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의 화두는 단연 ‘전력’이다. 글로벌 인공지능(AI) 트렌드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데, 정작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유럽의 일부 전략망은 설치된 지 40년이 넘을 정도로 노후화 문제가 심각하다. 상황이 이러자 빅테크 기업들은 선박엔진을 발전장치로 활용하는 등 전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우리나라라고 다르지 않다. 정부가 올해 발표한 800조원 규모의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6.3GW(기가와트) 규모의 전력이 필요하다. 이는 대형 원전 5기 이상이 24시간 풀가동돼야 생산할 수 있는 전력량이다. 또 정부의 3대 메가 프로젝트 수요를 반영할 시 2040년 최대 전력 수요 전망치는 158.4GW로 기존 전망치보다 26.6GW 증가했다. 현재 전력 생산 구조에서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이다. 이로 인해 원전과 같은 전력 인프라가 추가로 건설돼야 한다고 업계는 강조하고 있다.
원전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정작 정부는 신중론을 펼치고 있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2026~2040년)에 대형 원전 건설을 포함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공론화 절차에 돌입한 것이다. 이르면 이달 12차 전기본을 마련할 예정이었는데, 공론화 작업 때문에 발표가 늦어지게 됐다. 더 큰 문제는 약 300명 규모의 시민참여단 숙의와 같은 공론화 과정을 통해 원전 건설 배제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한시라도 빨리 AI 에너지 인프라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 시점에서 원전 건설 여부를 논의하는 건 시간낭비일 수밖에 없다. 대규모 전력을 날씨에 상관없이 하루종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고, 화석 연료 대비 탄소 배출이 적은 에너지원은 사실상 원전이 유일해서다. 한때 안전사고를 이유로 원전 도입에 소극적이었던 국가들의 태도가 최근 180도로 바뀐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행정 명령을 통해 미국 원전 설비 용량을 2024년 기준 100GW(기가와트)에서 2050년까지 400GW로 4배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0기가 넘는 원전을 새로 구축하겠다는 의미다. 중국은 2035년까지 신규 원전 150기 건설을 추진 중이다. 지난 8월에는 원자로 8기로 구성된 4개 원전 개발 사업을 승인했다. 스웨덴은 지난해 40여년간 유지해 온 원전 금지법을 폐기, 향후 10년간 최대 10기의 원전을 새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정부는 올해 초 발표한 11차 전기본을 통해 ▷신규 원전 2기 건설 ▷첫 소형모듈원전(SMR) 구축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 27일 고리 원전 3·4호기의 운영 기간을 10년 연장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이처럼 정부도 원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현재의 원전 인프라 구상안으로는 3대 메가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없다. 더욱이 대형 원전 1기를 준공하는 데 10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할 때 원전 건설 작업은 한시라도 빨리 이뤄져야 한다.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이미 형성됐다. 에너지정보문화재단이 지난달 공개한 2분기 에너지 국민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 중 82.9%가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전기본에 포함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규 원전 건설이 필요하다는 답변도 79.2%에 달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초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AI 인프라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미래의 에너지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성장은 물론 운명도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잘 준비해 가야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AI 시대 생존을 위해 원전 도입에 속도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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