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잠시 바람을 쐽니다. 의자를 밀어넣고 밖으로 갑니다. 글과 그림으로 다룬 미술사의 '현장'으로 직접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떠오른 화가와 그림,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곳의 분위기를 담은 사진도 함께 보냅니다. 현장의 공기와 함께 부치는 '미술 편지'입니다.
〈지베르니 동행자 : 클로드 모네, 알리스 등 그의 가족〉
[헤럴드경제(지베르니)=이원율 기자]눈 뜨니 모네(1840~1926)의 세계였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묵묵하게 서 있었다. 흩뿌려진 형형색색 꽃과 잎이 들썩였다. 건초 더미가 기분 좋게 살랑였다. 수련이 연못 위를 두둥실 떠다니고, 일본식 다리가 그 위에서 반짝였다. 해가 뜨거웠다. 오늘만큼은 해가 뜨거워서 되레 고마웠다. 어디든 코만 살짝 대도 오만가지 꽃향기가 느껴졌다. 오동통한 벌이 주책맞게 붕붕 댔다. 검지손가락만 한 도마뱀이 슬금슬금 뒤를 밟았다.
모네는 이곳 지베르니를 유명하게 한 주인공이다.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지베르니는 모네가 가꾼 이 정원 덕에 여행자, 특히 미술에 관심 있는 이라면 꼭 가야 할 '버킷리스트'가 됐다. 파리 근교 동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을 때도 꼭 언급되는 마을이다.
정원 입구 쪽 좁은 매표소를 통해 들어왔다.
자연이 만든 팔레트였다. 원색의 꽃, 녹색 수림에 깔린 길 대부분은 두 사람이 겨우 갈 수 있을 만큼 좁다. 길눈이 어두우면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대칭과 기하학이 딱 맞아떨어지는 왕실 정원과는 동떨어진 세상이다. 여행객은 또 다른 정취를 안겨주는 정원을 만끽했다. 정원 곳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꺼내 즐겼다. 온통 꽃이어서일까. 서로가 사진기를 든 채 부딪혀도 다들 활짝 웃었다.
‘전원 생활’ 버킷리스트, 지베르니서 이루다
모네는 1883년 지베르니로 왔다. 43세였다.
계기는 단순했다. 젊은 시절 모네는 우연히 기차 차창으로 지베르니를 봤다. 포플러와 버드나무가 일렁였다. 엡트강이 센강으로 유유히 흘렀다. 언덕 위 마을은 동화 그 자체였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그의 입장에선 환장할 만큼 예쁜 분홍집도 보였다. 그때 모네는 "이 다음에 큰돈을 벌면 지베르니로 와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예고없이 맞닥뜨린 그 풍경을 가슴으로 품었었다.
이삿짐을 싸 들고 온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평생 꿈을 이뤘다.
전원 생활이다. 모네는 지베르니 집(그 분홍 집에 들어왔다!)에 딸린 마당을 정원으로 꾸몄다. 꽃이 사계절 내내 피도록 설계했다. 봄꽃 옆에 여름꽃, 뒤에 가을꽃을 심는 식이었다. 새벽 공기를 맞으며 피는 꽃, 오후 햇살 아래 피는 꽃, 저녁노을 품에 피는 꽃도 구분해 식재했다. 데이지와 양귀비, 장미와 코스모스, 언뜻 봐선 뭔지도 모를 귀한 품종의 꽃이 뿌리를 내렸다. 1893년에는 근처 땅을 더 사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그 안에 수련과 아이리스 등 수생식물을 심었다. 연못 위로 일본풍 아치형 다리도 놓았다. 밀짚모자를 쓴 모네가 펑퍼짐한 작업복을 입고 종일 땅을 파는 건 그 시절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모네는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두 가지가 그림과 정원 손질"이라고 했다. 친한 이들에겐 "나를 정원사로 불러 다오!"라고 부탁했다.
모네는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다. 평생 이어온 빛과 그림에 대한 탐구만큼 매달렸다.
원래 모네는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지베르니에 왔었다. 그의 바람과 달리 큰돈을 벌지 못한 채 왔기 때문이다. 주머니도 텅 비었는데 괜히 무리했나 싶었다. 그런 모네는 운이 좋았다. 1880년대 중후반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인상주의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불었다. 모네는 인상주의 선구자에 속한다. 그의 인기가 급격히 치솟았다. 자고 일어나보니 스타 반열에 올랐다. 드문드문 팔린 그림이 불티나게 거래돼 돈을 쓸어 담았다. 모네는 정원사 등 하인도 여섯 명이나 들일 수 있었다. 과거 모네는 생을 관두려고 파리 센강에 몸을 던진 적이 있다. 빈털터리의 삶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신의 은총급 변화였다.
그 시절 동네 주민들은 갑자기 나타나 정원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허여멀건한 '화가 양반'을 놓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아침에는 저기 서서 그림을 그리고, 점심에는 온 가족 데리고 피크닉, 저녁에는 삽을 들고 나와 땅을 파헤치고 있네? 고요한 동네에서 이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분명 처음에는 비루해 보이던 이 사람이 어느새 부자가 돼 있는 일도 흥밋거리였다. 그러던 중 동네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모네가 유명해진 후부터 세계 각지에서 화가들이 찾아왔다. 모네를 보기 위해 떼거리로 몰려 그의 집 주변을 서성였다. 모네의 그림 장면을 찾겠다며 눈이 벌게진 채 돌아다니는 이도 보였다. 아예 "나도 모네처럼 살래!"라며 근처 빈집을 수소문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조용하던 마을은 갑자기 드라마 촬영지가 된 듯했다.
이런 가운데, 동네 주민들이 쉬쉬하며 떠들던 주제는 따로 있었다.
모네와 함께 사는 여인 알리스가 그의 정식 아내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모네의 아이는 두 명뿐, 나머지 여섯 명은 그의 아이 또한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당시 알리스와 그녀의 딸들은 수시로 정원으로 나와 정성껏 꽃을 가꿨다. 가끔은 양산을 든 채 흰 원피스 차림으로 등장해 모네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줬다. 언뜻 봐선 수상할 일 없는, 헌신적이며 해사한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떠도는 말은 진짜였다.
사연은 복잡했다. 지베르니에 오기 전, 모네는 일곱 살 연하인 카미유와 결혼해 아이 둘을 가졌다. 이때 모네를 후원한 이가 에르네스트·알리스 부부였다. 원래는 각자 짝이 있었던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요즘으로 치면 백화점 재벌이었는데, 사업이 잘못돼 파산했다. 에르네스트는 알리스와 아이 여섯을 남긴 채 잠적했다. 이후 상황이 묘해졌다. 어쩌다 보니 모네·카미유 부부와 그들 사이의 아이 둘, 남편을 잃은 알리스와 아이 여섯이 한 지붕 아래 생활했다. 얼마 안 가 카미유가 죽었다. 이제 모네와 알리스, 아이 여덟 명이 남았다. 이들은 그냥 그렇게 살았다. 모네가 지베르니로 올 때도 모두가 물 흐르듯 우르르 왔다. 모네와 알리스는 에르네스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했다.
‘수련’은 내 운명, 작품 250점 남겼다
모네의 정원 세계 중 압권은 수련이다.
이날 둘러본 연못 위 수련은 풀벌레의 징검다리 내지 소금쟁이의 보금자리가 돼주는 듯했다. 수련은 연못 주위를 둘러싸는 야생화, 대나무 숲과도 짜 맞춘 듯 어울렸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연못을 다각도로 보는 동안 '정말 그림 같다!'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연못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에 초록빛의 일본식 아치형 다리가 놓여있다.
조롱박 모양으로 폭이 좁아지는 지점이다. 일본 등 동양 문화를 좋아한 모네가 직접 깔아둔 것이다. 모네의 정원 중 가장 붐비는 곳이다. 여행객은 이 다리에 기대 가본 적도 없는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다. 인증 명소가 된 이 다리에선 웃음소리와 카메라 셔터음이 흘러넘쳤다.
모네는 다리 근처에서 수련 그리기를 즐겼다.
틈만 나면 화구를 바리바리 챙겨왔다. 그가 지베르니로 온 뒤 남긴 수련 작품만 250여점이다. 모네가 수련에 매달린 데는 이유가 있다. 광기 어린 집착. 평생을 따라온 이 버릇 때문이다. 모네는 대체로 신사적이었지만, 그림 대상으로 하나에 꽂히면 병적으로 파고 들었다. 어제 그렸고, 오늘 그리고, 내일 그릴 것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그렸고 아침, 점심, 저녁에 그렸다. 기분이 좋을 때 그렸고 기분이 나쁠 때 그렸다. 어떨 때는 아플 때도 그려야 한다며 열이 펄펄 끓는데도 화구를 챙겨 나갔다.
모네는 그렇게 그리면서 대상과 이 대상을 비추는 빛의 본질을 연구했다.
수련에 꽂히기 15년쯤 전에는 파리 생 라자르 역에 꽂혔다. 젊은 시절 혈기 왕성한 모네가 뭐라도 되는 양 생 라자르역장을 찾아 "그림을 그릴 테니 모든 기차를 플랫폼에 세우시오. 연기와 수증기를 내뿜게 시키시오!"라고 부탁한 일은 유명한 이야기다. 모네는 건초 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에도 꽂힌 적이 있었다.
수련에 푹 빠진 모네는 스스로도 1893년 지베르니 정원에 연못을 파 꽃과 잎을 띄운 일을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모네는 그 해 이후 죽을 때 수련에 매달렸다. 무려 30여년이다. 수련을 그리는 건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자 숙명이었다. 모네는 "색은 종일 나를 집착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그리고 고통스럽게 한다"고 했다. 수련의 인상은 매 순간 새로웠다. 여문 꽃이 활짝 피고 지는 일, 잎과 잎 사이 간격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일, 개구리와 풀벌레가 쉬다 가는 일 모두 다채로운 변수였다. 축 늘어진 버드나무 잎이 함께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대나무가 파랬다가 노랬다가, 일본식 다리가 반짝였다가 흐려졌다가 하는 일 모두 자연의 짓궂은 장난 같았다.
수련이 떠 있는 연못은 어떠한가.
연못 물에 비친 세상은 또 다른 우주였다. 혼신의 힘을 담아 그려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계속 매달리다 보면 정복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나는 어려울걸?'이라며 수련과 그 주변 모든 게 모네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모네는 언젠가 이를 놓고 "아직도 나는 날마다 새롭게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한다"고 했다.
작업실도 ‘그림’처럼…벽지·타일도 직접 골랐다
모네의 정원 한쪽에는 모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2층짜리 저택을 찾을 수 있다.
분홍빛의 이 건물은 당시 모네의 집 겸 작업공간이다. 세계문학전집 삽화로 볼 수 있을 법한 이 건물은 분홍 벽면에 녹색 창틀, 계단이 어우러져 있다. 방마다 큰 창문이 달려있다. 그 사이로 담쟁이넝쿨이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제법 큰 위용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저 정원의 한 조각인 양 스쳐 지나갈 법했다. 그만큼 풍경에 녹아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이곳은 방 10개짜리 모네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 모네의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빛이 흰 도화지처럼 내리깔린 이 큰 방에서 모네는 그림을 구상하고 밖에서 그린 작품을 손질했다. 한쪽 벽면에는 모네의 그림들이 말려지고 있는 양 걸려있다. 그 시절에는 생생한 진품이었겠지만 지금은 모두 복제품이다. 2층은 온통 14~19세기 일본에서 유행하던 풍속화 우키요에 (浮世繪)일색이다. 모네는 동양 문화를 좋아했다. 특히 우키요에 수집에 온 힘을 다했다. 이를 전시할 수 있는 특별 공간을 찾을 정도였다. 우키요에풍 배경에 첫 아내 카미유를 세운 뒤 기모노를 입혀 그림을 그린 적도 있다. 모네는 가끔 이 집으로 일본 귀족을 초대해 직접 대접했다.
모네에게 '그림은 현장에서 그린다'는 철칙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네도 가끔은 이 집에서 볕 잘 드는 방을 골라잡아 창문을 활짝 열고 꽃과 나무를 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눈이 시릴 만큼 예뻤기 때문이다. 한 여행객 무리는 창문이 보일 때마다 밖을 내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새로운 창문 속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본 양 기뻐했다. 모네의 집을 돌다 보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물던 고흐(1853~1890)의 2평(약 6㎡)짜리 단칸방이 떠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눈부신 재능을 안고 태어난 두 화가의 운명은 이렇게나 엇갈렸다. 때때로 신은 잔인하리만큼 가혹하다.
모네는 이 집의 벽지와 타일 하나조차 직접 골라 꾸몄다.
가구를 고를 때는 안목 있는 알리스가 도왔다고 한다. 모네의 정원과 집을 관리하는 '모네 재단(Foundation Claude Monet)'도 그만큼 섬세해서, 이곳을 보수할 때 모네가 골랐던 벽지와 타일을 똑같은 회사에서 가져왔다. 타일은 그사이 제조사가 문을 닫았는데, 모네 재단의 성화로 인해 다시 문을 열게 됐다. 집념이 다시 불러낸 타일은 근처 기념품샵에서 여행객도 살 수 있을 만큼 안정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아무튼, 그 화가의 그 팬답다.
불행은 왜 항상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모네가 이곳 지베르니에서 보낸 모든 순간이 '힐링 드라마'였던 건 아니었다.
1912년 7월 모네의 양쪽 눈에서 백내장이 발견된다. 지베르니로 오고 근 20년 후다. 사실 모네의 병은 예고된 일이었다. 붓을 든 첫 순간부터 홀린 듯 빛만 쳐다보지 않았는가. 그의 눈도 한계였다. 하지만 모네는 의사의 수술 권유를 거절했다. 실패의 두려움 탓이었다. 모네의 1920~1922년 작품 '일본식 다리'를 보면 백내장 증상이 절정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붉은빛이 난무하고 있다. 정원이 불구덩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 백내장이 청색광을 막아 나타난 현상이다. 모네는 1920년께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이제 실제 관찰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인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려"라고 고백했다. 1922년에는 "침침해. 하늘이 누렇게 보여. 모든 곳에 안개가 낀 것 같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나는 별로 행복하지 못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모네는 백내장과 화해한다.
모네는 백내장 속 풍경까지 예술로 승화하는 경지에 오른다. 따지고 보면 백내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눈앞은 오직 그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남은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장면이었다. 모네는 집요하게 절망을 벗겨냈다. 그 안에서 끈질기게 희망의 씨앗을 찾아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모네의 그림을 보고 "초점 나간 그림"이라고 조롱했다. 그런데, 모네의 그림은 처음부터 초점이 맞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청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욕을 먹고, "한심한 인상주의자들!"이라는 조롱을 받은 것이었다. 모네와 그의 주변인이 겪는 타격감은 '제로'였던 까닭이다. 그 툴툴대길 좋아하는 세잔은 비판받는 모네를 놓고 "저 인간 자체가 하나의 카메라 렌즈야.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야"라고 호평했다.
물론 백내장의 늪에서 해탈하기까지는 고행의 길이었다.
버티고 버티던 모네도 결국 수술을 받았다. 1922년 말부터 1923년까지 파리의 안과에서 3차례 수술대에 올랐다. 백내장의 증상도 고통이었지만, 부작용이 찾아왔을 때는 참혹했다. 수술 뒤 때때로 모든 게 파랗게 보이고, 또 가끔은 모든 게 노랗게 보이는 청시증과 황시증을 얻은 것이다. 절망에 빠진 모네는 의사에게 "당신 때문이야!"라는 식의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수술은 안 할 수도 없었다. 수술 직전 그의 왼쪽 시력은 10%만 남은 상태였고, 오른쪽 눈은 실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약해진 모네에게 가족과 친구의 격려가 없었다면 그대로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백내장 이상의 악몽도 겪었다.
1911년 두 번째 부인 알리스가 영영 눈을 감았다. 1879년 첫 부인 카미유가 죽은 지 32년 만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인 1914년에는 지병을 앓던 맏아들 장이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둘째 아들 미셸과 알리스의 아들 장 피에르를 전쟁터에 보내야 했다. 욕 말고는 먹을 게 없던 비루한 시절을 함께 한 동료 화가들의 죽음 소식도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서 함께 싸구려 술을 퍼마시던 드가가 1917년 9월에 죽었다. 당시 드가도 거의 실명 상태였다. 단짝 친구였던 르누아르도 1919년 12월에 사망했다. 모네는 슬픔이 짙어졌을 때는 그 좋아한 정원 일도 잊고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의붓딸인 블랑슈가 모네를 참을성 있게 보살폈다. 때론 직접 화구를 챙겨 모네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모네의 신전’ 오랑주리…“인상주의의 시스티나 성당”
눈을 뜨고 보니 이번에도 모네의 세계였다.
수련 그림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지베르니를 보고 난 뒤 다음 날 찾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그림 수련을 보러온 전 세계 사람들로 가득했다. 긴 시간 의자에 편히 앉아 명상하듯 작품을 즐기는 이도 다수였다. 1층에 두 개의 큰 타원형 방이 있다. 흰 벽지를 바른 모든 곳이 모네가 그린 수련 8점으로 덮여있다. 높이 2m의 이 작품 8점을 모두 붙이면 폭이 91m가 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그림 앞에 서면 모네에게 저절로 묻고 싶어진다. 당시 노쇠했던 모네가 신의 손을 빌려 그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웅장하고 처절하다. 이 방을 본 화가 앙드레 마송은 "인상주의의 시스티나 성당"이라는 헌사를 바쳤다. 모네의 수련은 한 편의 드라마다. 모네의 웃음, 슬픔, 즐거움, 괴로움, 설렘, 절망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섬세한 붓 터치를 보다 보니 지베르니 연못 위 가지런히 놓인 수련의 기억이 밀려왔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에 의한, 모네를 위한 신전 같은 곳이다.
1918년 11월 12일. 모네는 클레망소 당시 프랑스 총리에게 "전쟁 기간 죽은 넋을 위로하고, 평화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 그림 수련을 기증할까 하오"라고 편지를 썼다. 휴전 조약 발효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클레망소는 고마움을 표했다. 모네와 클레망소는 젊은 시절부터 막역한 친구였다.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에 풀썩 앉아 작업에 속도를 냈다. 눈의 침침함도 잊고, 가족사의 비극도 덮어뒀다. 이쯤 모네는 지인과 만나면 ‘눈이 더 불편해져도 상관없다’는 뜻을 비쳤다고 한다. 그는 이게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모네는 클레망소에게 자기 뜻을 전하기 20여년 전부터 자신의 최후작으로 '압도적으로 큰 수련 그림이 벽 전체를 감싸는 방'을 꿈꿔왔다.
클레망소는 그사이 전시 공간을 물색했다.
클레망소는 고심 끝에 오랑주리를 골랐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로댕 미술관이 물망에 올랐을 때였다. 오랑주리는 원래 튈르리 궁전의 오렌지 나무 온실로 쓰였다. 병사들의 침실, 병기 창고로도 활용됐다. 그렇게만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었다.
이날 오랑주리 미술관 내 수련이 걸린 두 방은 자연광으로 넘실댔다.
둥근 천장에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자연의 빛을 두른 수련은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모네는 클레망소에게 "작품을 시민에게 공개하고, 장식 없는 흰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게 하고, 무엇보다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클레망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망소는 건축가 카미유 르페브르에게 오랑주리 미술관의 공사를 맡겼는데, 이때도 모네와의 약속을 거듭 상기시켰다고 한다.
1927년. 오랑주리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개관식 날 클레망소가 참석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음울했다. 모네가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네는 개관 5개월 전인 1926년 12월에 사망했다. 죽기 1년 전까지 화혼을 품었지만, 정작 '피날레'는 보지 못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개관 직후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한 점도 흥미롭다. 그 시절 사람들은 추상주의, 입체주의 등 '아방가르드'의 매력에 홀려 있었다. 이곳이 주목받게 된 시기는 20세기 후반이다. 지금은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미술관 중 한 곳이다. 모네와 오랑주리 미술관은 '마침내'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지베르니 정원프랑스의 국립 기념관 중 하나. 모네가 43년간 작품 활동을 한 곳이다. 파리에서 70㎞ 떨어져 있다. 대나무, 등나무, 벚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와 철쭉과, 작약과 식물 등을 볼 수 있다. 모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수련과 일본식 다리도 있다. 둘째 아들 미셸이 모네 사후 상속 받았다. 미셸이 사고로 죽은 뒤 미국 부호들과 모네의 팬들이 기금을 조성해 관리를 이어왔다. 파리에서 차로 약 1시간 10분이다. 방문은 낮 추천.
오랑주리 미술관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미술관. 오랑주리는 '오렌지 온실'이라는 뜻을 갖는다. 모네의 수련 연작 외에 세잔,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마티스, 피카소, 루소 등 작품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다른 미술관과 견줘 규모는 작은 편에 속하지만 유명한 작품이 많아 '알짜 미술관'으로 꼽히기도 한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7)“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8)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9)“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0)‘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1)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2)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3)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4)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5)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심화편 (2022. 9. 3.)
16)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17)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야수주의·입체주의 심화 편 (2022. 9. 10.)
18)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19)“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0)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행위예술 대모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