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원호연 기자]북한의 전격적인 제의로 남북 고위급 접촉이 7년 만에 이뤄지면서 남북관계가 본격 화해 무드로 들어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고위급 접촉이 남북 정상회담 등 향후 남북관계 정상화로 가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은 지난 8일 북한이 서해 군통신선을 통해 “남북관계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하면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2007년 12월 개성에서 열린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추진위 회의 이후 7년 만에 남북 고위급 인사가 만나는 자리다. 그만큼 이번 접촉의 성과에 대해 거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초기 경색된 남북관계를 한번에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분위기다.

북한이 급작스럽게 고위급 대화를 제안해온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약속한 경제개발에 몰입하기 위해 경색된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해보겠다는 ‘회심의 한수’다. 헌법에 ‘핵무기ㆍ경제발전 병진노선’을 천명한 만큼 남북관계를 시작으로 대외 관계가 개선돼야 가용자원을 경제 개발에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인사를 직접 지목해 대화를 제안한 것도 우리 정부가 김정은 제 1위원장의 ‘중대제안’을 거듭 거부하는 상황에서 실무급 대화를 건너뛰고 박 대통령의 결심을 끌어낼 수 있는 ‘복심’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단 당국 간 대화가 물꼬를 튼 만큼 대화 진척 상황에 따라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이 특사 교환이나 지난해 6월 무산된 남북 당국회담의 재개 또는 총리회담 개최 등을 제안하고 남북관계 발전의 로드맵에 대해 논의하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과거 남북 정상회담 준비과정에 참여했던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수석대표로 나서는 것을 들어 남북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을 닦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 정부 또한 북한이 “미국 핵무기 아래서 어찌 혈육의 정을 나누나”며 한ㆍ미 연합군사훈련을 이유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무산시킬 가능성을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제안을 수용하며 이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북한에 “진정성 있는 행동을 먼저 보이라”며 거부해온 ‘원칙론’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특히 수석대표의 ‘격(格)’을 놓고 대립하다 결국 무산된 지난 남북 당국회담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통일부가 아닌 청와대 측 인사를 요구한 북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남북관계 상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관계부처 협의를 거쳤다”면서도 “흔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말해 대북 강경 기조에 미묘한 변화가 있음을 시사했다.

정부가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장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앞두고 있는 데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에 북한이 호응해 나온 마당에 남북관계에 있어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남북 대화채널을 통해 회담이 열렸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고위급 접촉인 만큼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각자의 의사를 전달하고 대화채널을 만든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며 지속적인 대화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다만 이번 접촉만으로 한번에 박대통령과 김 제1위원장이 만나는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단 정부는 이번 대화를 ‘회담’이 아닌 ‘접촉’으로 규정하며 애써 그 무게감을 축소하려는 모습이다. 1992년 남북 고위급회담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북한의 선제적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의식한 ‘자존심 세우기’에 가깝다.

이번 접촉에서 다뤄지는 의제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초반 접촉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야 이후 대화 분위기를 이끌어 갈 동력이 생기지만, 논의 이슈를 좁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양측이 자기 주장만 펼치다 끝나는 기존 패턴을 반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특히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지와 우리 언론의 비판적 기사를 또다시 걸고 넘어질 경우 대화는 공전을 거듭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이번 접촉이 전면적인 남북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정례화부터 시작해서 경협과 비핵화 등 큰 이슈로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대화가 난관에 봉착하면 장관급, 총리급, 나아가 정상회담으로 급을 올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