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불능 시대의 ‘플러팅’...모쏠도 돌싱도 ‘웰컴 투 예능’ [이형석칼럼]
연애불능 시대의 ‘플러팅’...모쏠도 돌싱도 ‘웰컴 투 예능’ [이형석칼럼]

일반인들의 연애와 결혼, 이혼을 다루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있다. 본방송과 재방송을 합치면 어떤 때는 지상파와 케이블 등 수백개의 TV 채널 중 두세 개에 하나꼴로 방영되고 있다고 해도 크게 과장은 아닐 정도다. ‘나는 솔로’에서 채널을 넘기면 ‘끝사랑’을 하고 있고 ‘이혼숙려캠프’를 방금 본 것 같은데 또 다른 방송국에선 ‘이혼할 결심’이 방영 중인 식이다. 9월 현재 본방송이 주간 단위로 정기 방영되는 프로그램만 15편 안팎이다.

‘남녀 간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을 일컬어 ‘치정(癡情)’이라 하니, ‘모쏠’(모태솔로, 연애미경험자)이든, 결별을 고민하는 부부든, 이혼했지만 다시 연애를 꿈꾸는 ‘돌싱’(돌아온 싱글)이든 다양한 남녀의 애정만사를 다루는 이들 프로그램을 ‘치정 예능’이라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들 프로그램은 미혼남녀의 데이트를 주선하거나 이혼 위기에 맞딱뜨린 부부를 상담하거나, 돌싱들의 재혼을 돕는 내용을 담는다. 대부분은 주인공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스튜디오의 진행자와 패널들이 방송을 보며 대화를 나누며, 때로 전문가들이 상담 및 조언을 하는 형식이다. 대개 관찰과 토크, 상담으로 구성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남 연애 얘기가 더 솔깃하고, 딴 부부 속사정이 더 궁금한 건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치정 실화가 사람들을 관심을 끈 것은 어제 오늘 우리의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방송사가 나서 미혼남녀 데이트를 주선하는 프로그램도 요새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30대 이상이라면 생생하게 기억할 MBC의 ‘사랑의 스튜디오’만 해도 꼭 20년 전인 1994년 방영을 시작해 2001년까지 계속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지금일까. 더구나 많은 청춘들이 취업과 결혼, 출산 뿐 아니라 연애마저 포기할 수 밖에 없는 ‘N포세대’라는 한탄이 나오는 마당에, TV에서 OTT(동영상 콘텐츠 서비스 플랫폼)에선 왜 ‘치정 예능’이 붐을 맞고 있는 것일까.

연애불능 시대의 ‘플러팅’...모쏠도 돌싱도 ‘웰컴 투 예능’ [이형석칼럼]
외딴 섬에 모인 젊은 남녀가 커플을 맺으면 탈출할 수 있다는 설정의 ‘솔로지옥3’ [넷플릭스 제공]

▶‘대시’와 ‘썸’, 그리고 연애불능 시대의 ‘플러팅’=중매와 맞선 대신 미팅과 소개팅, 그리고 가끔은 헌팅을 하고,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대시’를 했던 오래된 과거가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호감가는 상대와 ‘썸’을 타는 시절도 맞이했었다. 2014년 불린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소유·정기고 ‘썸’)라는 곡의 가사는 1992년 나온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피노키오 ‘사랑과 우정 사이’)이라는 노랫말과 비슷한 것처럼 보였지만, 수사와 라임 만큼이나 이전 세대 감성으로는 낯선 그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플러팅’(flirting)의 시대다. ‘플러트’(flirt)는 사전적으로는 ‘추파를 던지다’는 뜻이다. 성적인 의미를 포함해 상대를 유혹하는 행위를 폭넓게 지칭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선 진지하지 않고 더 가벼우며, 직접적이기보다 암시적인 표현이나 제스처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 원래 영어에선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나, 우리 사회에서 원어 그대로 유행하게 된 것은 정확히 잘라 말할 순 없지만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특히 최근 1~2년 사이엔 방송 예능 프로그램이나 특히 젊은이들에서 일상적으로는 쓰이는 말이 됐다. 영어문화권이 아닌 우리나라에선 연애 풍속도를 보여주는 일종의 ‘유행어’가 됐다고 할 만하다.

대시에서 썸으로, 플러팅으로 청춘들의 세태가 바뀌어 가는 동안 결혼하는 남녀는 점점 줄어들었다. 꼭 30년전인 1994년, ‘사랑의 스튜디오’가 방영을 시작한 그해에만 총 39만3000쌍이 결혼했다. 인구 1000명 당 혼인 건수를 뜻하는 조혼인율은 9.6이었다. 그 20년 후 ‘썸’이 인기를 누렸던 2014년 연간 혼인건수는 30만5000건으로 줄었고, 조혼인율은 6.0으로 낮아졌다. 지난 한 해 동안엔 총 19만3000여 부부가 혼인 신고를 해 조혼인율은 3.8을 기록했다. 1994년부터 약 30년간 혼인건수는 절반 가량으로 줄었고, 조혼인율은 3분의 1토막 가까이로 낮아졌다. 젊은 남녀가 점점 더 결혼을 안 하거나 못 하거나, 꺼리거나 어려워하게 됐다는 얘기다.

‘사랑의 스튜디오’ 같은 미팅이나 소개팅으로 만나 대시에 성공하면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던 세대에게 연애와 결혼은 통과의례였다. ‘이게 무슨 사이인 건지’ 정의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썸타는 청춘들’ 에겐 연애와 결혼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진지한 관계를 시작할 엄두를 못 내고 막연한 신호, 즉 플러팅만 보내는 젊은이들에게 연애와 결혼은 ‘신 포도’다. 따면 좋지만 따기가 어렵고 따봐야 맛도 없을 그 무엇, 불가능해서 불필요한 어떤 것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플러팅은 물면 좋지만 안 물어도 그만인, 손해도 없고 표도 안나는, 망망대해에 던진 ‘미끼’일 뿐이니까 말이다.

연애불능 시대의 ‘플러팅’...모쏠도 돌싱도 ‘웰컴 투 예능’ [이형석칼럼]
50대 이상의 중장년만을 대상으로 하는 짝짓기 프로그램 ‘끝사랑’ [JTBC 제공]

▶연애, 하지 말고 보세요...모쏠도 돌싱도 ‘웰컴’=결혼을 점점 더 안 하니 이혼 건수도 절대적으로는 줄었다. 그러나 결혼은 어려워진 반면, 이혼은 쉬워졌다. 이혼건수나 조이혼율(인구 1000명당 이혼건수)은 20여년전부터 점차 줄어드는 추세지만, 사회적 인식이나 결혼건수 대비 이혼건수를 감안하면 이혼 문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지난해 조혼인율은 3.8이었고, 조이혼율은 1.8이었다. 2쌍의 부부가 탄생하는 동안 1쌍의 부부가 갈라섰다는 얘기다. 10년전인 2014년엔 6.0과 2.3이었다. 3쌍이 결혼하는 동안 1쌍 꼴로 이혼도장을 찍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반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치정 예능’이 전성기를 맞았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모쏠’이며 누구나 잠재적으로는 ‘커플’이거나 ‘돌싱’이다. 청년들이 점점 더 연애와 결혼을 힘들어할수록 짝짓기를 대리체험할 수 있는 데이팅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만들어졌고, 이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이혼이나 돌싱을 주인공으로 한 예능·상담물의 붐을 가져왔다.

현재 방영 중인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으로는 다양한 남녀를 초대해 며칠간 숙박을 함께 하며 데이트를 해보는 ‘나는 솔로’와 ‘나는 솔로-그 후 사랑은 계속된다’가 대표적이고, 50세 이상 세대만을 출연자로 하는 ‘끝사랑’도 있다. 또 돌싱만을 주인공으로 하는 ‘돌싱글즈’도 시즌을 거듭하며 방영 중이다. 주로 몸매와 외모가 뛰어난 남녀들이 출연한 ‘솔로지옥’과 남녀 100명이 화려한 호텔에 묵으며 연애·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커플팰리스’, 연애에 지친 남녀가 출연해 새 상대를 찾아보는 ‘환승연애’ 등은 최근 종영했거나 다음 시즌을 준비 중이다. ‘이혼숙려캠프’와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은 갈등하는 일반인 부부의 일상에 카메라를 갖다대고 상담 및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프로그램이다.

방송을 지켜보며 어떤 이들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저런 프로그램에 출연할 마음을 먹게 됐을까 의구심도 들기 마련이다. 출연하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서고, 대기자 명단만 빼곡하다니 더 이해가 안 갈 법도 하다. 아무리 연애와 결혼이 급하기로서니 자기 얼굴과 직장, 사적인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을까. 실수와 잘못, 망신을 ‘생중계’ 당하고 싶을까.

내 연애는 ‘다큐’지만 남들의 치정극은 대개 ‘예능’인 법이다. 누가 누구와 사귄다더라는 소문, 누구와 누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귀엣말, 어떤 집 부부가 뭣 때문에 싸웠다더라는 얘기, 이런 것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의 귀를 잡아 끈 이유다. 현대에 와선 유명인과 스타들의 가십과 스캔들이 ‘남의 내밀안 속사정’을 알고자 하는 대중들의 욕망을 충족시켰다면, 이제는 점점 더 ‘일반인같지 않은 일반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가고 있다. ‘셀럽들의 가십’에서 ‘만인들의 스캔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바로 소셜미디어와 함께 말이다.

연애불능 시대의 ‘플러팅’...모쏠도 돌싱도 ‘웰컴 투 예능’ [이형석칼럼]
다양한 미혼 남녀가 출연해 숙박과 게임을 함께 하며 짝을 찾는 ‘나는 솔로’ [SBS플러스·ENA 제공]

▶‘매력자본’의 쇼핑몰 SNS...전시의 욕망 혹은 욕망의 전시=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이용자 개인이 가진 모든 ‘자본’들. 그 중에서도 특히 ‘매력 자본’의 거대한 경쟁의 장이자 전시의 장이다. ‘매력 자본’(Erotic Capital)은 런던 정치경제대학 교수를 역임한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이 고안한 개념으로, 경제·문화·사회 자본과 함께 개인 자산을 이루는 4번째 요소이다. 이에 따르면 경제 자본이란 개인이 가진 돈, 증권, 토지 등 재산을 이른다. 문화 자본은 학력과 자격증, 직업경력, 예술적 취향·감상능력, 사회적 매너 등을 가리킨다. 사회적 자본은 한마디로 인맥이고 연줄이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고, 누구를 아는지가 사회적 자본을 결정한다.

‘매력 자본’은 아름다운 외모, 성적인 매력, 인간관계 기술, 활기있는 태도, 스타일, 섹슈얼리티 등 6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 얼굴, 몸매, 리더십, 사교성, 패션, 성적 능력이 매력 자본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SNS에서는 이용자들의 개인 자본이 각축을 벌인다. 외모와 몸매가 강조되고, 차와 옷의 브랜드가 노출되며, 사는 곳과 여행지가 어디인지 드러나고, 어떤 식당을 가고 어떤 음식을 먹는지 나타나며, 취미와 취향이 무엇인지 알려진다. 심지어 누구를 아는지, 누구와 함께 하는지도 말이다. 경제·문화·사회·매력 자본의 총체적인 경연장인 셈이다. 캐서린 하킴의 저서 ‘매력 자본’은 매력 자본이 직장·정치·공공 영역 등 모든 사회적 관계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분석한다. 특히 노동시장과 결혼시장에서 매력 자본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말이다.

연애·결혼·이혼 프로그램의 수요와 공급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바로 SNS다. SNS는 매력 자본의 진열장이자 매력 자본을 극대화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하다. 누가 얼마만큼의 매력 자본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노동 시장과 결혼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출연자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실제 연애나 결혼, 부부문제 해결 뿐 아니라 SNS의 영향력을 키울 기회를 얻게 된다. 출연 신청자들의 줄이 길게 늘어선 이유다.

시청자들은 남들의 내밀한 연애를 속속들이 훔쳐보는 재미 뿐 아니라 연애·결혼·이혼 등을 ‘간접 체험’ 한다. 그리고, 출연자들의 스펙과 얽히고 설키는 구애의 교차선을 보며 자신이 가진 매력 자본이 결혼과 노동 시장에서 어디쯤 위치할 지 가늠해본다.

자신을 한껏 꾸며 외모와 몸매, 재산, 인맥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전시의 욕망’이라고 한다면, 더 아름답고 더 능력있고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만인에 보여주는 것은 ‘욕망의 전시’라고 할 수 있다. SNS는 ‘전시의 욕망’과 ‘욕망의 전시’가 교차하는 매력 자본의 거대 쇼핑몰이며, 연애·결혼·이혼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 중에서도 일정 등급 이상만 전시·거래되는 ‘견본 시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