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허백련 선생의 휴머니즘 예술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네가 필요한 크기 만큼 종이를 잘라라.”
무등산 증심사 옆에는 춘설헌의 주인이자 문인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1891~1977) 선생의 의재미술관이 청정 숲속에 있는 듯 없는 듯, 착상해 있다. 증심사 계곡길은 산행이 허락되는 지점까지 무등산에 오를 때 가장 편한 길이라 어린아이도 어렵지 않게 가는 산행로이다.
▶증심사계곡 단풍 살아있네= 계곡 옆이라 뿌리쪽 수분이 넉넉하고 한낮에만 강한 빛을 받는 곳이라서, 이곳 단풍은 11월 하순인 지금에야 절정이다.
의재미술관에선 오는 28일까지 일정으로 ‘인연의 향기를 듣다’는 부제의 ‘문향(聞香)’전을 열고 있다. 이웃과 나눈 작품 즉, 무료로 선물한 걸작들을, 선사받은 분들로부터 다시 빌려 걸어두었다.
‘화중유시(畵中有詩)’는 서양화가 최영훈이 1970년, 자기 할아버지 최원순과 가깝게 지낸 의재를 찾아 “첫 개인전을 연다”고 신고하러 왔을 때의 일화를 담고 있다.
종이를 잘라오라 하니, 영훈은 혹시 즉석작품 선물을 하시면 책상 위에 두고 늘 새기려는 생각에 60X20㎝ 정도로 잘라다 대령했는데,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 형상만 닮게 그리지 말고 시 쓰듯 여운을 두라’는 일필휘지를 받았다. 훗날 ‘종이를 아주 크게 잘라드릴 걸 그랬다’고 농반진반했다 한다. 미술 앞에서 눈 보다는 귀가 세게 반응하고 끝내 가슴이 훈훈해진다.
▶표구상집 딸도 살핀 인정= 소록도의 오스트리아 두 천사 이전에 나환자를 돕던 최흥종의 회갑때 장수하길 바라며 선물한 구여도(九如圖), 대한민국 국새1호 제작 장인 정기호에게 선물한 위진사해(威振四海) 독수리 그림, 자기 작품을 표구해주던 완벽당 주인의 딸 결혼식때 선물한 부부화합 기러기 그림 등 숱한 ‘인연’이 함께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의재미술관의 1층의 통유리창은 무등산의 사계를 담은 6폭 병풍 같다. 때마침 불타는 단풍이 드리워져 있다. 문외한도 붓을 들거나, 시를 읊조리고 싶다.
옆 건물 삼애헌은 의재가 운영하던 농업학교였는데, 지금은 그때 개발한 발효차(茶)인 ‘춘설차 문화교실’이 되었다. 허백련, 최흥종, 최원순 등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데 의기투합하면서 쌓은 우정 얘기도 찻잔에 실린다.
▶발효차 무등산 춘설차가 구수한 이유= 차 맛은 여느 발효차에 비해 조금 더 진한 듯 하지만, 청태전 처럼 담백하거나 불회사 처럼 톡 쏘지 않고, 구수하다. “왜 차가 이렇게 구수하냐, 누룽지 탄 것 아니냐”는 장난기 많은 여행자의 복에 겨운 응석에, 다모는 “마음을 띄웠다”며 가볍게 미소 짓는다.
차의 이름이 된 춘설헌은 의재 선생이 30년간 있던 곳이다. 최원순이 최흥종에 기거하라 했지만 최흥종은 얼마있지 않아 움막으로 떠났고, 어찌어찌 의재선생이 작업실로 이용하게 되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육당 최남선, 나치를 고발하던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웃인 증심사 창건연대는 860년이다. 지금의 건물은 17~20세기에 고쳐 지어졌다. 증심사 뒤편 차밭이 춘설차의 생산지이다. 이 절의 보명스님 등 몇몇은 의재 선생으로부터 발효차를 배웠다. 보통 차는 사찰이 개발하고 민간이 따라오는데, 농업학교 운영자라서 그런지 민간인 의재 허백련 선생의 제다법을 사찰 스님이 배웠다.
▶1위 의재미술관, 2위 인천공항= 의재미술관(조성룡-김종규의 공동 설계)은 자연을 방해하지 않고 자연을 더 돋보이게 하는, 꾸미지 않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2001년 인천국제공항 청사를 2위로 밀어내고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의재의 표정은 여느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해 친근감을 준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할아버지 소치 허련, 아버지 미산 허형이 모두 미술 대가들인데, 의재는 법학을 공부하러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운명처럼 끌리듯 그의 멀티 재주는 미술 쪽에 쏠리고, 화가의 길로 바꾼다. 생태학과 자연과학에도 밝은 전인적 지식인이다.
귀국한 뒤 일제강점기 였던 당시 첫 미전 출전에 조선미술상을 거머쥐었으나 일제가 제멋대로 원하는 것을 강요해 그후 출품을 포기한 뒤, 1938년부터 광주에서 후진양성에 몰두했다.
문인화는 남종화라 하는데, 김홍도,신윤복 등과 같은 직업 미술가와 구분지어, 그림에 정신, 사상, 철학을 담는 인문학미술이라 하겠다. 여행을 통해 지혜를 많이 얻어 소설도 쓰고 그림 작품도 많이 남긴 헤르만 헤세(1877~1962)도 굳이 따지면 문인화가라 할 만 하다.
“여행은 헌신적 사랑의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이고, 낯선 것의 본질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는 행위. 박물관의 명화가 아니라 여관 여주인과 부엌에서 나눴던 잡담..” 누군가 ‘무등산 의재미술관에서 헤세가 왜 나와’라고 할지 몰라도, 문득 헤세의 여행잠언 떠오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