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극 ‘민중의 적(An Enemy of the People)’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러닝타임 2시간 30분. 인터미션은 없었다. 2시간 가량 흘렀을까. 막이 내리기도 전에 공연장이 환하게 밝혀졌다.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관객들은 연극의 주인공이 돼 하나 둘 ‘발언’하기 시작했다. 무대는 곧 토론의 광장이 됐다.
독일 실험연극이 한국서도 통했다. 지난 26~28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독일 극단 ‘샤우뷔네베를린’의 ‘민중의 적’은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선 독일어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끈끈하게 소통했다. 연출의 힘, 그리고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메시지의 힘이다.
‘민중의 적’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882년 쓴 동명 고전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매만진 작품이다. 2012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 후 세계 유수의 공연장과 페스티벌에 초청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온천으로 번성하기 시작한 독일 마을이 공장 폐수로 오염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부(富)와 진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다뤘다.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ㆍ48)는 고전 텍스트의 정수를 파고 들면서도 고전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격 연출로 “올드 유럽이 선택한 후계자”, “유럽 연극의 미래는 그의 손에 달렸다”는 극찬을 받아 온 유럽 연극계 스타 연출가다.
지난 2005년 ‘인형의 집-노라’, 2010년 ‘햄릿’에 이어 올해 ‘민중의 적’으로 세번째 내한공연을 갖은 오스터마이어는 공연 전부터 일찌기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한국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휴식없이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관객 몰입도는 높았다. 암전 한번 없이 막이 전환될 때마다 출연 배우들이 스태프가 돼 무대 세트를 옮기는 장면은 낯설지만 신선했다.
특히 이 연극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주인공 스토크만 박사의 시의회 연설 장면이 압권이었다. 마치 베를린 도심 뒷골목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것처럼, 배우들이 직접 무대 벽면을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 회화적인 미장센을 연출했다.
“사망 진단을 받은 문명” “경제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경제 자체가 위기”, “진실의 최대 적은 대중”, “절제와 내핍만이 해결책”이라는 주인공의 ‘도발’적인 연설이 끝나자 발언권은 객석으로 넘어 왔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던 한국 관객들은 이내 하나 둘 마이크를 넘겨 받았다. 최근의 옥시 사태, 4대강 문제 등에 대한 난상토론이 벌어지는가 하면, 다수와 소수,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한 철학적인 토론도 이어졌다.
‘흠’을 꼽자면 한국어 자막이다. 배우들의 독일어 대사를 무대 뒤 벽면에 배치된 스크린의 한국어 자막으로 보여줬는데, 서너 군데 오자가 눈에 거슬리는가 하면, 배우들의 대사와 한국어 자막 싱크(syncㆍ음향 동기화)가 맞지 않아 다소 답답함을 유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