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전남 해남군 대흥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월에 접어들었다. 남녘의 들판은 누렇게 물들었지만 폭염 뒤 이어진 폭우가 지나간 자리에 농부들의 아픔은 고스란히 남았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시대 대표적 고승이자, 국난을 구제한 우리 역사 속 위인인 서산 대사가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에게 부탁하며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의발(가사와 공양그릇)은 반드시 해남으로 보내라. 그 고을의 두륜산에 대둔사(대흥사)가 있는데, 남쪽에는 (해남)달마산이, 북쪽에는 (영암)월출산이 보이고 동쪽에는 (장흥)천관산이 있으며 서쪽으론 (해남)선은산이 있어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곳이다.”
서산대사 사후 유언에 따라 의발이 왔던 대흥사는 동서남북에 네 개의 산이 지키고 있다고 해 사천왕상을 별도로 두지 않은 특이한 절이 됐다. 대흥사에선 서산 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교적 국가제향과 불교식 법요식을 함께 진행하는 제사를 봄, 가을에 지내고 있으며, 추계제향이 11월 2~3일에 열린다.
바위로 이뤄진 노순봉, 가련봉, 두륜봉이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을 보인다는 두륜산 정상 자락을 등지고 거대한 건물 한 채가 내달 2일을 기다리며 새롭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잡풀이 무성해진 표충사를 대신하려는 듯 한국 사찰 최대 규모라는 ‘호국대전’을 6년여에 걸쳐 새롭게 건립해 완공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알려진 의승병 뿐만 아니라 법명조차 확인이 어려운 수천 명에 달하는 망명의승(亡名義僧)들의 혼을 위로하고 업적을 추모하는 확장된 의미의 표충사 공간이다. 서산 대사와 차의 달인 초의선사의 얼이 깃든 차와 충의 우리나라 대표 사찰 해남 대흥사로 가을맞이 산행을 떠난다.
세계문화 유산 해남 땅끝 대흥사
우리나라 땅 끝이 있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703m)에 위치한 대흥사는 조계종 22교구 본사이며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다. 현재 주로 전라남도 서·남해지역 말사를 관리하고 있다. 창건 연대는 여러 견해가 있어 시점을 정확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흥사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늦어도 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임에는 확실하다.
대흥사에서는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고,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중건했다는 기록을 따른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와 함께 등재됐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절터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어 있다. 다른 절에서 보이는 가람배치 형식과는 다르게 자유롭게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북원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산신각 등으로 구성돼 있다.
남원은 천불전을 중심에 많은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고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하나의 뿌리에서 두 나무가 나온 ‘사랑 나무’라 불리우는 500여년 이상된 느티나무 ‘연리근’과 종무소, 카페등 편익시설도 이곳에 있다. 남원 뒤쪽에는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表忠祠) 구역과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중건한 대광명전(大光明殿), 동국선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1665년에 중창한 단조로운 다폿집이며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 역사를 말해주듯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3층석탑(보물)이 있다. 불국사 석가탑을 보듯 규모가 작지만 단정하고, 조각 수법이 세련되고 정교해 신라 하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불전은 1811년에 불탄 것을 1813년 중건한 것인데 경주 옥돌로 6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천불상이 유명하다.
이곳 천불전 입구 출입문 가허루(駕虛樓)는 휘어진 자연목 문턱이 소 멍에(駕)같다고 해 이름 붙여진 듯 하며, 경주옥돌 천불과 관련해서 특별한 설화(기록)가 있다.
천불전과 천불이 1811년 화재로 불에 타자, 불에 타지 않는 옥석으로 천불을 다시 제작하고자 옥석의 산지 경주에서 40여명의 스님들이 공을 들여 천불을 제작했다. 완성된 불상을 큰 배에 768개, 작은 배에 232개를 싣고 울산에서 출발했는데, 작은 배는 해남에 도착했으나 큰 배는 풍랑을 만나 일본 나가사키로 가버렸다. 일본에서는 불상이 바다를 통해 온 것을 상서롭게 여겨 768불을 모시는 절을 짓고자 했다.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 동쪽 300m쯤에는 일반인 출입 제한표시가 있는 선원에 해당되는 구역 안에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대광명전과 동국선원이 있다. 조선 후기 초의선사가 유배 중인 추사 김정희의 방면을 기도하기 위해 대광명전을 건립하고 직접 단청했다.
대광명전 뒤편에는 동국 최고의 선원이라는 의미를 담은 ‘동국선원’이 있는데 추사 김정희가 대광명전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 현판을 썼다고 한다.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는 도반같은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26세 청년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시험 준비를 해 결실을 맺은 곳이 동국선원 7번방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역대 고승들의 부도·비석을 봉안한 비전(碑殿)이 있는데, 이 비전에는 보물인 서산대사(청허당) 탑비와 초의선사 부도를 비롯해 대흥사 대종사 13명과 대강사 13명의 부도 및 비가 있다.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돼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준다.
북미륵암 마애불좌상 과 초의선사 일지암
대흥사에 있는 문화재 중 유일한 국보가 북미륵암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 마애불좌상이다. 노승봉(685m)과 가련봉(703m) 아래 깊은 산중에 있는 북미륵암을 가려면 대흥사 대웅전에서 1.6㎞를, (가까이 갈 수 있는 찻길을 요령껏 찾아 들어가도) 600여m 넘는 산길은 무조건 걸어야만 도달할 수 있다.
북미륵암은 산행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흔들바위와 가련봉 올라가는 등산객들이 종종 보이지만, 산행객들이 잠시 머물며 물 한잔 마실 수 있는 약수터가 보이지 않아 아쉽다.
화강암에 선각으로 표현된 높이 420cm의 대형 마애불상은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용화전’이라는 목조 건물 안에 봉안돼 있다. 조각 수법을 보아 고려 시대인 11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큰 불상들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용화전 뒤편에는 보물로 지정된 북미륵암 3층석탑도 있다. 산아래 웅진전 앞 3층석탑과 함께 비숫한 모양의 신라시대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마애불과 함께 11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두륜산 정상 가련봉 바로 아래에 고려시대 것이라고 하는 5층석탑 하나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덩그러니 놓여있다. 역사적 기록에도 남아있는 ‘해를 당기는 암자’라는 만일암(挽日庵) 사지 터이며 발굴조사 작업이 한창이다. 북미륵암과는 600여m거리, 일지암과도 1㎞ 내에 있다.
만일암터 바로 아래 전라남도에서 2018년 ‘정도천년’을 상징하는 ‘천년수’라 이름 붙인 1200~1500년 된 느티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오랜 세월 두륜산을 지켜온 이 느티나무를 ‘전라도’라는 이름이 우리 역사에 등장한지 천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도민의 뜻을 모아 ‘천년나무’로 지정한다”라는 표지판이 놓여있다.
아직은 사람의 접근을 막지 않아 밑동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천년의 기운을 받아본다.
천년수와 남미륵암, 북미륵암의 설화를 함께 간직한 만일암 사지터 5층석탑이 외로워 보인다.
남양주 수종사, 강진 백련사, 무안 초의선사 생가터 등 초의선사 행적을 만날 때면 언젠가는 ‘차(茶)문화의 성지’라는 대흥사 일지암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품어왔다.
‘차의 성인(茶聖)’이라 불리며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였던 초의 선사(1786~1866)가 세운 암자이며 말년 40여년을 머문 곳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등과 교류했고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을 가르쳤고 ‘동다송’ 등 차에 관한 저서를 저술했다. 차와 선은 하나라는 선다일여(禪茶一如)를 실행했다.
일지암(一枝庵)의 이름은 “뱁새는 언제나 한마음이기 때문에 나무끝 한가지 일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라는 한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초당(草堂)인 일지암 옆에는 초의선사의 살림채로 연못에 네 개의 돌기둥을 쌓아 만든 누각마루 건물인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가 있다
일지암은 대흥사 표충사를 지나 산길로 1㎞ 정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초의선사 입적 후 화재로 폐허가 돼 방치된 것을 차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1979년에 복원했다. 현재도 대흥사에선 매년 초의선사 문화제를 통해 다례를 전파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일지암에 중년 여인 네댓 명이 힘들게 걸어 올라오는 걸 보니 아마도 차(茶)와 연관된 분들이지 않을까 지레 짐작해 본다.
서산대사와 표충사
의병활동을 했던 승려 등을 의승군(義僧軍)이라 칭하는데 우리나라에 의승군과 관련해 국가에서 명명하고 임금이 편액을 내린 유교 형식의 사당이 세 곳 있다. 서산대사(청허 휴정,1520~1604년) 유골이 안치된 북한 묘향산 보현사내 수충사(酬忠祠)와 서산대사 의발이 안치된 해남 대흥사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유정, 1544~1610년)의 사당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표충사(表忠寺) 안에 있는 표충사(表忠祠)도 있다.
조선 왕조 최악의 불교 탄압기를 거친 직후에 일어난 임진왜란 시기이다 보니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 스님의 의승군 활동의 혁혁한 공적에 비해 정당한 평가와 예우를 받지 못했다. 전쟁 후 한참이나 지난 1715년에 밀양에 표충사가, 서산대사 입적 후 180년이 지난 1788년에 정조가 친필 편액을 내려 대흥사 표충사가 건립된 것이다.
서산대사는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존호를 받을 정도로 침체에 빠진 조선 불교를 중흥시킨 대표적 고승이며,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국가를 구제한 역사 속 위인이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선교양종(禪敎兩宗, 선종·교종의 결합)의 맥을 이어 받아 조선 후기 불교를 정통으로 계승한 13대의 대종사(大宗師)와 13대의 대강사(大講師) 등 학덕과 수행이 높은 선승과 뛰어난 교학승을 배출한 자부심을 갖게 됐다.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선교양종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춘 한국 불교의 산실도량이 된 것이다.
대흥사 표충사는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대사, 뇌묵당 처영(處英, 승병장·서산대사의 제자)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봄·가을에 있는 제사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처리하는 2층 누각 의중당이 있고, 의중당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과 유물 24종을 보관하고 있는 보장각이 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뇌묵당 등 의승장(義僧將)을 기리는 ‘표충사’를 넘어, 법명이라도 확인된 승병들, 그리고 이름조차 없이 사라져간 수천 명의 승병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호국대전’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흥사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 불교의 전통인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있어, 매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이곳에서 서산대제 및 나라사랑을 위한 각종 행사를 진행한다.
서산대사가 대흥사를 일컬어 ‘삼재가 들어오지 않고 만세토록 파괴되지 않는 곳’이라고 해서인지 6·25 전쟁 당시 해남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 교통은 조금 불편하지만 땅 끝 남도의 문화가 살아있어 대흥사는 주변의 두륜산, 미황사, 땅끝 마을 등과 연계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서산대제 국가제향 복원과 ‘호국 의승군의 날’ 지정 등을 추진하고 있는 두륜산 대흥사는 지금은 활짝 핀 상사화가 맞아 주고 있다. 기이한 꽃들이 철 따라 피어나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