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편 124. 마녀사냥]
희생양 필요로 한 잔혹했던 사회
고문·협박 마녀로 몰아 처형계속
이해 관계 얽혀 사업화 조짐까지
유럽서 학살…전역으로 번졌다
美세일럼서 18명 이상 교수형行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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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의 발작 이유
"두 소녀가 앓는 병은…."
아직은 미국 동부가 영국 손에 있던 1692년 2월, 매사추세츠 세일럼 마을의 한 가정집. 의사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만, 그는 말을 이어가려다 말고 잠깐 멈춰야 했다. 소녀들의 침실에서 비명이 또 들려온 탓이었다.
올해로 열한 살인 아비게일 윌리엄스, 그녀보다 두 살 밑인 베티 패리스는 얼마 전부터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정확히는 기괴한 짓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수시로 괴성을 질렀다. 화를 참을 수 없는 듯 물건을 던지는가 하면, 때때로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양 구석에 박혀 훌쩍였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다가도 목과 어깨를 특이하게 비틀었다. 아예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그럴 때면 십중팔구 가구 밑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떨고 있었다. "저를 꼬집지 마세요! 저를 찌르지 마세요!" "아가. 아무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저를 자꾸 괴롭혀요!" 윌리엄스든, 패리스든 자꾸 이런 식의 말만 하니 대화도 힘들었다. 패리스의 아버지는 세일럼 마을의 담임 목사였다. 아버지는 패리스 앞에서 성경 구절을 읊어봤다. 딸은 그 소리가 거북한 듯 귀를 막았다. 그는 아예 패리스 앞에서 기도회도 열어봤다. 패리스는 고개를 흔들며 발작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는 이제 최악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귀신병입니다. 그러니까, 두 아이는 악마 손에 떨어진 듯합니다."
"그렇죠?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지요?" 아버지는 의사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떨궜다. 요즘 의학자들은 당시 두 소녀의 병을 맥각 중독으로 추정한다. 곰팡이 핀 호밀빵에 묻어있는 맥각균이 경련, 발작, 환각 등 이상을 일으켰으리라는 추측이다. 이밖에 일종의 뇌염(腦炎) 증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애석하게도 이런 지식을 가진 이가 없었다. "초자연적 힘, 즉 마법이 병의 원인이지요." 의사라는 이가 이렇게 쐐기를 박을 뿐이었다. 침실에선 비명 직후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이어졌다. 발작이 또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마법을 부렸는가.
앞으로는 이 부분에 집중해야 했다. 순진한 소녀 둘을 악마에게 팔아넘긴 '마녀'를 찾아 응징해야 했다. "누가 너희에게 저주를 걸었니?" "발작 중 유령을 보기는 했어요." "알아볼 수 있었니?" "티투바…."
혼미한 소녀들이 지목한 티투바는 서인도제도 출신 여성이었다.
담임 목사, 즉 패리스 아버지가 사는 집의 하녀였다. 둘 다 긴 시간 환각에 취해있던 만큼, 당시 환영처럼 보였던 이 중 적당한 이름을 댔을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 더 보였니?" "길에서 구걸하던 분, 또…. 매일 혼자 다니시는 할머니의 유령도 봤어요." 사실상 걸인과 다름없던 여인 사라 굿, 교회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던 노파 사라 오스본을 가리킨 것이었다.
세일럼 사람들은 이 작은 땅에 마녀가 셋이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우르르 몰려가 이들을 붙잡았다. 가장 먼저 한 건, 용의선상에 오른 이 여인들의 옷을 강제로 벗기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사지를 묶은 뒤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른바 악마의 표식을 찾는 과정이었다. 톰킨스 해리슨 매티슨의 그림 〈마녀 검사〉가 딱 그런 순간을 담고 있다. 방에 들이닥친 사람들이 다짜고짜 한 여성의 웃옷을 내린다. 검은 두건의 노인이 앞, 빨간 두건을 쓴 노파가 뒷모습을 '검사'한다. 노파는 근엄하게 앉은 심문관을 본다. 손으로는 여성 등에 있는 검은 부스럼을 가리킨다. "이게 바로 악마에게 몸을 판 흔적이지요." 곧 이렇게 말할 듯하다. 저 아이가 그럴 줄 몰랐다는 양, 그게 아니면 이 따위 막무가내 절차가 어디 있느냐는 양 맨 앞 두 사람은 졸도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티투바, 사라 굿과 사라 오스본을 마녀로 몰았다. 윌리엄스와 패리스가 이상 증상을 보인 후 1개월여가 흐른 시점인 같은 해 3월. 파견 나온 심문관은 세 여인을 감옥에 가뒀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마녀재판의 막이 올랐다.
‘마녀’의 역사
그렇다면 마녀란 정확히 어떤 자를 뜻하는가. 허무맹랑한 이 존재를 그때는 진지하게 믿은 이유가 무엇일까.
마녀의 역사는 길다. 마녀는 고대 인도와 이집트, 옛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그 시절 고아 혹은 과부 여성 중 일부는 세상 눈총을 피해 숲에서 은둔했다. 이들은 혼자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약초와 점성술을 익혔다. 그러다 보니 점차 마법을 쓸 수 있다, 신비의 약을 만들 수 있다는 식의 소문이 따라붙었다. 이들이 마녀의 시초다.
다만, 당시에는 마녀라고 해 무조건 탄압 대상으로 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게 남다르게 사는 존재를 칭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랬던 마녀의 개념은 16세기 전후 유럽 땅에서부터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속과 신비주의에 능한 건 물론 악마와 대화하고, 교제하고, 심지어 관계까지 맺는 존재라는 인식이 덧씌워졌다. 그간에는 가까이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이들일 뿐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자체가 위험하기에 당장 때려잡아야 할 대상이 돼버렸다. 그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1000년가량 절대성을 인정받던 가톨릭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생사람을 이단으로 몰던 시대였다. 때마침 이 무렵 기후 변화가 커 농업 생산량도 들쭉날쭉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온 세상이 만만한 제물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홀몸, 은둔, 기묘한 생활…. 당최 무엇을 하는지 수상하고, 억울하다 한들 이를 변호해 줄 핏줄 없는 마녀는 희생양으로 삼기 딱 좋은 존재였다. 무작정 이단죄를 씌워 '실적'으로 만들기에 만만한 상대이자 "요술을 부려 농작물을 다 죽였다"는 식의 책임을 씌우기에 좋은 대상이었다. 그렇게 마녀는 한스 발둥의 그림, 〈두 마녀〉와 같은 인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체의 두 사람은 언뜻 봐도 무섭게 느껴진다. 신비주의를 넘어 공포의 분위기를 내뿜는다. 왼쪽 여인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요부 같은 모습이다. 오른쪽 여인은 한 손에 용처럼 생긴 괴물을 자랑하듯 내보인다. 그녀는 타락한 에로스(큐피드)를 곁에 둔 채 기괴한 표정의 짐승을 깔아뭉개고 있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주황색 연기는, 언덕 밑 냄비에서 끓고 있을 마법의 약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불의 길, 물의 길…참혹했던 고문
그때부터 가톨릭계와 개신교계 모두 은둔 여인을 쥐잡듯 잡기 시작했다.
그런 뒤 다짜고짜 '가혹한 시련(ordeal)'으로 칭한 시험에 들게끔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바늘 검사였다. 이들은 마녀라면 몸에 흔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악마가 직접 새겨준 그곳만큼은 무슨 짓을 해도 피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람들은 먼저 매티슨의 그림 〈마녀 검사〉처럼 의심 가는 여인의 옷을 벗겼다.
점이든, 멍이 든, 부스럼이든 눈에 띄는 곳을 모조리 짚었다. 거기에 다짜고짜 바늘을 찔러넣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당연히 피가 나오지 않겠는가. 문제는 당시 가톨릭계와 기독교계 모두 경쟁적으로 이단 찾기에 나섰다는 데 있었다. 양측 입장에선 한 명이라도 더 잡아넣어야 권위와 성과를 모두 챙길 수 있었다.
이러한 마음에서 이들은 가짜 바늘을 들곤 했다.
바늘 끝을 뭉툭하게 하고, 찌르는 척 찌르지 않는 속임수도 썼다. 즉, 바늘 시험은 애초에 하나 마나였다. 그다음 일부 심문관이 행하던 건 이른바 '불의 길'과 '물의 길' 시험이었다. 달군 쇠판을 걷게 하거나, 묶어둔 채 불을 붙이는 게 불의 길이었다. 바다나 강에 숨도 못 쉬게 밀어 넣는 게 물의 길이었다. 악마가 돕거나 마법을 쓴다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긴 작품이 남아있다. 작자미상의 이 〈불타는 마녀와 속박된 마녀〉를 보면, 기둥에 묶여있는 왼편 여인들은 불고문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오른편 네 여인은 목과 두 손 모두 속박당한 채 순서를 기다리는 듯하다. 이들은 일찌감치 삶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무렵, 때마침 두 광신도가 쓴 책 《마녀의 망치》가 주목을 받았다. 이 책에는 마녀를 찾는 법부터 심문하고, 고문하는 방식까지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지금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만 담겨 있지만, 당시로는 훌륭한 지침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불과 물의 길 말고도 사지 묶기, 높은 곳에 매달기, 가시투성이 의자에 앉히기….
"그래요. 나는 마녀가 맞아요! 당신들 말처럼 아기를 잡아먹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고…. 또 뭐라고 했지요? 날씨를 조종하고, 농사를 망치게 하는 마법의 약도 만들 수 있어요. 이제라도 회개하겠으니 제발 살려주세요!"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왔던 여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지목하는 족족 마녀였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화형 내지 교수형 행이었다. 희생자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지만, 남성 또한 악마의 제자 또는 숨겨둔 자식으로 몰려 꽤 많이 죽었다. 광기의 시대였다. 가톨릭계와 기독교계의 '사냥' 성공률은 아주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심문관이 "빨리 지어내서라도 자백하고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설득할 정도였다.
마녀사냥, ‘마녀사업’이 되다?
원래 욕망이란 눈치도 없이, 피도 눈물도 없이 여기저기 끼어드는 법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곳조차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사냥은 점차 사업의 형태로 여물고 말았다.
마녀사냥이 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더는 미심쩍은 숲속 여인만을 검증대에 세우지 않았다.
마녀 판정 순간 그 사람의 모든 걸 빼앗을 수 있다는 규정이 알려진 후부터는, 사냥을 부자의 재산 갈취와 정적(政敵) 제거용으로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일단 억지를 부려 잡아넣기만 하면 눈엣가시를 없앨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몰수된 재산 중 일부를 받아 챙길 수 있었다. 마녀사냥은 시작부터 어이없었지만, 이처럼 가면 갈수록 더 어이가 없었다. 보통 마녀사냥이라고 하면 중세 시대 끄트머리의 짧은 한순간에 있었던 악습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의외로 이 악행은 등장과 함께 뿌리를 깊게 박았다. 사실, 절정기 또한 중세가 아닌 초기 근대의 16세기 말~17세기였다. 심지어 세일럼 사건처럼 유럽 땅을 넘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으로도 확산했다. 이에 따른 전체 희생자는 대체로 4만~6만명 정도로 여겨진다. 일각에선 30만명에서 최대 200만명을 말하기도 한다.
세일럼, 이곳에서조차…
이제 다시 세일럼으로 돌아가 보자.
정신이상을 겪은 윌리엄스와 패리스가 마녀로 꼽은 세 여인은 미심쩍다는 편견, 좋지만은 않던 평판 탓에 옥살이를 한 사례였다. 하녀 티투바가 고문을 못 견디고 "우리 셋 다 마녀가 맞다"고 거짓 자백을 해 더는 돌이킬 수도 없었다(물론 계속 부정한다고 한들 돌이킬 방법도 없었다). 사건이 불거진 직후 세일럼 주민 상당수는 잡혀간 세 여인을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마법의 원〉 속 여인처럼 생각했으리라. 외진 곳에서 남몰래 이상한 약을 끓이고, 지팡이로 표식 따위를 그려 마법의 힘을 집어넣는. 이를 윌리엄스와 패리스 등 순진한 소녀들에게 먹이고 다니는.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이곳 또한 세속적 욕망에 짓눌린,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도 사업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세일럼에는 또 다른 소녀도 있었다. 이 아이는 윌리엄스와 패리스에 이어 자기 또한 악마의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소녀는 건너편 집안 사람 중 무려 46명을 마녀로 꼽았다. 지목당한 집안은 때마침 아이의 집안과 토지 분쟁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건이었다. 두 집안 사이 영역 갈등 말고도 당시 세일럼에는 주민들 사이 다툼이 많았다. 농업 사회가 상업과 무역업 등 보다 다면화된 사회로 바뀌면서 으레 빚어지는 싸움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세일럼의 마녀 고발자 중 다수는 농업 등 전통적 생활방식을 고수하던 무리로 좁혀졌다. 반면 고발당한 쪽의 상당수는 소규모 가게를 갖고 있는 등 떠오르는 상업 종사자들이었다. 이 또한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의문을 품는 일만으로 마녀가 될 수 있었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춤을 추다
그해 여름, 세일럼 내 마녀 공포증은 절정에 치달았다.
세일럼에서 마녀(여성) 또는 악마의 제자(남성) 혐의로 200명가량이 감옥에 갇혔다. 잡혀가는 이의 편만 들어줘도 공범이라며 체포했다. 7명 심문관으로 꾸려진 특별 재판부는 이들을 차례차례 처형했다. 먼저 6월10일, 동네 선술집 주인의 목을 매달았다. 6월19일에도 5명이 사형장으로 끌고 갔다. 이어 8월에도 5명, 9월에도 8명이 목숨을 빼앗았다. 그렇게 18명 이상을 처벌했다.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한 80대 노인은 무거운 돌에 짓누르는 고문을 당했다. 그 또한 결국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초장부터 지목당해 날벼락을 맞은 사라 굿의 네 살 아기 등 최소 다섯 명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처형이 이뤄지든, 감옥에서 사망자가 생기든, 이런 소식이 닿으면 세일럼에선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 같은 장면이 펼쳐지곤 했다.
교수대 근처 사람들은 몸을 들썩인다. 굳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과장되게 뒤엉켜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은 자신 또한 언제든 마녀로 몰릴 수 있는 만큼, 이렇게 보란듯 즐거워하며 결백함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수대 위에선 까치가 이 모습을 한심한듯 내려다보고 있다. 과거 유럽은 흑백이 섞인 까치를 악마의 새로 분류하곤 했다. 세일럼에도 어느새 이런 분위기가 깔렸다. 모두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웃고, 억지로 장단을 맞추는.
칼날은 지칠 줄 몰랐다. 이제는 세일럼을 넘어 매사추세츠 전역에서 춤을 출 기세였다.
매사추세츠주 총독 윌리엄 핍스는 그제야 사냥을 막아 세우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견디다 못한 세일럼 주민 일부가 도움을 청해 이에 응했다는 말이 있다. 마녀로 몰린 한 여성이 총독 핍스의 부인마저 마녀의 한패라고 말했는데, 이에 놀라 조치를 취했다는 설도 있다. 그 결과, 10월부터 재판이 멈췄다. 그리고 소동이 벌어지고 근 1년이 흐른 1693년 초. 특별 재판부는 해산 명령을 받았다. 창살을 쥔 채 죽을 순서만 기다렸던 이들도 풀려났다. 무고하게 죽은 이들 또한 늦게나마 사면받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일상을 되찾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른 가랑이에 숨은 아이처럼 다시 순해지고, 순박해졌다. 지난 1년간은 어떠한 일도 없었다는 듯 쉬쉬했다. 아주 짧고, 아주 굵었던 잔혹사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인류사에서 마녀사냥이 완전히 없어진 때는 언제일까.
회의론은 세일럼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7세기 후반부터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성적 사고를 앞세우는 철학, 숫자와 증명을 중시하는 과학이 전 대륙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때였다. 사법 또한 증거를 최우선으로 하고, 체계적으로 쓰인 법률에 따라 형벌을 결정하는 식으로 성숙해지고 있던 시대였다. 지긋지긋한 종교 갈등이 일단락된 점, 곧이어 시민 계몽을 내건 혁명이 세계 곳곳에서 발발한 점 또한 한몫했다. 다만, 깊게 박혔던 뿌리의 잔털은 유럽에선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에선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 2003년,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녀사냥을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사과를 표했다. "우리 역사에서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은 세일럼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을 놓고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당시 특별 재판부에 속했던 존 호손의 후손이었다. 그런 그가 쓴 게 사실상 마녀사냥으로 고통받는 여주인공의 생생한 일대기를 담은 소설, 지금도 세계적 명작으로 평가받는 《주홍 글씨》였다.
〈참고 자료〉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 야콥 슈프랭거, 하인리히 크라머, 우물이있는집
마녀 프레임, 이택광, 자음과모음
인류 혐오의 역사, 이창신, 지식공감
톰킨스 해리슨 매티슨(Tompkins Harrison Matteson·1813~1884)미국 뉴욕 출신의 화가. 종교화, 역사화를 잘 그렸다. 특히나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드라마틱한 표현에 능숙했다. 20대 후반부터 10년 가까이 뉴욕에서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한 경험도 있다. 〈마녀 시험〉을 작업한 뒤 얼마 후에는 마녀 사냥의 폐해를 다룬 소설 《주홍글씨》의 한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대표작은 이 외에도 〈탄약 제작〉, 〈조지 제이콥스 재판〉 등.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1525~1569)16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출생과 성장 과정 등은 정확하지 않지만, 네덜란드 브레다에서 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에는 신화, 전설, 미신 등을 그렸다. 이후에는 사회 불안과 혼란상을 그리곤 했다. 그림 속에 유머와 풍자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점 또한 특징. 농민들의 생활상도 정성껏 화폭에 담았다. 이에 최초의 농민 화가, 농부 브뤼헐 등의 별명도 갖고 있다. 대표작은 〈바벨탑〉, 〈농가의 혼례〉, 〈눈 속의 사냥꾼〉 등.
〈후암동 미술관 역사편 읽는 순서〉
①“아빠! 저게 뭐야?”…8세 딸 ‘매의 눈’ 학계 난리났다, 믿기 힘든 광경 포착 - 알타미라 동굴 벽화 (24. 8. 17.)
②“볼거리·노리갯감 전락 지긋지긋”…근육男들 격분에 모두 벌벌 떨었다, 무슨 일 - 스파르타쿠스 (24. 9. 14.)
③“18세 소녀가 軍지휘관이라니!”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했던 그녀 행보…어땠길래 - 잔 다르크 (24. 9. 21.)
④“단두대 못 찾겠어요” 18살 소녀 사형수 울컥…눈 가린채 울음 삼킨 사연 - 제인 그레이 (24. 8. 10.)
⑤ “제발 그만” 子아내 마구 때려 유산시킨 父…항의하는 아들에게도 똑같은 짓 - 이반 4세 (24. 8. 31.)
⑥“문신 어딨어!” 여인 옷 강제로 벗기고 손가락질…다음이 더 끔찍했다 - 마녀사냥 (24. 10. 5.)
⑦“실패하는 순간 죽습니다” 이판사판 도박, 이게 먹혀들었다?…역사 통째로 바꿨다 - 조지 워싱턴 (24. 9. 28.)
⑧“저도 사람이에요!” 절규에도…‘인간 사냥’ 최악의 흑역사, 대체 무슨 일이 - 노예선 (24. 9. 7.)
⑨“보정 해도 너무했다” 늠름한 초상화의 충격적 진실…실상은 어땠나했더니 - 나폴레옹 1세 (24.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