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니스트 김홍박ㆍ트럼페터 최인혁
앙상블오푸스 류재준 작곡 육중주 초연
금관은 세밀한 음색 컨트롤 쉽지 않은 악기
기본기 다진 뒤에야 자기색 찾을 수 있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맑은 음색의 피아노, 고풍스러운 세 현(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선율 뒤로 섬세하고 따뜻한 금관 악기가 등장한다. 나지막한 트럼펫과 호른의 온화한 음성엔 가을의 정취가 담긴다. 금관과 현악기, 피아노는 오랜 친구처럼, 혹은 이상적인 대화 상대처럼 서로를 들어주고 자신을 이야기하며 하나의 선율을 같은 크기와 닮은 목소리로 주고받았다. 누구 하나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은 ‘이상적 공존’이었다. 최근 세계 초연한 앙상블오푸스의 예술감독인 작곡가 류재준의 ‘트럼펫, 호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피아노를 위한 육중주’(9월 10일, 예술의전당)다.
이날은 한국 금관의 ‘날짜 변경선’이었다. 웅장하고 위협적이며, 요란한 경고음이 대부분이라 생각했던 금관 악기의 편견은 완전히 깨졌다. ‘인간적인 호른’과 ‘편안한 트럼펫’의 매력이 고스란히 살아나, 모든 악기와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한국 호른의 역사’이자 ‘전환점’으로 불리는 앙상블오푸스의 김홍박은 “금관은 오케스트라 안에서 전체 사운드와 볼륨을 결정해 소규모 편성에선 세밀한 음색 컨트롤이 쉽지 않다”며 “스트링에 맞춘 밸런스와 색깔을 고려하며 음악이 흐르는 대로 쫓아가고자 했다”고 돌아봤다. 트럼페터 최인혁은 연주 전 고심이 깊었다. 그는 “트럼펫이 소규모 현악 실내악과 함께 하는 연주가 없는 것은 워낙 시그널적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는 악기이기 때문“이라며 ”다이내믹, 사운드를 개인적 역량으로 조절하는 시도를 할 수는 있지만, 물리적 한계는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이 육중주는 도전”이라고 했다. 도전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음악 안에서 트럼펫과 호른은 모든 순간 팔색조였다. 때론 첼로나 더블베이스처럼 진중했고, 때론 비올라처럼 존재하면서도 존재감을 감췄다. 유려한 바이올린 선율처럼 바람을 만들어 키작은 나무들을 간지럽혔다. 그러다 청아하고 선명한 소리를 내며 힘을 줄 때도 있었다.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않을 때를 간파해 목소리를 냈다.
작곡가 류재준은 “오케스트라 음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금관은 클래식 음악에서 상당히 중요한 악기”라며 “이토록 뛰어난 재능의 두 사람이 있었기에 이 곡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韓 금관의 이정표…“시간에 쫓긴 ‘입시 교육’, 연주자 성장 가로막아”
금관 악기는 예민하고 까탈스럽다. 때문에 연주자들은 내내 미션을 달고 다닌다. 작은 구멍 안으로 숨을 불어 넣어 ‘좋은 음색’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과제다. 하지만 시시각각 달라지는 사람의 호흡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 까다로운 악기를 다루는 것은 만만치 않다. 설상가상 유달리 도드라지는 소리 탓에 ‘한 번의 실수’는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되기도 한다.
최인혁은 “어떤 분야나 0.01%의 천재는 존재하나 나머지 99.99%를 기준으로 보면 금관은 성악만큼 성장이 느린 악기가 금관”이라고 했다. 그만큼 악기를 다루는 것도, 악기를 연주하며 만나게 되는 지난한 고비들을 넘어서는 것도 쉽지 않아서다.
한국 금관계의 ‘새로운 세대’이자 이정표인 두 사람은 “입시 위주의 교육”은 금관 연주자의 성장을 가로막는 큰 요인이라고 꼬집는다. 한국의 ‘금관 새싹’들은 여유가 없다. 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이다. 두 사람은 금관 연주자가 ‘자기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한국의 음악 교육은 이를 위한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인혁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본기를 가졌는데,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를 마주하다 보니 악기를 즐기는 것은 물론 소리를 내는 것조차 불가능해 일찍 포기하거나 망가지는 케이스가 많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트럼펫을 시작해 독일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에서 학사 과정을 밟았다. 한국과 독일 교육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음악적 지향점’과 ‘방향성’이다. 최인혁은 “한국에선 어려운 곡을 빨리 습득해 연주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라면 독일에선 대학에서도 기본기를 최우선에 두고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학생들이 ‘경지’에 오를 만큼의 수준으로 음계를 연주하지 못하면 “넌 전공을 할 수 없다”는 명료한 답을 준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 수준,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해도 창피하지 않은 수준이 학생들에게 요구된 ‘경지’”라고 봤다.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 수석으로 활동하다 지난해부터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홍박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는 “금관악기는 늦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시작 연령대가 늦어질수록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며 “이 경우 자신의 소리와 톤에 대한 연구나 기본기를 쌓을 겨를이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김홍박의 등장’ 이후 한국 호른의 역사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25세에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에게 발탁,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수석으로 활동했고, 세계 유수 악단을 거쳤다. 그의 스승인 라도반 블라트코비치(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는 “김홍박은 이미 완성된 연주자”라며 “그에게 필요한 건 좋은 경험뿐”이라고 학부 시절부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 김홍박은 안심하고 들을 수 있는 ‘든든한 음악가’다.
김홍박은 “우리나라는 금관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그것은 기술적 실수의 문제라기 보단 음색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라며 “자기 소리에 대한 오랜 고민과 탄탄한 기본기가 바탕해야 좋은 음색을 가지게 되나, 환경적인 문제가 음악가들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두 사람 역시 ‘나만의 소리’와 ‘좋은 음색’을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끊임없이 부딪혔고, 실수를 받복했다. 최인혁은 “오케스트라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20대 초반, 내 소리의 실체(?)를 마주하고 와르르 무너진 경험을 한 뒤, 다시 처음부터 (나의 소리를) 쌓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반복 학습’, ‘꾸준한 연습’을 통한 기본기 훈련, 하나의 음악 안에 속한 모든 악기의 역할과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김홍박은 ”금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음을 내더라도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가지는 것“이라며 ”흔들림 없는 호흡을 가지기 위해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가 찾은 ‘좋은 음색’은 ”그 음악에 딱 맞는 정확한 음색, 색감이 느껴지는 음색, 모든 것을 담을 있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소리“라고 했다. 결국 그는 “좋은 음색은 음악에 맞는 음색”이라며 “금관은 무척 예민한 악기라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착하면 실수와 결함이 나올 수 있다. 음악의 전체 흐름과 소리에 집중해야 결국 좋은 음악이 나온다”고 봤다.
이젠 ‘금관의 시대’ 열릴 것…“삑사리도 내봐야 더 아름다워진다”
금관은 ‘소수의 악기’다. 연주자와 곡의 비율만 봐도 빈약한 생태계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 연주자들은 현악기 대비 100분의 1 수준. 업계에선 “비교할 만한 수준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규모도 작으니 재능있는 인재 발굴은 더 어렵다. 김홍박이 세계 무대에서의 각종 러브콜을 내려놓고 한국에 정착한 것도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해서다.
인재 육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기회’다. 여전히 금관 연주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적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의 악기군보다 숫자도 적고, 관객들에겐 진입장벽도 높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리사이틀과 달리 금관악기 독주회의 티켓 파워는 현저히 떨어진다.
류재준 작곡가가 금관 악기를 한 축으로 한 육중주 곡을 쓰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만큼 이들을 조명할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며 “자신들의 재능을 가지고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에 김홍박도 공감했다. 김홍박은 명실상부 한국 금관업계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연주자다. 하지만 그는 “참 아이러니한게 제가 금관 연주자로서 주목받고 연주가 많아지면 저로 인해 시장도 확장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참 아이러니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부르는 사람만 부른다는 것”이라며 “이전보다 늘어나긴 했다지만 여전히 시장은 작다”며 안타까워 했다.
금관 악기의 수준은 오케스트라의 질을 판가름 하는 척도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진정한 음악강국이 되기 위해선 금관 분야가 융성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김홍박 최인혁은 금관 연주자들이 처한 한계와 우려에도 “한국 금관의 미래는 밝다”고 자신했다. “이제 금관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물론 프로 무대에서의 20대 젊은 연주자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류재준 역시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국 금관계가 현재의 수준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기적같은 일”이라고 했다.
한 계단 한 계단 성장하는 시기인 만큼 김홍박 최인혁은 “금관의 소리를 너그럽게 들어달라”고 당부한다. 사실 최정점의 연주자인 두 사람의 무대에선 소위 말하는 음이탈을 만나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우리도 실수를 엄청 하고 삑사리도 낸다”며 “기술적인 실수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관객들의 냉정한 시선과 매몰찬 평가는 때론 연주자를 주눅들게 한다. “틀리지 않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더 심각한 삑사리를 내고 음색과 밸런스까지 깨지게 된다”(김홍박)는 귀띔이다.
“열아홉 살에 베를린에서 베토벤 교향곡 ‘7번’을 듣는데, 호른과 트럼펫 연주자가 시작부터 ‘으악’하면서 완벽한 삑사리를 내더라고요. (웃음) 그 충격이 잊히지 않았고, 그날의 공연은 엄청난 자극이었어요. 사실 리스크가 클수록 음악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여지도 커져요. 삑사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자심감과 실력이죠. 오히려 깔끔하게 연주했는데 아무런 감정과 표현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게 최악이에요. 더 많이 틀려봐야 해요. 그래야 자극과 감정을 담아낼 여지가 생겨요.” (최인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