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최정호 기자]우리 국민들의 낙태에 대한 인식이 전향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가피한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하고, 또 ‘낙태=살인’ 이라는 인식도 과거 조사 대비 크게 하락했다.
한국갤럽이 29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낙태와 관련 ‘보다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18%에 불과했다. 반면 ‘필요한 경우 허용해야 한다’는 77%로 집계됐다. 모든 응답자 특성별로 ‘필요 시 낙태 허용’ 의견이 우세했고, 특히 20~40대에서는 그 비율이 80%를 넘었다.
낙태 금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자들은 ‘생명 존중, 경시하면 안 됨’(42%), ‘인구 감소 우려, 저출산’(40%), ‘낙태 남발, 무분별, 무책임’(6%), ‘태아도 생명’(5%)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 반면 필요한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원하지 않은 임신일 때’(36%), ‘강간, 성폭행 등 범죄로 임신한 경우’(18%), ‘개인이 결정할 문제, 본인 선택’(13%), ‘미성년, 미혼 등 감당할 수 없는 경우’(11%), ‘낳아서 책임 못 지거나 버리는 것보다 낫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이상 5%), ‘아이 건강, 기형아 출산 문제’(4%) 등을 언급했다.
낙태에 대한 인식도 과거 조사 대비 큰 변화가 있었다. 낙태를 ‘살인’으로 인식하는 지를 묻는 질문에 45%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는 1994년 조사의 78%, 또 2016년 조사의 53%보다 크게 낮아진 수치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 45%는 낙태를 ‘일종의 살인’으로 본 반면, 38%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17%는 의견을 유보했다. 낙태 금지론자 중에서는 82%가 낙태를 살인으로 봤으나, 낙태 허용론자에서는 그 비율이 37%에 그쳤고 ‘살인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46%에 달했다.
한편 낙태를 금지하는 형법 등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관심도 높아졌다. 우리나라에 인공임신중절, 즉 낙태 수술을 금지하는 법이 있다고 아는지 물은 결과 79%가 ‘있다’고 답했으며 13%는 ‘없다’, 9%는 의견을 유보했다. 낙태금지법 인지율은 젊은층에서 상대적으로 높았고(20대 87%; 60대 이상 64%) 성별로는 남성 78%, 여성 79%로 비슷했다.
우리나라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는 낙태한 여성과 낙태하게 한 의사 등을 처벌하는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다. 또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범죄로 인한 임신, 임산부나 태아의 건강에 심각한 위해가 있는 경우 등에만 국한하여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법은 1953년부터 존속했으나, 1994년 한국갤럽 조사에서 성인의 낙태금지법 인지율은 48%, 당시 여성 중 38%가 낙태 경험이 있는 것으로 파악돼 현실에서는 거의 사문화(死文化)된 조항으로 간주되어 왔다.
참고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낙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가임기 여성(15~44세)의 낙태 수술 경험률은 2010년 15.8%에서 2017년 4.8%로 하락했고, 같은 기간 낙태율(가임기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은 15.8건에서 4.8건으로 감소했다.
이번 조사는 한국갤럽이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전화조사원 인터뷰 형식으로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