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에 대한 수요가 영구적으로 파괴될 가능성도 있다.”(골드만삭스)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이 ‘본드런(연쇄적 채권매도)’으로 확산될 수 있다”(하나증권)
글로벌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CS)가 UBS에 인수되면서 금융 시스템 전반적인 리스크로 번질 뻔한 급한 불은 껐지만, 오히려 채권 시장엔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는 모양새다. 이 과정에서 일명 ‘코코본드’로 불리는 160억 스위스프랑(약 22조60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AT1)이 ‘제로(0)’로 상각된 여파로 안전자산으로 여겨졌던 채권에 대한 신뢰가 약화됐고, ‘본드런’으로 문제가 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작년 말 한파를 겪은 뒤 겨우 되살아난 국내 회사채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칠 지 관심이 집중된다.
銀 자금 조달 난이도 ↑…고위험군 회사 유동성 경색으로 전이 우려
2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CS의 코코본드 상각으로 투자자들의 경계심이 고조된 상황 속에 당장 국내 은행들은 코코본드 발행을 통한 자본 확보에 장애가 발생한 모습이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발(發) 자본적정성 강화 압박까지 더해지며 자금 조달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셈이다. 현재 4대 시중은행이 보유 중인 원화 코코본드 잔액은 4조3000억원 수준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코코본드의 금리가 오르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 속에, 롤오버(금융기관이 상환 만기에 다다른 채무의 상환을 연장해 주는 조치) 등을 고려하면 부담스러운 상황인 것은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자금 조달 비용이 올라간 은행 등이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가능성까지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고, 이는 국내 주요 사업체들의 자금 조달 비용 증가로 직결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영주 하나증권 연구원은 “은행을 통한 자금 조달 통로가 좁아진 기업들이 고금리란 불리한 조건에서도 불가피하게 회사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면서 “리스크가 극대화된 상황 속에서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 회사를 중심으로 유동성 경색 속도가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3월 채권 회전율, 통계 집계 후 최저치
CS발 코코본드 사태가 당장 국내 채권 시장에 미치는 여파는 한정적이란 평가가 아직은 우세하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전날까지 ‘AA- 등급 회사채(무보증 3년)’ 금리는 4.016%로 전일 대비 0.03%포인트 올랐다. ‘하이일드 채권(BBB급 이상 투자적격등급과 CC급 이하 투자부적격등급 중간에 위치한 BB급 이하 회사채)’에 해당하는 ‘BBB- 등급 회사채(무보증 3년)’ 금리는 10.430%로 전일 대비 0.031%포인트 소폭 상승했다.
연초(1월 2일) AA- 등급 회사채와 BBB-급 회사채 금리가 각각 5.262%, 11.201%에 이르렀던 것과 비교하면 연초부터 이어가고 있는 안정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추세를 보인 것이다.
다만, 실리콘밸리은행(SVB)·시그니처은행 파산 사태 등 미국 지방 은행들의 연이은 부실 사태로 불거진 불확실성에 연초 달아올랐던 회사채 시장이 ‘관망세’로 돌아선 듯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 CS발 코코본드 사태까지 벌어진 것은 회사채 시장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금융투자협회 통계상에서 지난 1월 회사채 발행액은 9조7400억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11.05% 증가했다. 특히, 지난달엔 13조3366억원 상당의 회사채가 발행돼 전년 동월 대비 50.06%나 규모가 늘어났다. 다만, 3월 들어선 전날까지 회사채가 총 7조5768억원 발행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든 모습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기관투자가가 자금 집행을 재개하는 ‘연초효과’가 사실상 끝나며 시장이 ‘숨 고르기’에 돌입한 영향도 있다”면서도 “분명한 것은 잇따른 금융발 리스크에 연초 보였던 투자 열기가 급격히 식고, 움츠러들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채권 회전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것도 주목할 지점이다. 3월 전체 채권 회전율은 9.87%로, 금융투자협회가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6년 11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회전율이 10%를 밑돈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 시장 전반이 얼어붙었던 작년 10월(12.06%)보다 이달에 거래가 더 부진한 것이다.
우량·비우량 회사채 간 자금 조달 양극화 극대화 전망
당장 회사채 시장에선 ‘옥석 가리기’에 따른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올해 들어 지난 16일까지 전체 회사채 발행 규모 중 신용등급이 BBB+ 이하인 비우량 회사채의 발행 규모는 3440억원으로 전체 발행량의 1.13%에 불과했다. 2021년(4.7%)과 작년(4.3%)과 비교했을 때 4분의 1 수준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특히, 회사채 시장에 훈풍이 불었던 지난 1월에도 비우량채 비중은 0.5%에 그쳤다.
오창섭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그동안 시장에서 비우량 회사채가 소화된 것도 채안펀드 등 정부 지원을 받은 측면이 크지, 시장이 정상화됐기 때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고 분석했다.
이영주 연구원은 “중앙은행과 정부의 각종 지원 대책이 나올 수 있지만, 위험자산에 대한 보장 범위는 낮을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투자 심리 회복 역시 훨씬 더딜 수밖에 없다”며 “이미 하이일드 채권과 레버리지론을 중심으로 한 벤처캐피탈(VC) 스프레드 상승세가 가파른 점은 (최악의 경우) 연쇄 부도 현상의 전조 현상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코코본드나 하이일드 채권 등 위험성이 높은 투자처에서 자금을 뺀 투자자들이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안정적이라고 평가받는 우량 회사채로 몰리는 현상은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이 연구원은 덧붙였다.
미국·유럽 금융당국이 시스템적 위기로 바뀌지 않도록 조기 개입에 나서고 있지만, 리스크가 일단 고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기까진 짧게는 수개월이 필요할 것이란 지적도 있다.
김지산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미국 5대 은행 중 하나였던 베어스턴스가 파산한 후 진정되는 듯했던 국면이 글로벌 IB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파국을 맞이한 바 있다”며 “금융 투자자들의 신용을 회복하고 불안을 달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