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동남아, ‘나인대시라인’ 영유권 갈등 고조 우려
[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에 당황한 오바마, 엉겁결에 화약고 남중국해 갈등 재점화(?)’
아시아 4개국을 순방 중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 간 영유권 분쟁에 또다시 불을 지폈다.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을 재천명하며 아시아 4개국 순방에 나선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ㆍ핀리핀과 군사 협력 강화에 나서면서 중국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과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뿐 아니라 남중국해 ‘나인 대시 라인’(nine-dash line)을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영유권 분쟁이 격화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크림반도 침공으로 외교적 위기에 몰린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 회귀 정책을 통해 우방을 규합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을 자극하는 또다른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가하고 있다.
▶美ㆍ필리핀 군사협정…미군 동남아 복귀=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4개국 순방에서 중국과 영유권 갈등을 겪고 있는 국가들에 잇달아 힘을 실어주면서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7일(현지시간) 필리핀 GMA방송 등에 따르면 미국과 필리핀 정부는 미군 병력의 필리핀 순환배치를 확대하기로 최근 합의하고, 이 같은 내용의 10년 기한 방위협력증진협정(EDCA)을 28일 공식 체결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양국이 EDCA협정에 서명한 이후인 이날 오후 1시 30분께 수도 마닐라에 도착,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지원 공약을 재확인할 예정이다.
이번 협정이 체결되면 미군은 필리핀 내 군사기지에 순환배치 형태로 병력과 전투기, 함정들을 배치하게 된다. 미군 병력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지난 1992년까지 40여년 간 미국의 동남아시아 군사작전 ‘허브’ 역할을 해온 수비크만 기지 등지에 미군이 재배치되는 방안이 고려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써 미군 세력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전면 귀환하는 데 물꼬를 트게 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적했다.
앞서 미국은 지난 1991년 필리핀 상원에서 군사기지 조차연장안이 부결되자 이듬해 수비크만과 클라크 공군기지 주둔 병력을 모두 철수, 필리핀 독립 이후 45년 간 지속되던 ‘특수관계’를 청산했다.
그러나 지난 2002년부터 대테러훈련을 명목으로 수백명의 병력을 남부 민다나오 일대에 파견해왔으며, 최근 들어선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사공조를 부쩍 강화하고 있다.
▶中ㆍ러시아 패권 저지 포석=오바마 대통령의 이 같은 움직임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일각에선 중국의 지리적 확대와 충돌하고 있는 동맹국들로 짜인 이번 순방길이 ‘중국 봉쇄 투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중국 봉쇄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부상한 중국, 법의 지배를 강력히 주장하는 책임있는 중국의 역할에 관심이 있다”면서 우방과 중국 사이에서의 ‘균형’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중국이 이를 악용한 패권 추구에 나서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발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순방에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대러 제재 조치 강화로 러시아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줄 것이라는 말을 거듭했다. 이를 통해 중국에 러시아의 모험ㆍ침략주의를 따라하지 못하도록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 전문가의 진단이다.
제프리 베이더 전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이 같은 발언에 대해 “푸틴이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한 행동에 고무돼서는 안 된다. 그런 모델은 절대 중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해석했다.
▶불붙는 나인대시라인 영토분쟁=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의 해군력이야말로 이번 순방의 최대 현안”이라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순방으로 남중국해 ‘나인 대시 라인’(nine-dash line)을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영유권 분쟁이 격화됐다고 분석했다.
나인 대시 라인은 중국이 남중국해 대부분을 자국의 영해라고 시사한 남해구단선(南海九段線)을 가리킨다.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그은 9개의 직선으로, 베트남ㆍ대만ㆍ브루나이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ㆍ베트남명 쯔엉사군도), 파라셀 제도(중국명 시사군도ㆍ베트남명 호앙사군도)와 필리핀과 갈등 중인 스카보러 섬(중국명 황옌다오), 팡가니방 산호초(미스치프 산호초) 등이 포함된다.
1953년 중국 정부가 공식 지도를 반포하면서 첫 등장한 9단선은 지난 2012년 중국의 새 전자여권 속 중국 전도에 그려지면서 남중국해 도서 영유권 분쟁을 촉발시켰다. 특히 남해구단선 영해 아래 막대한 자원이 매장돼있는 것으로 알려져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그 중 필리핀과는 지난해 중국 정부가 스카보러 섬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 실효 지배를 시도하면서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필리핀의 한 당국자는 FT에 중국의 무장 해안경비선이 눈에 띄게 순찰을 강화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냉전이 시작됐다”고 상황을 전했다.
한편 오바마 대통령은 27일 말레이시아에서 모든 해양 분쟁 당사국들이 국제중재와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을 비롯한 보편타당한 국제법 등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필리핀에 대한 지지 입장을 재확인했다.
앞서 일본에서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일 갈등지역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가 미ㆍ일 안보조약에 적용된다고 밝힌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순방으로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 중인 아시아 국가들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역내 미국의 영향력 제고를 반대해온 중국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고 평가했다.
<용어설명>
☞나인 대시 라인ㆍ남해구단선(南海九段線) =중국이 남중국해에 그린 9개의 직선으로 남중국해 80% 가량이 중국의 영해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 따라 그리면 알파벳 U자 모양으로 생겨 ‘U형선’ 불린다.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ㆍ베트남명 쯔엉사군도), 파라셀 제도(중국명 시사군도ㆍ베트남명 호앙사군도), 스카보러 섬(중국명 황옌다오), 팡가니방 산호초(미스치프 산호초) 등이 들어간다.
국민당 정부 시절인 1947년 9단선의 원형인 11단선을 담은 지도를 제작ㆍ출판하며 남해구단선의 존재를 공식화했으며, 1949년 수립된 현재의 중국 정부가 1953년 반포한 새 지도에서 11단선을 9단선으로 수정하는 방식으로 이를 계승했다. 2012년 중국이 새로 제작한 전자여권 속 중국 전도에도 남해구단선이 표시돼 남중국해 도서 영유권 분쟁을 촉발시켰다.
다만, 중국 정부는 남해구단선이 ‘영해 기선’으로서 그 내부를 모두 중국 영해라고 규정한 것인지에 대해선 그 의도를 명확히 설명한 적은 아직까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