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마저 ‘가르칠 선생’이 없다
교수들도 이공계 기피 현상 심화
이공계 인재 해외기업 탈출 러시
우리 사회 인재 무게 추가 기울고 있다. 어느샌가 이공계는 ‘기피’의 대상이, 의약학계는 10년을 걸려서라도 가야만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의대정원 2000명 증원도 단기적으론 이 현상에 기름을 부었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는 사회적 압력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초등학생부터 반도체 대기업 직원까지 입시 학원 문을 두드리게 만드는 한국은 지금 ‘의사’ 권하는 사회다. ▶관련기사 4면
“한국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국내 대학 이공계 학과 졸업 후 해외 IT기업으로 떠난 한 청년의 말이다. 의대 열풍의 이면, 이공계 인재들을 떠나도록 만든 현실을 들여다봤다.
의대 선망과 함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하는 가운데, 이공계 교원들마저 교단을 떠나고 있다. 이공계 인재 양성 최고 기관이라 일컬어지는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KAIST)은 현재 이공계 학과 절반 가까이가 ‘교원 공백’ 상태다. 이공계 명예가 추락한 상황에 적지 않은 이들은 사표를 던지고 차라리 연봉 경쟁력이 높은 해외 IT기업으로 떠나고 있다.
▶서울대·KAIST 이공계 23곳 ‘교원 공백’=19일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 대학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는 이공계열 8개 학과에서, KAIST는 16개 학과에서 신임 교원을 채용하고 있다. 학교별 상황을 보면 서울대 공과대(11개), 자연과학대(7개)로 총 18개인 이공계열 학과 절반 가까이가 교원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KAIST는 그 비중이 더 크다. 공과대(17개), 자연과학대(5개), 생명과학기술대(4개)로 총 23개인 KAIST 이공계열 학과 중 70%의 교원이 비었다.
이공계 교원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교단을 떠났다. 최근 5년(2019~2023년)간 서울대 퇴직 교원 464명 중 47명(10.1%), KAIST에서 160명 중 40명(25.0%)이 계약만료나 정년퇴직 등이 아닌 ‘자진 퇴사’, 즉 자발적으로 사표를 냈다. 이중 이공계에 해당하는 교수는 각각 서울대와 KAIST가 각각 28명, 11명이다.
▶“서울대 공대 교수하느니 역대 연봉 구글 간다”=국내 이공계 인재를 흡수하고 있는 건 해외 IT기업들이다. 김성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미국 IT기업이 국내 우수 이공계 청년 인재 및 교원들에 굉장히 많은 러브콜을 하고 있고, 실제로 상당수가 빠져나가고 있다”며 “미국의 경우 엔지니어 보수가 훨씬 높아 챗GPT 개발사인 오픈AI만 해도 연봉이 한화 8억~9억원 상당이라 수십년 사이 교수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진 한국에 있거나, 삼성전자로 가느니 해외로 가겠다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기존 교원이 떠난 자리를 채우기도 쉽지 않다. 서울대 등 이공계 상위권 대학 정교수들이 대부분 정년을 채우던 것은 옛 이야기가 됐다. 서울 소재 한 공과대학 교수는 “과거 우리 대학의 경우 교수 오퍼(제안)를 받으면 무조건 왔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며 “교수를 하던 도중 대기업 사장으로 갈 때에나 정년을 채우지 않았는데, 지금은 1~2년 사이 해외 기업으로 쉽게 떠난다”고 했다.
수년 불과한 텀을 두고 이어지는 이공계 대학 교원 교체는 교육의 질 하락으로 직결된다. 서울 소재 다른 공과대학 교수는 “서울대에서 교원이 빠지면 다른 대학 교원이 자리를 채우면서 연쇄적으로 다른 대학, 수도권과 지방 피해는 더욱 커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R&D 예산 삭감까지...“한국 절대 안 간다”=이 같은 현상은 열악한 이공계 인재 처우에 낮아진 명예, 최근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까지 겹친 결과다. 정부는 올해 R&D 예산을 전년 대비 15% 가량(4조6000억원) 삭감하면서 정부부처 과제별, 기관별 삭감 내역을 통보하고 있다.
한 공과대 교수는 “해외에 있는 제자들에게 물어보면 최근의 R&D 삭감 사태를 보며 ‘한국엔 절대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말들을 해온다”고 말했다.
강득구 의원은 “현재 대학은 교수 확보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으로 양질의 대학 교육을 위해서는 우수 교원 확보와 교육 및 연구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이를 실효성 있게 추진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구체적인 단계적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혜원·안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