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무슨 죄인가? [헤럴드광장]
조현용 경희대 교수

‘새가 날아든다.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 중에는 봉황새 만수문전(萬壽門前)에 풍년새, 산고곡심무인처(山高谷深無人處) 울림비조(鬱林飛鳥) 뭇새들이 농춘화답(弄春和答)에 짝을 지어 쌍거쌍래(雙去雙來) 날아든다.’(하응백, 창악집성)

수록자에 따라 약간씩 가사가 다르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은 새타령입니다.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민요 새타령의 앞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왼갖 잡새 중에 봉황새도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봉황도 여러 새 중의 하나이니 잡새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잡새는 나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여러 새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봉황도 잡새라니 왠지 기분이 좋은 것은 비뚤어진 제 마음 때문일까요.

사실 새는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입니다. 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기에 많은 시에서 부러움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였습니다. 묶여있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에 새처럼 부러운 존재는 없었을 겁니다. 이렇듯 새는 자유의 상징이고, 장벽을 넘는 해방의 상징입니다. 김소월은 ‘길’이라는 시에서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하고 갈 길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들 속에서 갑자기 새는 문제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새가 되어 버린 겁니다. 가수 싸이의 노래는 이런 새의 우울한 비유의 정점입니다. ‘난 완전히 새 됐어.’라는 구절은 많은 감정을 드러냅니다. 새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존재로 비유하고 있는 겁니다. 새 중에서도 제일 억울한 새는 철새입니다. 계절을 좇아 날아다니는 철새야말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자유를 보여줍니다. 고향을 찾아가는 애타는 심정도 잘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 철새가 정치권으로 오면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철새도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새가 아닌데 새로 오인이 되어 새를 욕먹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경찰을 속되게 이르는 ‘짭새’입니다. 짭새의 어원은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잡는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새는 사실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사람의 의미를 가진 접미사로 보아야 할 겁니다. 예를 들어 돌쇠, 마당쇠 등의 ‘쇠’가 여기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범죄자는 경찰을 자신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은어로 짭새라고 부른 것입니다.

짭새는 짧게 ‘새’라고만 하기도 했습니다. 몰래 날아들어 잡아가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짭새라는 은어가 범죄집단을 넘어 학생이나 노동자의 은어로 변모하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더해 놓았습니다. 민주주의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탄압하는 독재정권의 손발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겁니다. 따라서 짭새는 두려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반민주, 반민중적인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새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괜스레 새만 욕 먹이는 겁니다.

한편 짭새의 ‘새’는 접미사 구실도 합니다. 원래도 ‘-보, -꾸러기, -쟁이’ 등과 같이 ‘-쇠’라는 접미사였을 텐데 엉겁결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는 직업의 사람들에게 새라는 말을 붙이는 겁니다. 특히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을 비꼴 때 사용합니다. 주로 ‘-사’자 직업을 비틀어서 ‘-새’로 발음하는 겁니다. 언론에도 등장하기도 하고, 댓글에 넘쳐나기도 합니다. 검사를 ‘검새’라고 하고, 판사를 ‘판새’라고 합니다. 요즘은 의사를 ‘의새’라고 하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저는 일부 사람의 문제로 전체 직업을 비하하는 이런 조어법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우선은 우리말 조어법에도 맞지 않구요. 사람에게 새라고 하는 것은 날아다니는 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새가 무슨 죄가 있어서 대신 욕을 먹어야 할까요. 자신의 직업에 맞게 충실히 일하여 새에게 씌운 오명도 벗겨주었으면 합니다.

덧붙여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판사(判事), 검사(檢事)와 의사(醫師), 변호사(辯護士)의 ‘사’는 한자가 다릅니다. 같은 사가 아닙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