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각 선구자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래서?"
1904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작업실. 한 조각가와 파리시 공무원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네?" 조각가의 말에 공무원은 당황합니다. "주문 취소라는 게 무슨 뜻인가." "선생님. 더는 작업을 안 하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수염이 덥수룩한 이 조각가는 꿍얼대며 하는 일을 이어갑니다. 그는 이미 흙먼지투성이입니다. "십수 년 전 의뢰를 없던 일로 만든 건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도 장식 미술 박물관의 건립 계획이 바뀔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괜찮아. 상관없소." "아니, 그래도…." "나는 계속 만들 거야." 공무원은 침을 꼴깍 삼킵니다.
"선생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돈을 드릴 수 없어요."
"그따위 것 바라지도 않아. 앞으로 나를 위해 이 작품을 빚을 거요. 더는 참견 마시오." "저는 계약 취소를 분명 전달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말씀하시면…." "카미유!" 조각가가 소리치자 한 여성이 다가옵니다. 흠칫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습니다. 그녀 또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스승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앞으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테니 돌아가 주세요." 목소리마저 촉촉했습니다. "아, 네…. 네." 공무원은 홀린 듯 뒤로 물러섭니다. "이 조각은 20년, 30년을 쏟아부어도 안 아까운 내 예술의 총체인걸. 드디어, 온전히 내 것이 됐군." 조각가는 외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작품을 매만집니다.
이 까칠한 조각가는 오귀스트 로댕(1840~1917)입니다.
프랑스 파리시가 주문을 번복한 조각은 대작 '지옥의 문'과 그 안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 등입니다. 근대 조각 선구자가 만든 가장 위대한 19세기 조각상으로 기록될 작품들입니다. 다행히 로댕이 보통 사람은 아닌지라, 의뢰 취소라는 폭탄을 맞고도 이 시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조각계를 위해 20년 넘게 빚어낸 덕에 후세가 감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앞 고민하는 ‘단테’였다
한 남성이 생각 중입니다.
괜히 서글프지요. 체념적입니다. 옆을 지나갈 때 숨을 죽여야 할 듯합니다. 이 남성은 쥐고 걸친 것 하나 없이 고민 중입니다. 턱을 오른팔에 괸 채 상념에 빠져 있습니다. 주먹이 입을 파고 들어갈 듯합니다. 마지막 근세포 하나조차 사색에 동원된 것 같습니다. 시인 릴케는 이 작품에 대해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있다. 모든 힘을 쏟아 사유하고 있다. 온몸이 머리가 됐고, 혈관에 흐르는 모든 피는 뇌가 됐다"고 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한 인간입니다. 신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지요. 전능한 신, 기적과 함께하는 영웅이라면 애초 이런 모습을 보일 일이 없을 겁니다. 웅장함과 장엄함은 없습니다. 외려 쪼그라들 듯한 자세 때문인지, 걱정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 남성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데요.
단테는 《신곡》의 작가이자 주인공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을 감상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작품이 있습니다. '지옥의 문'입니다. 사실 생각하는 사람은 가로 4m, 세로 6.35m, 무게 7t짜리 작품 지옥의 문의 일부입니다. 1880년, 로댕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식 미술 박물관을 짓겠으니 문을 만들어주시오!"라는 말을 듣고 만든 대작입니다. 그쯤 로댕은 《신곡》의 지옥·연옥·천국 등 3개 시리즈 중 하필 지옥 편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 박물관의 입구를 지옥의 문으로 설계하는 발칙한 짓(?)을 행한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사람은 《신곡》 속 단테가 지옥의 문을 열기 직전 오만가지 생각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겁니다.
그럴 만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바로 밑에는 지옥의 온갖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배고픔을 못 참고 자식을 잡아먹은 우골리노가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기어갑니다. 불륜 관계였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본드에 푹 담가진 듯 찰싹 붙어 있습니다. 이 밖에 200명이 넘는 서로 다른 크기의 사람들이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댑니다. 《신곡》 속 지옥의 문에는 "나 이전에 창조된 건 영원한 것뿐이니, 나 또한 영원히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위협적인 경고문도 쓰였습니다.
사람이라면 망설일 수 밖에요.
《신곡》에 등장하는 단테는 의지하는 스승이 떠났다고 펑펑 울고, 이 때문에 옛 연인에게 한 소리를 듣는 등(단테여, 베르길리우스께서 가셨다고 해서 울지 마세요. 아직은 울지 마세요. 다른 칼 때문에 그대는 마땅히 울어야 할 터이니) 인간적인 면을 한껏 갖췄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잡기 위해 저세상에 몸을 던진 적이 있는데요. 제우스의 아들,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의 영웅쯤 되니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단테가 저런 자세를 취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생각하는 사람의 원제는 '시인(詩人)'입니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라는 주장 말고 인간의 정신 속 지옥을 그린 샤를 보들레르 혹은 로댕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더 솔직하게, 더 인간적으로…조각계를 구하라!
로댕은 근대 조각의 창시자입니다.
근대 조각의 핵심은 솔직함입니다. 흔치 않은 영웅 대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인간을 모델로 들여옵니다. 그런 뒤 불완전한 인간의 상(像)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모델이 못생겼으면 못 생긴 대로, 표정과 자세가 비루하면 비루한대로 둡니다.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인체 비례 따위 상관없이 더 크게 빚습니다. '추함'을 보정 없이 쿨하게 내보입니다. 르네상스 선구자인 조토가 회화를 신의 세상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끌어내렸다면, 로댕은 조각을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잡아당겼습니다. 로댕이 그 수준이라고요? 네. 적어도 조각계에선 그 정도 급입니다.
로댕이 등장하기 전 조각 대부분은 깨뜨릴 수 없는 공식에 따라 빚어졌습니다.
모델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과 영웅, 성경 속 인물, 왕과 교황 등 권위자입니다. 꽃다운 얼굴과 8등신 몸매, 거룩한 자세를 취합니다. 고대 그리스 말기의 '밀로의 비너스(BC 2세기~BC 1세기)'는 우아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1501~1504)'는 어떤가요. 정돈된 이목구비, 균형 잡힌 몸매가 돋보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앞서 빚은 '피에타(1498~1499)'는 또 어떤지요. 성모 마리아의 외모가 눈부십니다. 아들인 그리스도만큼 젊게 연출된 점도 흥미롭습니다.
로댕의 조각과 이전 시대의 조각을 견주면요.
로댕의 조각은 살아있는 인물이 영험한 벼락을 맞고 청동상으로 굳은 듯합니다. 반면 이전 시대 조각은 치밀한 설계와 편집 끝에 만들어진 분위기를 감춤 없이 뿜습니다. 둘은 느낌도, 성격도 다릅니다. 별난 현실주의로 무장한 로댕이 이상주의가 지배하는 조각계에 새 장르를 만든 겁니다. 로댕이 없었다면 조각의 영역은 '신세계의 맛'을 못 본 채 고전의 영역에 한참 더 묶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로댕이 조각계에 남긴 업적은, 마네(1832~1883) 패거리 등 인상파 화가들이 미술계에 안긴 충격과 같다는 말이 있지요. 로댕은 조각의 땅, 인상파 화가들은 미술의 땅을 넓혔기 때문입니다. 로댕 덕에 "조각은 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고, 마네와 모네 등 인상파 무리로 인해 "그림은 예쁜 장면 없이 예쁠 수 있다!"는 말이 생명력을 얻었으니까요. 로댕은 조각계의 영역 확장을 사실상 홀로 이끌었습니다.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등 미술계에선 각자가 주연급인 한 군단이 움직였던 점과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당시 조각계에서 로댕이 독보적 혜안과 불굴의 맷집을 갖췄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댕은 조각의 구원자 역할도 합니다.
로댕이 등장하기 직전 조각계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습니다. 고대 시대부터 조각은 '건축의 일부'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미켈란젤로급 천상계 조각가의 작품이 아니면 조각 자체가 예술품으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각이 설 자리는 더 밀립니다. 19세기 들어 조각은 사치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때 로댕이 나타났습니다. 불굴의 역작을 여러 번 내놓아 대중의 관심을 끕니다. 그 결과 조각은 건축의 한 분야도, 군돈질의 사치품도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당당히 섭니다. 로댕이 죽은 후에도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조각계에 활력이 생깁니다. 때마침 로댕이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조각계는 꽤 긴 시간 어둠의 터널을 달렸을 수 있습니다.
‘칼레의 시민’ 처음 본 사람들 “영웅을 거지꼴로 만들었다”
물론 로댕도 처음부터 박수를 받은 건 아닙니다. 혁신에는 늘 고통이 따릅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1884~1885)'은 당대 논란을 부른 작품입니다. 제작에 영감을 준 일화는 이렇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칼레 지방을 점령하고 말합니다. "칼레의 시민 중 대표 6명이 나와 죽는다면 다른 시민은 살려주지." 누가 선뜻 나설까요. 웅성대던 이때 칼레 최고의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손을 듭니다. 뒤이어 칼레 시장, 법률가 등 상류층이 "함께 하겠소!"라며 따라나섭니다. 이들은 알아서 자기 목에 밧줄을 겁니다. 신발을 벗고 영국군 진지를 향합니다. 시민들은 울면서 이들을 뒤따랐다고 합니다.
로댕이 빚은 칼레의 시민을 본 이들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힘들지요. 재탄생한 칼레의 시민 중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먼 산을 보는 이가 있습니다. 머리를 쥐어뜯는 이는 "내가 왜 그랬지?"라며 후회하는 듯합니다. 세상 고뇌를 다 짊어졌습니다. 두려움의 먹구름이 짙게 깔렸습니다. 사람들은 칼레의 시민 6명이 성스럽게 빚어지길 바랐습니다. 영웅 6명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로댕은 이들을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해, 외려 그런 사람들이 초인 같은 용기를 냈다는 점을 띄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우리의 영웅들을 거지꼴로 만들었네?"라는 비판 뿐이었습니다.
로댕은 한술 더 뜹니다.
이 작품을 높은 단상 위에 두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기념 조각상은 높은 곳에 둬 우러러보는 게 '국룰'이었지만, 로댕은 보는 이가 칼레의 시민과 같은 눈높이에서 감정을 이입하길 원한 겁니다. 사람들은 이쯤 되니 로댕의 정신 상태를 의심합니다. 로댕의 요청은 당연히 '불허'였습니다. 칼레시청 앞에 두려고 한 이 작품은 리슐리외 공원까지 밀려납니다. 1.5m 높이 단상에 올려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로댕의 의도가 받아들여집니다. 1924년이 된 후에야 기념상은 시청 앞에 제자리를 찾습니다. 단상도 낮아집니다.
로댕은 그 수난을 겪고도 비슷한 일을 또 합니다.
이번엔 로댕의 '발자크(1898)'가 구설에 오릅니다. 못생겼지요. 볼품없습니다. 머리가 엉망입니다. 큰 외투를 대충 둘러 입은 것 말고는 별다른 장치도 안 보입니다. 펜을 쥐지도 않았고, 책을 읽지도 않습니다. 로댕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작가인 발자크를 야수 내지 가난한 부랑자처럼 표현했습니다. 앞서 프랑스 파리시는 로댕에게 "발자크를 최대한 멋있게 빚어달라"고 부탁했는데요. 로댕이 낑낑대며 들고 온 조각상은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로댕은 "발자크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그의 못생긴 얼굴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고 해명합니다. 발자크를 떠받들던 파리시는 이 말에 더 열을 받습니다. 로댕은 발자크를 연구하기 위해 그의 편지와 초상화, 문학 작품, 발 사이즈까지 외웠다고 억울해합니다. 하지만 파리시와 파리 문인협회는 "모욕적이야!"라며 인수하지 않습니다. 파리 시민들이 발자크를 너무나 사랑한 탓에, 이 작품은 로댕이 죽고 22년 후에야 빛을 봅니다. 한편 파리시가 로댕을 향해 제정신이냐고 타박하고 있을 때, 정작 발자크의 제자들은 "밤새 글을 쓰곤 외투를 걸친 채 창밖을 보던 스승님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데…."라며 난감해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로댕은 미켈란젤로 반열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조각가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미켈란젤로지만, 가장 유명한 조각가는 로댕이란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은 황소고집과 광기 어린 집착까지 비슷했습니다. 그런 로댕의 출발은 평범했습니다. 때로는 비루했고, 많은 순간 처절했습니다. "매 순간 치열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당신의 뜻이 기성 관념과 상반돼도 당신이 느낀 점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마세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얼마 안 돼 여러 친구가 당신에게 올 겁니다." 로댕이 남긴 이 말은 그의 생을 관통합니다.
로댕은 1840년 경찰서 말단 직원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눈 뜬 곳은 프랑스 파리의 작은 마을입니다.
로댕은 10살 무렵부터 그림에 관심을 둡니다. 그의 아버지가 "난 바보 같은 아들을 뒀다"고 말할 만큼 공부는 지지리도 못합니다. 그런 로댕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4~17살까지 파리 장식 미술학교 '프티 에콜(Petite École)'에 가게 됩니다. 찰흙 만지기에 진심으로 임한 로댕은 졸업 이후 파리 국립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입학을 목표로 둡니다. 하지만 3년 연속 폭풍 탈락합니다. 그쯤 의지하고 지낸 친누나가 25살 나이로 죽습니다. 천연두였습니다. 로댕은 생의 의지를 잃습니다. 수도원에 갑니다. 진짜 수도사가 될 요량이었습니다. 수도원장이 로댕의 예술적 잠재력을 눈치챕니다. 쫓아내듯 밀어내 사회로 돌려보냅니다.
1864년, 로댕은 심기일전해 파리 살롱전에 출사표를 냅니다.
야심차게 '코가 깨진 남자(코가 망그러진 사나이)' 조각상을 냅니다. 또 탈락합니다. "너무 생생하다. 지독하게 사실적이라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였습니다. 로댕은 이후 1870년 보불전쟁에 끌려갑니다. 얼마 안 돼 제대한 뒤 유럽 각지를 여행합니다. 로댕은 특히 1875년 이탈리아 견학에서 벼락에 맞은 듯 충격을 받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저세상급 작품을 본 겁니다. 각성한 로댕은 1878년 '청동시대' 조각상을 빚습니다. 로댕 표 현실주의 예술의 시작이자, 근대 회화의 출발점이 된 조각상입니다. 코가 깨진 남자처럼 청동시대 또한 신화, 역사, 문학 등 어떤 소재와도 연결 짓지 않았습니다. 이상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로댕이 파리로 온 뒤 만든 이 작품은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빚어졌습니다. 평론가 무리는 "이 디테일을 흙으로 빚어? 웃기고 있네. 살아있는 모델 몸에 흙을 발라 본을 떴을 테지!"라고 저격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 정부도 긴가민가합니다. 직접 진상 조사를 합니다. 로댕은 여러 수모 끝에 결백함을 보입니다. 로댕은 살롱에서 3등 상을 받습니다. 조각상은 국가가 사들입니다. 드디어 유명해집니다. "괴짜긴 한데, 실력은 진짜다!"라는 말이 돕니다.
1880년. 당시 프랑스 미술부 차관인 투르케가 로댕에게 조각상을 의뢰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장식 미술 박물관을 짓겠으니 입구를 만들어보라는 겁니다. 로댕의 지옥의 문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로댕은 이 작품을 필생의 역작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주문을 취소했는데도 조각칼을 계속 쥡니다. 마감 시한이 없어져 "오히려 좋아!"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로댕은 20년 넘게 지옥의 문을 만듭니다. 그런데도 100% 완성작을 만들지 못합니다. 디테일에 대한 광기가 폭발한 겁니다. 그 사이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 '발자크' 등도 내놓았습니다.
카미유 클로델, 로댕에 가려진 비운의 천재
로댕을 말할 때 함께 말해야 하는 이가 있는데요.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 동시대의 또 다른 천재 조각가입니다. 1883년, 로댕은 작업실에서 조각가 지망생 클로델을 처음 봅니다. 지옥의 문 작업이 한창일 때입니다. 선의의 경쟁자였던 알프레드 부셰가 파리를 떠나면서 아끼는 제자 클로델을 그에게 맡긴 겁니다. 당시 로댕은 43살, 클로델은 고작 19살이었습니다. 로댕과 클로델은 약속한 듯 연인이 됩니다. 로댕은 클로델의 빛나는 외모, 이보다도 더 눈부신 재능을 사랑했습니다. 클로델은 로댕의 까칠함,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나약하고 다정한 면을 힘껏 끌어안습니다. 로댕은 클로델을 지옥의 문 제작 조에 둡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손과 발 작업을 맡깁니다. 로댕은 칼레의 시민을 빚을 때도 카미유를 조수로 데려갑니다. 로댕은 어느 날 감정이 차올라 클로델에게 "생기가 사라졌던 내가 기쁨의 불꽃을 피우며 타올랐다. 오직 너로 인해서였다"고 고백도 합니다. 로댕과 클로델은 종종 서로를 '나의 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비극으로 끝맺습니다.
로댕과 사랑을 속삭이며 그의 일을 도운 지 10년, 클로델은 문득 뒤를 돌아봅니다. 어릴 적엔 "세상 모든 남자 조각가가 너를 질투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요. 로댕 비위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자기 이름을 내걸고 만든 작품도 얼마 없습니다. 로댕에 대한 애정은 점차 애증으로 바뀝니다. 이기적인 로댕은 그런 클로델을 더 불안하게 합니다. 사실 로댕은 클로델을 만나기 전부터 사실혼 관계의 연인이 있었습니다. 로댕의 무명 시절부터 함께 한 재봉사 로즈 뵈레입니다. 로댕과 클로델은 뵈레 때문에 싸우는 일이 잦아집니다. 로댕은 클로델에게 "뵈레와 끝내겠다"며 각서도 썼지만 결국 그뿐이었습니다. "어쩌면 로댕이 내 재능뿐 아니라 내 인생까지 먹어 치운 게 아닐까…."라며 자조했습니다.
이쯤 일이 터집니다.
참고 참던 뵈레(뵈레는 로댕과 클로델의 관계를 진작부터 눈치 챘음)가 클로델을 찾아와 죽일 듯 머리채를 잡습니다. 클로델의 조각상은 던집니다. 클로델은 질려버립니다. 사람들을 모아 "나는 로댕의 아이를 뱄다. 그런데, 내 뜻과 무관하게 유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로댕은 거짓말이라며 부인합니다. 이렇게 둘은 갈라집니다. 클로델은 이후 "로댕이 내 영감을 훔쳤다"고 중얼대며 거리를 헤맵니다. 자신의 몇 안 되는 작품을 두고 "로댕이 이마저도 곧 훔쳐 갈 거야!"라며 마구 부숩니다. 1913년, 클로델은 결국 정신병원으로 갑니다. 클로델은 차가운 쇠침대에서 30년이나 살다가 쓸쓸하게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로댕은요.
로댕은 클로델과 헤어진 후에도 잘 나갑니다. 온갖 논란을 다 딛고 승승장구합니다. 클로델이 정신병원에 갈 때쯤에는 프랑스의 살아있는 국보 취급을 받았습니다. 로댕은 1864년에 만난 뵈레와 1917년이 돼서야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 클로델과 그 난리를 피운 다음에도 영국 출신의 화가 그웬 존, 일본에서 온 무용수 하나코 등과 바람을 피운 후였습니다. 로댕과 뵈레의 결혼식에 온 사람들은 뵈레가 그간 수모와 헌신을 인제야 보상받는다고 수군댔습니다. 하지만 꿈을 이룬 뵈레는 결혼한 후 2주일 만에 죽습니다. 로댕은 죄책감에 몸부림칩니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합니다. 로댕을 둘러싸던 보호 마법이 풀린 듯 온갖 병과 함께 치매도 찾아옵니다. 로댕은 결국 뵈레가 죽은 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최후였습니다. "나는 신이다." 유언은 이 한마디였습니다.
〈참고 자료〉
「신곡 : 지옥 편」, 단테 알리기에리, 박상진 옮김, 민음사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1)“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2)‘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3)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4)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5)‘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6)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7)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8)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심화편 (2022. 9. 3.)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야수주의·입체주의 심화 편 (2022. 9. 10.)
21)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2)“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3)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행위예술 대모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