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베스트셀러 작가 인터뷰
전업작가 되기까지만 십수 년…연 1천만원으로 생활
좋아하는 걸 포기하는 게 선택…양다리 없이 외길 걸어
“언젠가 내 글 알아주리라며 버텨…50에 성공해 다행”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소설가이지만 소설만 쓰는 소설가가 되기까지 14년이 걸렸다. 33살이었던 2007년, 앞으로의 5년과 10년 뒤의 모습도 어느 정도 구체화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출판사에서 나왔다. 다른 사람의 글을 만지고 있기보다 오래도록 벼려왔던 꿈인 소설가가 스스로 되기로 했다. 그 선택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고달플지는 차마 알지 못했다.
김호연 작가는 1974년생이다. 올해 50살인 그가 ‘방구석에서 소설만 써도 된다’는 보증수표를 받은 것은 100만부 넘게 팔린 ‘불편한 편의점’을 펴낸 2021년으로, 불과 4년 전이다.
30대 초반에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와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던 6년의 무명시절을 견디고,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도 받았지만 그 이후로도 부업을 해야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쭐해지지도, 쉽게 부화뇌동하지도 않을 나이인 40대 후반에서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김 작가는 “선택이라는 게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덜 좋아하는 것들 가운데서 고르는 거라고 생각하죠. 아니에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포기하는 게 선택이에요. 그리고 그 포기한 삶에는 미련을 가지면 안돼요. 그건 양다리예요”라고 말했다.
그는 “출판사에서의 커리어는 나쁘지 않았다. 소설 팀장까지 했고 계속 다니다 보면 40살까지는 편집장 하다가 그 이후에는 자기 출판사 하나 차려 독립하면 될 것 같았어요. 그러면 사회적 시간대에 걸맞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었겠죠”라고 가정법을 썼다.
하지만 김 작가는 하루라도 빨리 나의 글을 쓰는 데 집중해보자는 용기를 냈다. 직장을 나오는 순간에 많은 것들이 자동적으로 포기됐다. 연애, 결혼은 물론 그것들을 포기했다는 데서 오는 압박감조차도 더는 나와는 완전하게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야만 했다.
그는 “실제로도 돈도 못 벌고,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도 않는 무명작가 시절이었어요. 자존감도 떨어지니까 진짜 소외돼 살 수 밖에 없구나, 작가가 이렇게 외롭구나 절절하게 느꼈죠”라고 말했다.
무명작가 시절 그는 통장을 보기가 두려워질 때마다 화장실로 달려가 양치질을 했다. 30대 청년이 몸 어디가 크게 고장날 일은 없었다. 패션을 좀 포기하고, 친구와 부모님 집에 가서 가끔 밥 얻어먹으면 큰 돈이 들 일도 없고, 생계는 어찌저찌 이어졌다.
충치는 좀 달랐다. 한번 치과를 가면 수십 만원이 깨지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김 작가는 “그래서 위기의식이 들 때마다 이를 되게 열심히 닦았다. 근데 이건 사실 귀여운 에피소드다. 더 잔인한 이야기들은 기억에 담고 살기 괴로워 많이 지운 것 같다”고 했다.
하필 이 시기 영화판도 자본이 빠지면서 시나리오 작업 일거리가 끊긴 것이 치명적이었다. 김 작가가 20대 첫 사회생활을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시작한 만큼 타격이 컸다.
그는 “근데 제가 막 전업작가 하겠다고 나오자마자 영화계가 힘들어졌어요. 시나리오를 아무리 써도 영화화 되는 게 없었어요. 돌파구가 없어진 거죠. 자본이 참 냉정해요.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 르세상스가 지나고 2006~2007년쯤부턴 함량 미달의 조폭 영화가 많이 나왔던 것 기억하세요? 영화계에 몰려있던 돈이 싹 빠져나갔어요”라고 회고했다.
원래도 술을 좋아하던 그는 하루 써야 할 원고지를 채우면 ‘한 잔’하는 것이 낙이었다. 그러던 것이 여러모로 일이 안 풀리면서는 점차 알코올중독에 가까워졌다. 밤엔 친구 가게에서 서빙 알바를 했는데, 끝나면 그 자리에서 맥주를 ‘부어라 마셔라’였다. 낮에도 마셨다. 소설은 손에서 놔버렸다.
그는 “작은 공모전 같은 거라도 당선돼서 500만원이라도 벌면 기운이 나는데, 그런 게 아무것도 없던 한 6개월인가 한 1년 정도 되는 기간은 정말 되는 게 없어 술만 마셨다. 말 그대로 기억이 ‘삭제’됐고, 심지어는 어떻게 그 슬럼프를 극복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고 고백했다.
이쯤되면 어디 취직을 하거나, 다른 사업을 시작할 만도 하다. 하지만 김 작가는 예전 인터뷰에서 “가난하든 힘들든 꾸준히 썼다”고 밝힌 바 있다.
퇴사와 이직·전직을 염두에 둔 청년이라면 ‘무슨 일이든 시작을 했으면 10년은 해보라’는 조언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격언 가운데서 갈대처럼 흔들릴 것이다. 김 작가가 아무리 힘들어도 펜을 놓지 않았다고 고백하니, 어째서 그랬는지 이유를 꼭 들어야 했다.
그는 “어느 순간이 지나면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라고 다소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다른 일을 못하게 된다. 어느 정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면 다른 일로 ‘커리어 전환’ 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리고 다른 재능들이 다 퇴화되죠”라고 말했다.
물론,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저는 제 정체성이 ‘스토리텔러’라는 점에 있어서는 의심하지 않았어요. 내 이야기를 완성하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는 희망이 있었죠. 그러니 힘들어도 버틴거에요”라고 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정체성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 온 것이라 뿌리가 단단했다. 김 작가는 20살이 될 때가지 이사를 20번 정도 다닌 것 같다고 기억했다.
그는 “저 어릴 때 남대문시장이 있는 회현동에도 살았어요. 부모님이 돈까스도 팔고, 갈비집도 하고 자영업을 하느라 늘 맞벌이였죠. 저는 기본적으로 민감하면서 예민한 아이였는데 감수성이 인정받는 시대도 아니었고 부모님도 일이 바빠서 저를 살갑게 챙기기 쉽지 않았다”고 했다.
소년에게 도피처가 되어 준 곳은 남산도서관, 그리고 극장이었다. 김 작가는 “집이 힘들면 아무래도 가족간에 불화가 생기기 쉽잖아요. 거기서 받은 상처, 감수성 이런 것들이 저를 책읽기, 글쓰기로 도피하게 했죠. 현실을 잊고 싶으니까. 중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봤다”고 했다.
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는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세계문학상 우수상)로 “가까스로 데뷔”했다. 그 후 ‘연적’(2015), ‘고스트라이터즈’(2017), ‘파우스터’(2019)를 냈지만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2년 간격을 두고 꾸준히 작품을 냈다는 것은 “정말 열심히 썼다”는 뜻이다. 특히 5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인 파우스터가 선전하지 못하자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저도 그렇고 출판사도 파우스터에 거는 기대가 컸다. 특히 저는 ‘삼세판’이다라는 마음으로 1년 반이라는 저의 시간을 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작업했던 시나리오 한 편이 5000만원이라는 큰 돈에 팔려서다. 그 돈을 자금 삼아서, 그리고 모든 것을 투자해 내놓은 스릴러 장르의 소설이었다”고 말했다.
배가 부르면 식곤증이 와 글이 안 써진다는 이야기에 1일 1식까지 감행할 정도로 절박했다. 정신을 벼리기 위해 한 1일 1식은 500페이지 소설은 완결하게 했지만 머리숱은 잃어버리게 했다. 근데 안되니까 요즘말로 ‘현타’가 왔다. 목디스크 와서 손도 못 움직이고, 거진 두 달을 누워만 있었다”고 했다.
소설이 터지지 않으면 소설가는 막막하다. 보통의 작가들이 소설 선인세로 받는 100만~500만원으로는 도저히 다음 작품을 준비할 여력이 되지 못한다. 김 작가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대부분 작가들이 전업이 아닌 이유다. 그 역시 데뷔 이후에도 행사 시나리오를 쓰거나 대필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김 작가는 “작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문화예술계 쪽이 다 그렇다. 피라미드다. 승자 독식(winner takes it all)이고 거기까지 올라가기 전의 무명들은 생계형”이라고 진단했다.
다시금 인생에 어둠이 깔리려던 찰나, 먼 유럽 나라 스페인이 김 작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우리나라 토지문화재단(원주)에서 스페인 문화국(마드리드)과 함께 양국 소설가를 1대1로 교환해 각자의 레지던스에 머물 수 있도록 집필환경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김 작가는 3개월 동안 마드리드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돈키호테에 대한 소설을 쓸 취재와 구상을 하면 됐다.
하지만 한국에 귀국하고 나니 전 세계가 코로나 열병을 앓았다. 돈키호테를 주제로 한 소설은 작중 화자를 젊은 청년 여성으로 설정했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김 작가는 쉽게 글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조금 미뤄두고, 바로 그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모든 것을 내려둔 마음으로 썼다. 이 소설은 처음엔 출판사를 찾기도 어려워 출판 계약도 없이 집필을 완료했다. 하지만 알려진대로 대박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김 작가는 늦은 성공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한다. “제가 전업작가로 나오자 마자 대박을 쳤다면? 그래도 인생 쉽지 않았을거다. 처음부터 잘 되고 계속 잘 되는 사람들은 정말 절제력있고 꿈이 정말 큰 분들이다.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초심자의 행운이 실력인 줄 알고 소홀하고 까불게 되죠. 저는 제가 늦게 성취를 이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김 작가가 지난 4월 내놓은 신작 ‘나의 돈키호테’에서 주인공 ‘돈 아저씨’(본명은 장영수)는 ‘돈키호테’처럼 혁명적인 영화감독이 되기를 꿈꿨으나 거듭된 인생의 굴곡에 꿈을 접는다. 하지만 결국에는 스릴러 소설을 내는 작가로 ‘부활’한다.
김 작가는 “스릴러 장르는 저도 한 번 도전을 해봤고 쓰는 재미도 느꼈다. 책에선 돈 아저씨가 저 대신 쓰게 해 봤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도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