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1위인 대만 TSMC의 모리스 창 창업자가 직원 연례 체육대회에서 “반도체 자유무역의 시대가 끝났다”며 “TSMC가 올해 최고 실적을 기록했지만,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올 3분기에 시장 예상치를 훌쩍 웃도는 깜짝 실적(영업이익 58.2% 급증)에 고무돼 있을 법한데도 오히려 무역 환경 변화에 따른 위기감을 강조한 것이다.

TSMC는 엔비디아와 함께 미·중 기술패권 전쟁과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급변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최대 승자로 꼽힌다. 미국 뉴욕 증시에서 엔비디아에 이어 시총 1조달러를 돌파한 두 번째 반도체 기업이 됐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고 데이터센터 핵심 부품인 AI 가속기의 99%를 위탁 생산한다. 모리스 창은 그럼에도 미·중 대립의 첨예화로 글로벌 반도체 분업 체계가 무너지면서 반도체 기업의 성장이 험로에 놓였다고 경고한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기술패권을 견제하려 대중제재에 돌입하기 전인 2020년 세계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설계-한국·대만의 생산-중국의 소비’로 이어지는 분업 체계가 작동했다. 하지만 미국이 동맹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선 이후 주요 반도체 기업이 거대시장인 중국을 잃으며 타격을 받고 있다. TSMC의 매출 가운데 약 20%가 중국 시장에서 나왔는데 지금은 10%로 반토막났다. 네덜란드의 반도체장비 업체 ASML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내년 중국 매출 비율을 20%로 예상했는데 직전 분기 49%에 달한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설상가상 중국 메모리 제조사 CXMT가 D램 생산량을 무섭게 늘리고 있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CXMT의 웨이퍼 월 생산량은 연말 20만장, 내년 30만장에 도달해 전체 D램 시장의 15%를 차지할 전망이다. 3위인 마이크론(약 20%)의 턱밑까지 추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3분기 수출이 전 분기보다 0.4% 감소하면서 경제성장률이 0.1%에 그치는 쇼크를 겪었는데 대중 반도체 수출 비중이 줄어든 것이 한몫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1~9월 중국이 한국 메모리 수출에서 처지하는 비중은 37.9%로 12년만에 40%선이 무너졌다. 중국은 AI 가속기 자체 설계·제작에도 나서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제재에 맞서 자립을 추구하면서 한국 반도체도 큰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자유무역주의 퇴조, 블록화 득세’라는 무역환경 변화에 대응하려면 결국 기술로 이기는 수 밖에 없다. TSMC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보호무역 파고를 넘어서겠다고 밝혔는데 우리 반도체 기업의 다짐은 이보다 더 결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