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성인 ADHD 진단 받은 이신애 교사
“무난하게 살고 싶었다…드디어 치료” 해방감
따돌림 경험 기억…“우리 교실에선 소외 없어야”
[우리사회 레버넌트] ‘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됩니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나도 이제 이름표가 있다.” 인천 연학초등학교 교사 이신애(33)씨는 3년 전,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당시 느낀 감정은 ‘해방감’. 그간 이씨를 괴롭혔던 가장 큰 짐은 ‘문제의 원인’ 조차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랬던 이씨에게 ‘ADHD 진단’이 내려진 것은 ‘이제는 이것만 해결하면 된다’는 역설적 안도감이었다.
이씨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고, 어디서부터 뭘 정리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할 줄 알았는데, 드디어 해결할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다른 병원에선 우울증 진단만 받아 약을 먹어왔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어 시간만 보낸지 3년이 지나가던 때였다.
이씨는 성인 ADHD를 앓고 있다. 그리고 9년차 교사다. 올해는 5학년 학생 20명의 담임을 맡고 있다. 언뜻 불안정해보이는 상황이지만, 이씨는 오히려 “성인 ADHD와 초등학교 교사는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늘 부주의하고 산만했던 탓에 어린 시절 당했던 따돌림의 기억은 지금 이씨가 자신의 교실에서 소외 당하는 학생이 없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매 시간 수업 내용이 바뀌고, 수업을 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상황에도 주의를 쏟아야 하는 교사 직업의 특성에도 ADHD는 역설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냥, 무난하게 살고 싶다”…‘응원’ 같던 ADHD 진단
“무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이씨는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씨는 “뭐라도 끝까지 해본 적이 잘 없고, 단체 생활에서도 크게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콤플렉스도 있었다”며 “삶을 돌아보면 계속해서 자존감이 깎여나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 행동으로 인한 일상의 차질, 대인 관계의 어려움 등은 실제로 ADHD 환자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이다. 대개 약물 치료만으로 증상이 완화되지만, 이씨와 같이 어린 시절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우울증 등 다른 정신질환으로 오해해 치료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씨 역시 “ADHD라고 하면, 복도에서 질주하거나 선생님과 싸우는 그런 아이들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했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2년 ADHD로 진료를 받은 환자 14만7283명 가운데 성인은 41%에 달했다. 유전적 요인이 강한 ADHD 특성상 어린 시절 증세가 나타남에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뒤늦게 병원을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제발 ADHD였으면 좋겠다.” 친구의 권유로 정식 ADHD 검사를 처음 받게 된 이씨는 결과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ADHD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진단 직전까지 교사 일에 대학원 논문까지 함께 쓰며 모든 일이 밀려 있어 ‘나 진짜 최악인데’, 라는 생각을 항상 해오던 시기였다”던 이씨는 “드디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더욱 컸다”고 했다.
“내 따돌림 경험, 아이들 교실에서 ‘소외’ 없애는 원동력”
진단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교사로서 이씨의 생활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이전보다는 업무 처리가 조금 더 수월해졌고, 미루는 일이 조금 줄었다. 하지만 원칙이 하나 생겼다. 교실에서 ‘소외’ 당하는 학생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 이씨 본인이 겪었던 따돌림 경험 때문이다.
늘 친구들과 쉽사리 어울리기 어려웠던 학창생활이기도 했거니와 이씨에게 유난히 강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로부터 수학여행 전날 갑작스레 소외를 당하기 시작한 것. 해외로 가는 수학여행 비행기와 숙소에서 내내 혼자 안절부절했던 기억은 여전히 이씨에게 상처다. 이씨는 “무조건 모두가 친하게 지내도록 강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들과 조금 다른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소외감을 느끼는 학생은 없었으면 한다”는 게 이씨의 바람이다.
그래서 이씨의 교실엔 독특한 규칙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피구’ 놀이는 금지다. “남을 공격하는 스포츠를 왜 교실에서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씨의 개인적 생각도 있지만, 공을 맞았을 때 인기가 많은 학생은 모두가 위로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에겐 야유하는 분위기를 막기 위해서다. 반에서 자리를 바꿀 땐, 이씨가 한 명씩 직접 학생들을 지목해 차례대로 자리를 지정한다. 이때 ‘리액션’도 금지다. 과도한 감탄사도, 실망도 자제하고 ‘묵묵히’ 자리를 옮겨야 한다.
쉬는 시간 혼자 있어야 하는 학생들을 위해 이씨는 사비를 털어 교실에 만화책 수십 권을 들여놓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혼자일 ‘핑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이씨는 “때로 혼자인 학생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학생들이 무언가에 집중할 수단을 만들어주는 건 교사의 몫”이라고 했다.
“다양한 교사 있어야 다양한 학생들도 존재”
자신을 조금 더 섬세하게 관찰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힘든 시간이 줄어들었을지 모른다는 게 이씨의 아쉬움이다. 이 때문에 이씨는 매년 한둘씩 교실에서 ADHD 증세를 보이는 학생들에게도 꾸준히 진단을 권유해오고 있다. 교실에서 반복된 마찰과 갈등 탓에 교사에게 적대적이던 학생도, “선생님도 ADHD가 있고, 이런 약을 먹고 있어”라며 말을 꺼내면 당황한 모습으로 이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ADHD 증세로 다른 아이들과 마찰을 빚더라도, 이런 아이들이 스스로를 ‘가해자’로 느끼게끔 하는 일은 없으면 한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선생님도 학교 다닐 때 너랑 비슷했는데 약도 먹고, 진단도 받으니까 훨씬 나아졌어. 그런데 그건 네가 신경을 쓰고 노력해야 해.” 이씨는 학생들을 이렇게 설득하곤 한다.
이씨는 자신과 같은 다양한 교사가 있을 때, 학생들도 다양한 개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씨는 “‘사막의 모래는 쓸 데가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며 “모래도 너무 곱고 가늘기보다는 약간 울퉁불퉁해야 쓸모가 있는 것처럼 학생이나 교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