수 있어요. 명수 형은 늘 자신을 모자란 사람으로 칭했어요. 명수 형이 어느 날 집을 사고 싶었어요. 스스로 공부와 안 맞는다는 것을 안 그 형은 그날부터 맨날 부동산에 가서 귀동냥을 했어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지금은 방송도, 재테크도 잘하는 사람이 됐지요.
-요즘 일과는 어떤가요.
▶새벽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요. 오늘도 끌려가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지요. 아침마다 '긍정 확언' 영상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요. 그렇게 긍정의 말을 꺼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일주일에 닷새는 아침에 도서관에 갑니다. 특이한 건 이른 시간에 도서관 주차장을 가면 고급 차가 많아요. 제가 종종 앉는 자리에 가서 30분~1시간가량 책을 읽어요. 고민할 거리가 있으면 책을 덮고 생각해요. 이 일정을 소화하고 일에 나섭니다. 첫 단추를 잘 끼운 덕에 하루를 허둥지둥 보내지 않게 돼요. 누군가는 '언제 책도 쓰고, 사업도 하고, 가게도 새로 여느냐'고 놀라는데 저는 하루하루가 너무 여유로워요.
저녁에는 다시 도서관에 가요.
10분 뒤 문을 닫는다고 해도 꼭 갑니다. 그날 하루를 복기하고, 내일을 미리 정리합니다. 사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도서관에 가는 일, 오전에 '긍정 확언'을 외치는 일 모두 합쳐봐야 1시간 정도에요. 그런데, 이 일을 매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5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하면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차이가 생긴다고 확신해요.
-주도적인 삶을 찾으신 것이군요.
▶서른네 살에 당한 사고 이후 생각했어요. 어느 정도 준비할 시간을 가진 뒤 마흔 살부터는 절대 끌려다니면서 살지 않겠다고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렇게 됐어요. (마흔 살 후부터)제가 하기 싫은, 끌려가는 일을 한 적은 손가락에 꼽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