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갈수 없는 고금리…미술시장 현주소
시장 하강국면땐 블루칩을 선호하는데
최근 가격 너무 올라 대안이 된 ‘레드칩’
“예술세계 확립 안된 레드칩” 목소리 속
인정받은 신진작가 작품가 견조세 유지
인플레이션이 강(强)달러를 타고 전세계에 덮쳤다. 빅스텝(0.5%p)을 넘어 자이언트스텝(0.75%p)으로 올라가는 금리에 자산시장이 하강세다. 증권, 채권, 부동산, 현물 할 것 없이 긴 침묵의 시간이다. 미술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년간 세계 미술시장은 코로나19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넘쳐나는 유동성에 포트폴리오 투자형태로 작품을 구매하는 컬렉터들이 많아졌고, 작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한국시장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미술시장 조사기관인 아트프라이스가 이달 초 발표한 초현대미술 시장보고서(The Ultra Contemporary Art Market in 2022)에 따르면 한국의 현대미술 경매 거래 규모는 지난해 대비 344% 성장했다. 이에 따라 한국경매시장 규모는 미국(39%), 중국(27%), 영국(18%), 프랑스(3%)에 이어 5번째(2.4%)다. 경제규모나 인구를 따져보면 한국 시장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다.
폭발적인 성장 뒤엔 휴지기가 따른다. 이미 경매 등 2차시장에서는 하강 안정기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국내 경매시장 분기별 낙찰총액 집계 결과 올해 3분기 낙찰총액을 443억원으로 추산한다. 전년동기대비 46.8%에 불과하다. 낙찰총액은 2021년 2분기 921억원, 3분기 945억원으로 정점을 찍고 4분기 848억원에 이어 2022년 1분기 785억원, 2분기 665억원으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해외 작가 그리고 큰 폭의 가격 상승을 보였던 작품들의 거래가 위축돼 낙찰률이 70% 이하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협회는 올해 3분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총 낙찰률을 60.59%로 분석했다. 사는 사람이 적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시장 유동성과 활동성이 떨어지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시장이 하강국면이면 블루칩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진다. 가격 상승이 더디더라도 하락하지 않기에 안정적 투자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작업을 통해 미술사적 평가가 완료되어 시장에서도 확실히 자리잡은 작가들의 인기가 식지 않는 이유다. 서양현대미술 작가들 중에는 피카소,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등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작가들이 여기에 포진해 있다. 국내에서는 김환기, 이우환을 비롯한 단색화 작가들이 대표적 블루칩으로 꼽힌다.
그러나 최근 시장을 보면 이와는 상반된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른바 ‘레드칩’으로 불리는 젊은 작가들의 약진이다. 레드칩 작가는 블루칩과 반대되는 용어로 젊은(MZ세대), 시장에서 자리잡지 못한 작가 중 폭발적 가격상승을 겪은 작가를 말한다. 아트뉴스페이퍼의 기자인 스콧 레이번이 사용한 용어로, 국제미술시장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티스트를 가리킨다. 주식시장에서 중국 국가의 투자를 받은 기업을 말하는 ‘레드칩’과는 차이가 있다.
어쩌다 레드칩 아티스트들이 뜨게 된 것일까. 주된 요인은 블루칩 작가 가격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조지 콘도의 신작은 200만달러를 가볍게 넘는다. 최근 열린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에 참여한 하우저앤 워스가 들고 나온 콘도의 대형 회화는 265만달러에 팔렸다. 접근 자체가 부담스러울 정도이기에 컬렉터들은 젊고 유망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들이는 모험을 하고 있다. 시장성과 성장 잠재력이 보이는 작가들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격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오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2년 제프쿤스의 ‘마이클 잭슨과 버블’ 조각이 소더비에서 560만달러에 낙찰됐을 때, 생존작가 작업이 이렇게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 자체가 이슈가 됐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이같은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27살의 안나 웨이안트는 지난 2020년 초상화 작업 ‘서머타임’(Summertime)을 1만2000달러에 팔았으나, 2년 뒤 크리스티에서 150만달러에 거래됐다. 자데 파도주티미의 작업은 지난해 10월 100만파운드에 거래됐다. 추정가의 15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아트프라이스는 동 보고서에서 대표적인 레드칩 작가로 매튜웡(1984~2019), 에이버리 싱어(35), 크리스티나 퀄레즈(37), 플로라 유크노비치(32), 안나 웨이언트(27), 자데 파도주티미(29) 등을 꼽는다. 올해 상반기 세계 경매시장에서 40세 이하 낙찰가액 톱 10에 든 작가들이다. 흥미로운건 10명 작가 중 7명이 여성이며, 상위 50명 작가로 확대하면 21명이 여성이다. 아모아코 보아포(38)등 흑인작가의 인기도 상당하다.
경매에서의 높은 가격 낙찰을 제하고도 위 작가들은 작업적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공통적 평을 받는다. 안나 웨이언트의 경우는 밀레니얼 보티첼리로 불릴정도로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화법을 구사한다. 플로라 유크노비치는 로코코 회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자데 파도주티미는 추상표현주의 대가들의 기법을 넘어선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적극적인 소통창구로 활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작고한 매튜웡을 제하고 안나 웨이언트는 8만7000명, 플로라 유크노비치 6만 3000명, 자데 파도주티미 4만2000명이 팔로우 하고 있다. 컬렉터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들을 만나고, 또 발굴한다. 갤러리외에도 신진작가를 만날 수 있는 막강한 플랫폼이다. 이곳엔 성별도 인종도 국경도 없다. 작가 뿐만 아니라 컬렉터에게도 그렇다. 또한 이렇게 발굴한 작가가 빠르게 성장하는 경우, 투자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문제는 지속성여부다. 초현대미술시장이 부흥을 이뤘던 지난 2014년 각광받던 40세 미만 작가는 댄 콜렌(당시 35세), 아드리안 게니(37세), 타우바 아우어바흐(33세), 조 브래들리(39세), 아일리 자아(35)세 등이다. 이 중 아드리안 게니는 올 상반기 고가 낙찰 톱 10에 랭크되며 여전한 존재감을 자랑하지만 나머지는 시장에서 예전만한 파워를 지니지는 못한다. 10년도 안되는 시간 사이, 그만큼 시장 변화가 큰 것이다.
레드칩 작가에 대한 또 다른 우려는 아직 예술세계가 확립되지 않은 작가들 작업이 너무 비싼 값에 팔려 미술시장에 악영향을 미칠것이란 점이다. 플리핑(flipping·단타거래) 때문에 가격 형성이 쉽게 되고 쉽게 무너지는 것도 지적된다. 반면, 투자주기가 짧아진 것일 뿐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가격이 너무 높아진 블루칩 작가의 대안으로 접근하는 투자자들이 많아져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MZ 컬렉터들이 미술시장에 새로 진입한 것도 시장변화의 원인으로 꼽힌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간한 ‘한국 MZ세대 미술품 구매자 연구’에 따르면 한국 MZ컬렉터들 절반은 재판매 시점을 정해놓고 작품을 구매한다. 미술품을 본격적 투자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이같은 성향은 글로벌 MZ 컬렉터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관건은 결과다. 시장이 성장세든 하락세든 각광받는 작가는 늘 있어왔고, 반대로 잊혀지는 작가도 늘 존재했다. 인스타그램 등 SNS는 갤러리를 위시한 전통적 유통 플랫폼에 균열을 가져왔다. 덕분에 신진작가의 기존시장 진출 속도가 빨라졌다. 레드칩이든 블루칩이든 오래 갈 좋은 작가를 찾아야하는 건 컬렉터로서 오랜 과제다. MZ컬렉터들이 MZ작가에게 매료되는 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강 안정기 국면에 접어든 시장을 버티는 힘은 컬렉터의 안목과 뚝심에서 나온다.
이한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