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디지털 화재와 정태영의 AI 승부수…금융의 미래 찾다

미국의 경제학자 바라트 아난드는 저서 ‘콘텐츠의 미래’에서 디지털 화재에 살아남기 위해선 콘텐츠의 함정에서 벗어날 것을 조언한다. “최고의 콘텐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귀신에 홀리지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디지털 화재는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금융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인공지능(AI), 챗GPT, 마이데이터, 디지털 창구, 플랫폼, 간편결제 등등 디지털 화재의 흔적은 금융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금융사들이 디지털 전환(DX, Digital Transformation)을 서두른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도 미래 생존의 길이 디지털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국내 금융사들의 DX는 뜬 구름 잡는 말처럼 들리곤 한다. 전사적으로 DX를 핵심 경영과제로 삼고 디지털에 역량을 쏟고 있지만 대부분이 앱(App)이나 마이데이터 등 대고객 서비스 고도화에 그치고 있다. 아난드가 저격한 최고의 콘텐츠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디지털 화재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수료 싸움에 피멍이 들고 있고, 이자장사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도 국내 금융의 현실이다. 해외로 사업을 다각화한다고 하지만, 서로 뺏고 빼앗는 ‘제로섬 게임’은 무대만 좁은 국내에서 해외로 넓혔을 뿐이다.

최근 독자 개발한 AI 소프트웨어(SW) ‘유니버스’를 일본 대형 신용카드사에 판매한 현대카드의 행보가 눈에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데이터 사이언스 기반 고객 초개인화 AI 플랫폼 유니버스는 개인의 행동·성향·상태 등을 예측해 고객을 직접 타깃팅(Targeting)할 수 있는 SW로 금융 뿐 아니라 업무 고도화, 제휴 사업 확장 등 모든 사업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2015년 ‘디지털 현대카드’를 선언하고, ‘테크기업’으로 업의 전환을 꾀했다. 현대카드는 이를 위해 AI에만 1조원을 투입했다. 대부분의 신용카드 기업들이 ‘금맥’으로 찾은 데이터에 있어서도 데이터의 양을 늘리기 보다 데이터를 어떻게 인프라화할 것인가에 집중했다. 지급결제라는 신용카드의 콘텐츠에서 벗어나 사업을 데이터 인프라로 확장한 셈이다.

정 부회장의 승부수는 국내 단일 SW 최대 규모의 수출 기록을 새로 썼다. 유니버스의 수출 계약 규모는 수백억원대로 알려졌다. 이번에 현대카드의 유니버스를 수입하기로 한 일본 3대 신용카드사 스미토모미쓰이카드(SMCC)에 이어 SMCC가 속한 스미토모미쓰이파이낸셜그룹 산하 다른 계열사와 해외 유수의 금융사들도 유니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AI 소프트웨어 수출 확장 가능성이 그만큼 열려져 있다는 얘기다.

정 부회장의 승부수는 지급결제 등 신용카드라는 콘텐츠의 함정에서 벗어남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현대카드는 이번 AI 소프트웨어 수출로 전통적인 금융사에서 테크 기업으로의 변환을 통해 디지털 비즈니스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굴했다. 게다가 국내 금융사로는 처음으로 자체 기술로 개발한 AI 소프트웨어 수출이라는 독자적인 포지셔닝을 통해 해외 진출 방법에 있어서도 혁신을 일궈냈다.

아난드는 “연결 관계를 창출하라. 지키기 위해 확장시켜라. 남들을 따라 하지 않을 용기를 가져라”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간단한 아이디어인가. 그러나 대부분이 정반대로 행동하며 콘텐츠 함정에 빠지곤 한다. 디지털 화재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국내 금융사들이 새겨 들어야할 대목이다.

헤럴드경제 정책부장 겸 금융부장 한석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