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롭슨 광장의 ‘스트램프(Stramp)’
뉴욕, 베니스의 보행약자 무시한 공공건축들
편집자주
지구촌 이색적인 장소와 물건의 디자인을 랜 선을 따라 한 바퀴 휙 둘러봅니다. 스폿잇(Spot it)은 같은 그림을 빨리 찾으면 이기는 카드 놀이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헤럴드경제=한지숙 기자] “이 계단은 장애인에게 너무 위험합니다. 접근성을 보장하십시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외침이 아닙니다. 복지 선진국이라는 캐나다에서, 그것도 유니버셜디자인(Universal Design;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설계), 공공디자인의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밴쿠버의 유명한 계단을 두고서 불과 4년 전에 제기된 요구입니다.
사진(위)과 영상(아래)이 밴쿠버 중심가에 있는 롭슨 광장의 바로 그 공공계단입니다.
계단을 찬찬히 살펴 보시죠. 계단의 한 가운데로 지그재그 형태로 램프(ramp·경사로)가 가로 질러 나 있는 게 보이시죠? 휠체어나 유모차, 보행 보조기가 다니는 경사로를 계단의 양 끝 구석이 아닌 한 가운데에 위치시킴으로써 장애인 등 이동약자와 비장애인이 같은 높이에서 같은 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설계했네요. 진정한 공존과 조화를 꾀한, 멋진 그림입니다.
이 계단은 캐나다 건축가 아서 에릭슨(1924~2009)이 1978~1979년에 광장을 조성할 때 만든 공간입니다. 이 계단은 계단과 램프를 섞어 배치하는 ‘스트램프(Stramp; 계단을 뜻하는 'Stairs'와 램프의 합성)’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당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벌써 40년도 더 된 디자인입니다. 한 눈에도 획기적으로 보이는 이 디자인이 실상 장애인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속사정은 뭘까요.
캐나다 공영방송 CBC의 지난 2019년 보도를 보면 밴쿠버 시는 롭슨 광장의 접근성에 관한 감사를 2010년과 2018년 두 차례 실시했습니다. 감사 결과 이 계단은 일부 시민이 이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접근성 자문가인 아놀드 챙은 계단의 경사로가 휠체어나 보행 보조기로 안전하게 다니기에는 너무 가파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챙은 또한 이 계단이 모두 같은 색깔로 이뤄져 시각장애인이 계단의 시작 지점과 중간 참, 끝 지점이 어디인지 알기 어려워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계단의 사진과 영상을 다시 보면 가운데 경사로에는 난간 조차 없습니다. 자칫 휠체어의 바퀴 방향이 틀어지거나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잘못 짚으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어 보입니다. 또한 위로 올라가는 휠체어와 아래로 내려가는 휠체어가 중간에서 만나면 오도 가도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경사로 폭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각의 지적과 감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밴쿠버시는 계단의 디자인을 변경하지 않기로 결정 했습니다. “경사로는 주로 장식용으로 여겨야하고, 여러가지 다른 방법을 통해 건물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미 롭슨 광장에는 20개의 엘리베이터가 있으며, 다양한 장애에 맞춘 사인과 보조 장치를 추가 설치하겠다는 발표로 논란이 일단락됐습니다.
이 경사로가 장식용이라니 지자체 스스로 ‘무늬만 유니버셜 디자인’이라고 인정한 꼴입니다. 대단한 뒤통수입니다(왜냐하면 구글이나 트위터 등 인터넷에서나 한국 일부 언론에서도 이 계단이 대표적인 유니버셜 디자인이라고 소개했거든요)
챙은 지자체의 개선 계획에 대해 환영하지만,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건축적 중요성을 들어 변경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변경이 문제되지 않은 건물들도 많았다”며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은 롭슨 광장 보다 역사적 중요성이 더 크지만 수년에 걸쳐서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롭슨 광장 계단은 건축가가 심미적 기준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 디자인 요구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잘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도 장애인의 시선에서 보면 무성의하거나 혹은 실패한 공공디자인의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비교적 최근 조성된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마포문화비축기지도 그런 점에선 진한 아쉬움을 남깁니다. 2017년에 선보인 마포문화비축기지는 폐산업시설인 석유탱크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서울시 도시재생의 대표 사례입니다.
매봉산 자락에 위치한 이 공간은 설계 당시 시민 이용 활성화를 위해선 접근성을 높이는 게 관건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처음 만나는 문화마당의 무대 공간만 봐도 너른 부지를 두고 휠체어를 위한 경사로를 한 구석에 처박아두다시피했습니다.
문화마당은 가족 단위 문화 행사나 난장 등이 자주 열려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즉 유모차 이용이 빈번한 장소입니다. 이 문화마당 무대에서 열리는 작은 공연이나 행사에 참여하려면 유모차나 휠체어는 수십미터를 돌아 계단의 측면으로 가야합니다. 이 곳에서 문화비축기지 내 주요 전시관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역시 한 구석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처음 설계 때부터 이동약자를 배려했다면 없었을 불편함입니다.
이게 메가시티 서울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유명 도시에서도 보행약자와 공공 건축 간에 분쟁이 발생하는 사례가 더러 있습니다.
2019년 9월에 미국 뉴욕주 퀸즈 롱아일랜드시티에 개관한 ‘헌터스 포인트(Hunters Point) 도서관’은 이동 장애자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이유로 집단 소송을 당했습니다.
비영리단체 DRA(Disability Rights Advocates·장애권리옹호자)는 이 도서관이 “이동 장애가 있는 성인과 어린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설계 건립됐다”며, 1992년 제정된 미국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을 이유로 퀸즈 자치구 공공도서관과 뉴욕시와 퀸즈 자치구 공공도서관 이사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논란이 된 건 건물 내부에 높이를 달리한 서가의 계단입니다. 모두 3단으로 이뤄진 이 서가의 측면에는 일자 형태의 계단이 있습니다. 이 계단을 오르면서 측면의 큰 창을 통해 맨하튼의 파노라마 전망을 볼 수 있다네요. 그런데 이 모든 호사(?)는 계단을 걷는 사람의 몫이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누릴 수 없는 겁니다.
DRA 측은 “(이동장애인에 대한)노골적 경멸”에 해당한다고 비난했습니다. DRA는 “장애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도서관을 탐색하고 휴식을 취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헌터스포인트 도서관은 6층 높이에 총 면적 2000㎡ 규모로, 4150만달러(약 551억원)의 예산을 들여 조성했습니다. 콘크리트 건물의 외관에 크고 불규칙한 창문을 달아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띕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건축사무소 스티븐홀아키텍츠(Steven Holl Architects)가 설계했습니다. 스티븐홀아킥테츠는 “도서관 개관 이후 3만명이 다녀갔다. 이 도서관은 공공 공간의 가치이자, 그런 공간을 방문하고 싶은 지역사회의 열망을 보여주는 증거다”고 성공을 자평했습니다.
장애인 인권 단체가 제기한 소송은 해결되지 못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물의 도시, 세계적인 관광지 이탈리아 베니스에선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유명 교량이 비슷한 이유로 장애인 인권단체가 제기한 소송에서 져 설계자가 막대한 벌금을 문 사례도 있습니다.
베니스 운하의 네번째 다리 코스티투치오네 다리(Ponte della Costituzione)입니다. 2008년에 개통한 이 교량은 강철과 유리로 만든 아치 형태의 현대적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스페인 건축가 샌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는 이 교량을 설계할 때 바닥을 유리로 깔았습니다. 관광객이 걸으면서 교량 아래의 지중해를 마음껏 감상하라는 취지였을 겁니다. 그러나 유리가 미끄러워 보행자가 다치는 사고가 잇따랐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스(NYT)의 지난해 보도를 보면 항만 노동자로 일하다 은퇴한 71세의 한 시민은 매끈한 바닥에서 넘어져 턱과 이마를 다치는 사람들을 도와준 일을 떠올리면서 “이건 다리가 아니다. 이건 함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013년에는 교량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케이블카를 달았는데, 외려 격렬한 반대 시위만 불렀습니다. 붉은 색의 둥그런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데 150만 유로(약 22억원)가 추가로 투입됐는데, 운행 속도가 너무나 느려서 한 여름에는 케이블카 내부가 견딜 수 없도록 더웠다고 합니다. 결국 케이블카는 오래지 않아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2018년에 베니스시는 50만 유로(약 7억 3000만원)를 들여 코스티투치오네 다리의 유리 바닥 일부만 돌 계단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감염병 대유행 기간에 도시 봉쇄 이후 해제되는 시민들의 표정을 담는 전국 방송 도중 이 다리에서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모습이 생중계되면서 베니스시는 다리 바닥 전체를 돌로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칼라트라바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교통허브,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주비주리(Zubizuri) 다리를 설계한 세계적으로 저명한 스타 건축가입니다. 토목과 건축을 섭렵해 활동하는 그는 가우디 이후 가장 스페인다운 건축을 추구하는 건축가란 평가를 듣습니다.
칼라트라바 프로젝트가 보행자를 골탕 먹인 건 베니스의 이 다리가 처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비주리 다리 역시 애초 바닥을 유리 타일로 시공했는데, 역시나 많은 보행자들이 미끄러져 결국 검은색 고무 카펫을 깔아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건축가의 선한 의도나 심미 추구가 실제로 구현 단계에선 시민, 특히 보행 약자의 바람을 아프게 배신하곤 합니다.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는’ 그런 역지사지의 마음은 노래 가사로나 있는 일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