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물납제’ 쟁점은 가치평가
올해부터 문화재·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신하는 이른바 미술품 물납제가 시작됐다. 물납제는 국가의 문화적 부를 축적하고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꼽혀왔다. 사진은 고(故) 이건희 삼성회장이 문화재와 미술품 2만 3000여점을 기증하며 시작된 이건희 컬렉션 전시. [MMCA 제공]

내달부터 상속세가 200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 그 일부를 문화재나 미술품 등으로 물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문화재·미술품 2만 3000여점 기증이 쏘아 올린 ‘미술품 물납제’가 3년 여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1월 관련 내용이 포함된 ‘2022 세제개편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한 이후 지난 21일 ‘상속세 및 증여세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 다.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물납의 대상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역사적·학술적·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문화재 및 미술품’이다. 국세청에서 물납 평가 요청이 들어오면 문체부장관은 이를 평가해 물납을 요청한다.

문화재·미술품 물납이 부동산이나 유가증권 물납과 다른 점은 바로 이 평가 과정에 있다. 해당 물건이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가능하다. 문화재보호법상 유형문화재나 민속문화재, 등록문화재 등으로 지정된 물건이거나 회화, 판화, 조각, 공예, 서예 등 미술품이 물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물납의 조건은 우선 전체 상속세액이 2000만원을 초과해야 한다. 또 상속 재산 중 금융 재산보다 상속세가 더 커서 금융재산으로 먼저 상속세를 내고도 모자라면 물납을 신청할 수 있다. 특히 문화재·미술품 물납은 상속받은 문화재·미술품에 부과된 상속세에 한해 물납을 허용하고 있다.

佛정부, 물납 피카소 유작으로 미술관 설립

이번 시행령 개정은 문화재 등의 관리 및 활용 강화가 주요 목표다. 어마어마한 세금을 내려고 상속받은 문화재나 미술품을 시장에 내다 팔기 보다는 이를 물납 받아 국가의 문화적 부(富)를 축적하고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강화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미술품 물납제’를 잘 활용하는 나라는 바로 ‘예술의 나라’ 프랑스다. 지난 1973년 파블로 피카소의 사망 이후 유족이 막대한 상속세 납부가 어려워지자 프랑스 정부에 피카소 유작 200점을 물납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파리 마레지구에 유족이 물납한 작품으로 피카소 미술관을 설립했다. 덕분에 프랑스 국민은 물론 파리를 찾는 전 세계인이 피카소의 작품을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정부도 이처럼 수준 높은 작품을 물납받기 위해 여러 장치를 걸었다. 우선 상속세가 200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에만 물납제를 허용했다. 상속세가 2000만원이 초과되는 사망자는 한 해 사망자의 약 3% 정도다. 배우자가 있는 경우 최소 10억원, 배우자가 없는 경우 5억원의 상속공제가 적용되는 점을 고려하면 상속 재산이 배우자가 있을 시 11억 6000만원, 배우자 없을 시 6억6000만원 이상이면 상속세가 2000만원을 넘게 된다. 서울에 있는 집 한채만 물려받아도 물납제 대상이 될 수 있는 셈이다.

문제는 상속분에 금융재산과 유가증권이 있을 경우 우선 이것으로 상속세를 내도록 해 물납이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는 점이다. 또 물납의 범위 역시 상속 재산 중 문화재와 미술품에 부과된 상속세에 한해 물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대기업 일가의 상속이나 유명 작가의 작고 등 특수한 경우에만 물납제가 적용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정섭 세무회계사무소 대표 세무사는 “금융자산이 있을 때는 우선 현금 납부를 하고, 정 안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물납을 허용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며 “현실에서는 고(故) 이건희 회장 같은 자산가에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심사 논란 차단 복수 전문가가 가격 책정

미술품 물납제의 가장 큰 쟁점은 ‘심사’다. 문체부는 납세자가 1차적으로 세무서에 신고할 때 제출한 금액을 바탕으로 복수의 전문가 의견을 들어 작품 가격을 심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 위원을 구성해 가치 평가와 감정 평가를 진행할 계획이다. 심의 위원은 전문가 풀을 구성해 케이스 마다 각각 선임할 예정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부의 작품 심사에 신뢰도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나 미술품을 평가하는 기관이 민간에 3~4곳 운영하고 있지만 각 업체마다 편차가 커, 늘 신뢰성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진위 평가로 넘어가면 더 심각하다. 한 곳에서는 진작(眞作)으로 평가한 작품이 다른 곳에선 위작(僞作)으로 나오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정부의 전문가 풀에 들어갈 민간 전문가들이 사실 이 업체들 관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 업체는 상속자의 의뢰를 받아 1차적으로 세무서에 작품 가액을 신고한 후 정부가 주관하는 2차 평가에 또 들어갈 수도 있다.

문체부 담당자는 “문화재는 문화재청 위원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평가를 받고, 미술품은 심의위원을 구성해 평가할 계획인데 최대한 특정 전문가가 겹치지 않도록 최대한 배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납제 先시행 영국·프랑스 등 해외 사례

우리보다 먼저 물납제를 시행하고 있는 해외의 경우 심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거나, 아예 독립적인 전문가를 심사 위원으로 임명하고 있다.

영국은 예술위원회가 물납에 관한 전반을 책임지고 있으며, 물납 심의 주체를 공개치용하고 공시한다. 심의 위원들의 경력을 대중에 공개하고 매년 물납받은 물건에 대해 백서를 발행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심사 위원에는 전직 미술관장 및 박물관장, 대학교수, 큐레이터, 아트딜러, 경매사 대표 등이 포함된다.

프랑스의 경우는 영국처럼 위원을 공개 채용하거나 공표하진 않지만 문화부장관이 2인, 재정부장관이 2인씩 추천해 위원으로 임명한다. 위원장은 1986년부터 신경생물학자이자 미술컬렉터인 장 피에르 샹고가 맡고 있다. 이들 5인으로 구성된 물납 심의 위원회는 신청 재산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와 가격에 대해 학예사 및 전문가 의견을 청취한 후 심의 결과를 제출한다.

올 신청자 아직 ‘전무’ 빨라야 2분기

물납 신청은 올 1월 1일 상속까지 소급적용되나, 아직 신청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체부에서는 빠르면 올 2분기 이후에나 신청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보다는 미술품의 물납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문화재의 경우 그 가치가 큰 것은 대부분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있고 이들은 상속시 상속세가 유예되기 때문이다.

물납받은 물건의 경우, 현재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로 이관돼 매각 혹은 배치된다. 문화재·미술품 물납은 그 목적이 그 관리와 활용의 강화인 만큼 이와는 다르게 관리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와 기재부 담당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이한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