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X반고흐 미술관 협업 프로젝트
편집자주
지구촌 이색적인 장소와 물건의 디자인을 랜 선을 따라 한 바퀴 휙 둘러봅니다. 스폿잇(Spot it)은 같은 그림을 빨리 찾으면 이기는 카드 놀이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헤럴드경제=한지숙 기자] 네덜란드가 낳은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와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포켓몬)가 133년의 세월을 거슬러 뜻밖에 조우했다.
포켓몬 공식 유튜브채널은 최근 포켓몬의 마스코트 피카츄가 등장하는 짧은 영상 하나를 공개해 포켓몬 마니아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7일 영상을 보면 포켓몬 피카츄와 이브이가 풍차가 있는 해바라기 밭을 달리면서 즐겁게 뛰어노는 것으로 장면이 시작된다. 열심히 달리던 피카츄 머리 위로 문득 파란색 물감 한 방울이 톡 떨어진다. 피카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뭐지?’ 궁금해 하는 순간 구름은 반 고흐 화법의 붓질이 칠해지며 이내 반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밀밭’ 속 그 하늘로 바뀌어 있다. 갑자기 해바라기들은 수많은 해루미들이 되어 피카츄와 이브이를 반긴다. 해루미는 해바라기 모습을 한 포켓몬이다. 영상은 포켓몬 컴퍼니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의 협업을 알리며 반 고흐의 정물화 ‘해바라기’ 속에 해루미가 들어가 있는 오마주로 끝이 난다.
이 영상은 28일 시작되는 포켓몬과 반 고흐 미술관의 협업 프로젝트 티저 영상이다. 현실 세계에 없는 포켓몬과 후기 인상파 대가의 만남으로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포켓몬 컴퍼니가 거장들의 명화와 손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포켓몬 컴퍼니는 2018년에 도쿄도 미술관과 협력해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대표작 ‘절규’를 딴 5가지 포켓몬 카드, 각종 굿즈, 절규하는 피카츄인 ‘뭉크츄’ 등을 선보인 바 있다. 피카츄 절규 프로모션 포켓몬 카드는 인기를 끌어 현재 약 365만원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1990년대에 포켓몬을 보고 즐기고 자란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2004년생)를 대상으로 예술 문화 감수성을 입히는 마케팅 전략으로 포켓몬 캐릭터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 고흐 미술관 역시 이러한 엉뚱발랄한 협업이 처음이 아니다. 레고와 손잡고 만든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반 고흐와 예술가의 방 레고나 미피 반 고흐 인형 등은 반 고흐 미술관에서 인기 있는 기념품들이다. 사실 ‘별이 빛나는 밤’ 같은 반 고흐의 유명 걸작들은 파리 오르세나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걸려 있고,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는 훌륭하긴 하지만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반 고흐 미술관으로선 더 많은 관람객들을 끌어모으고 반 고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높이고자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을 법 하다.
만일 반 고흐가 지금 살아 있다면 포켓몬과의 협업을 반길까.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인 반 고흐는 전시관 측의 상업 마케팅에 어쩌면 불같이 화를 내며 거부했을 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반 고흐가 일본 미술 사랑에 ‘찐’이었다는 것이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등 새로움을 추구하던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색채에 열광했던 것처럼 반 고흐 역시 그랬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이 자주 등장한다. 프랑스 아를에 정착한 지 얼마 안된 1888년 3월 16일 보낸 편지에는 “친애하는 아우, 알다시피 나는 일본에 와 있는 것 같아”라고 썼다. 그는 평생 일본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같은 해 6월에는 테오와 파리에 있는 다른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아를에 오라고 권유하며 “시각을 바꾸면 좀 더 일본인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색채도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고 했다.
그해 그린 ‘자화상’에 대해 테오에게 설명하면서 일본 승려의 엄격함을 담은 수도사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눈을 ‘일본적으로’ 개조했다고 했다. ‘예술가의 방’ 그림에 대해선 테오에게 “그림자가 제거됐고, 색채는 일본 목판화처럼 얇고 단순하게 칠해졌어”라고 적어보냈다.
반 고흐가 처음 일본 판화를 접한 건 1885년 벨기에 항구도시 앤드워프에서 일할 때였다. 그는 부두에 가득한 일본 공예품을 보고 “환상적이고, 독특하고, 이상하다”라고 표현했다.
이후 수집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1886년 파리 테오 집으로 이주해 본격적인 미술 작업을 시작할 때 그는 일본 목판화 660점을 작품 당 단 몇 센트를 주고 샀다. 처음엔 전시 목적으로 구입했으나 성공적이지 않아 자신의 스튜디오에 걸어 두고 영감을 얻곤 했다. 반 고흐는 요즘으로 치면 ‘일본 덕후’였던 셈이다. 그가 사 모은 일본 목판화 중 500점 가량은 현재 반 고흐 미술관 영구 소장품으로 보존돼 있다.
반 고흐는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에 서민 계층에 유행한 목판화)에 빠져 모작도 여럿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빗 속의 다리’(1887년)다. ‘빗 속의 다리’는 일본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년)의 ‘오하시와 아타케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1857년)를 따라 그린 작품이다. 이 밖에 ‘페르 탕기의 초상’(1887년), ‘아몬드 꽃’(1890년), ‘복숭아꽃이 핀 라 크로 풍경’(1889년)에는 우키요에 같은 붓터치가 뚜렷하다. 유명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에는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를 입은 여성 그림이 배경으로 들어가 있다.
반 고흐는 우울증에서 구원 받으려는 듯 행복과 희망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노란색을 집착하다시피 많이 썼다. 수집가 기질에 한 가지에 푹 빠지는 ‘덕후력’, 일본풍 애호, 노란색 집착 등등으로 미뤄볼 때 반 고흐가 현 시대 사람이라면 포켓몬 카드가 그의 침실 구석 어딘가에서 튀어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