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선구자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일부 확대), 1885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1884년 12월. 그 남자는 자주 울었다. 가끔은 옆 사람도 겨우 알아차릴 만큼 낮은 소리로 울먹였다. 때로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꺽꺽 소리 내 흐느꼈다. 언젠가는 손에 쥔 붓을 내던진 채 온몸을 들썩이며 훌쩍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가 두른 앞치마를 꽉 쥐었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원래 상처가 많을수록 울 일도 많은 법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지,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 남자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 건 이주일쯤 전 오후였다. 그는 대뜸 아빠에게 전할 말이 있노라고 했다. 깡마른 그는 지쳐 보였다. 쫓기는 듯 불안해 보였다. 붉은 머리에는 기름기가 가득했다. 수염은 제멋대로 나는 잡초처럼 지저분했다. 그는 문이 열리자 고개를 푹 숙인 뒤 엉거주춤하게 들어왔다. 그때 먼지와 갈대, 노을 냄새 비슷한 게 함께 찾아왔다. 그가 벗어놓은 신발은 힘없이 픽 쓰러졌다. 부모님은 그 남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화구(畫具)를 든 채 이 동네 논밭을 온종일 헤매며 다니는 그 자라고 엄마는 내게 귀띔했다.

그 남자는 우리 가족을 제대로 본 첫 날부터 울었다. 우리 가족이 동그랗게 모여 감자를 먹는 걸 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루트 씨, 제발…." 그는 큰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며 아빠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당신들을 그리게 해주시오." 울음을 끅끅 삼켜대며 내는 소리였다. 아빠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무뚝뚝한 아빠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는 그날부터 우리를 그렸다. 온종일 그렸다. 가족을 따로 그리기도 했고, 가족을 한데 모아 그리기도 했다. 40장, 50장…. 연습용 스케치가 쌓였다.

그 남자는 그림을 그리다가 계속 울었다. 특히 우리 가족의 손을 그릴 때는 틀림없이 울었다. 노랗다 못해 누레진 할머니의 손, 나무껍질처럼 픽픽 갈라진 아빠의 손, 흙먼지가 스며든 엄마의 손, 손톱 아래 때가 잔뜩 낀 언니와 내 손을 볼 때마다 그의 목울대는 늘 뜨거워졌다.

그 남자는 격정적이었다. 때로는 안방에서 뛰쳐나가 우리 집을 통째로 그리기도 했다. 비가 오면 그의 옆에서 우산을 씌워줘야 했다. 그 남자는 그렇게 몇 달 간 우리 집을 들락날락했다. 우리 가족은 인내심이 많았다. 아빠는 종종 그 남자가 삶에 익숙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그는 슬픈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 남자가 점점 더 안타까워졌다.

그 남자는 주로 빵과 치즈를 먹고 우유를 마셨다. 때로는 가슴 품에 구깃구깃한 편지지가 가득했다. 파이프 담배를 늘 달고 다녔다. 붓질을 하다가도 땅거미가 지면 반드시 밤하늘을 쳐다봤다. "가끔 보면 별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아." 언젠가 그는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삶에 서툴기만 했던 그 남자. 이 사람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였습니다. 고흐는 이같이 긴 작업 끝에 그루트 가족을 모델로 한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했습니다. 이는 고흐가 낳은 첫 걸작이자 표현주의의 탄생을 예고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노동자의 혼을 담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석유램프 불빛 밑에 다섯 식구가 모였습니다. 시어머니, 남편과 아내, 그리고 두 딸 같습니다. 낡은 나무 탁자에는 찐 감자와 차가 차려졌습니다. 서로에게 주어진 고된 일을 끝낸 뒤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식사는 막 놓였는지 감자에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음식 앞 사람들은 모두 지쳐 보입니다. 호롱불의 빛이 약한 탓에 그림 속 명암이 뚜렷이 구분됩니다. 붓질이 거칠고 두꺼워서인지 공간 속 분위기는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입니다.

이 그림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가족의 손입니다. 거칠고 마디마디마다 울퉁불퉁한 이들의 손은 꺾이고 스러진 많은 사연을 품은 듯합니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민 손,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려고 했어. 그 손은 말이야. 손으로 하는 노동, 정직히 일해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어."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느라 여념 없어. 두상 채색화 습작을 또 몇 점 그렸어. 특별히 손들의 모습이 많이 변했어. 무엇보다 그림 안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고흐가 작업 중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쓴 편지를 봐도 그가 얼마나 이들의 손에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지요.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일부 확대), 1885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일부 확대), 1885

볼이 푹 파인 남편은 초점을 잃은 채 기계적으로 감자를 집습니다. 아내도 꿈과 희망은 오래 전 잊은 양 생기 없는 표정으로 차를 따릅니다. 감자의 퍽퍽함, 삶의 팍팍함을 차로 달래려는 듯 찻잔에 한가득 채웁니다.

시어머니에게선 식욕을 달래려는 단순한 욕구만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나마 언니가 생명력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엄마의 길과 비슷한 길을 걸을 듯합니다. 이미 엄마의 옷차림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동생은 등을 돌린 상태입니다. 체구가 작고, 입은 옷이 그리 깨끗하지 않다는 점 등은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얼추 짐작이 갑니다.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선해 보입니다. 특히 이들의 눈망울은 깊고 맑은, 순하디순한 소의 눈을 닮았습니다. 이들은 삶의 허영심이 한 톨도 끼어들지 못한 가난한 밥상 위에서 감자를 성실히 먹을 겁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속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확신하기 전까지는 이 그림을 너에게 보내지 않겠어. 진전되고 있어. 지금껏 네가 본 내 그림과는 아주 다른 무언가가 있어. 그 점은 분명해."

고흐는 테오에게 이런 편지도 씁니다. 만약 고흐가 돌아올 수 있다면, 그는 이 그림을 놓고 "내 인생을 바꾼 그림이었다"고 분명 말할 겁니다.

표현주의? 인상주의랑 뭐가 달라

사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정말 잘 그렸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기괴합니다. 공간의 색채는 칙칙합니다. 분위기는 비루하고 암울합니다. "진짜 저렇게 생긴 사람들이 있기는 해? 진짜 저렇게 초라한 곳도 있기는 하고?"라는 의문도 들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애초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보다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 표현주의를 일깨웁니다. 이는 쉽게 말해 사실주의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리는 기법입니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흐는 사실주의 기법의 대표 화가인 밀레를 좋아했습니다. 밀레처럼 농촌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소외당하는 농부와 광부를 보여주고자 이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는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따라왔습니다. 고흐는 많은 이가 밀레의 그림을 보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야, 저 농민들 좀 봐. 평화롭고 좋잖아?" "저 사람들은 도시에선 못 볼 절경 속에서 살고 있었구먼?" 등의 말이 돌고 있었던 겁니다. 고흐는 "어? 그게 아닌데…"라며 당황했습니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고흐는 고민합니다. 그는 피사체의 겉모습보다 그 안에 담긴 을 표현하기로 해봅니다. 그 결과 "그림은 숭고해야 한다"며 19세기 초 유럽 전역에 퍼진 낭만주의, "그림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며 19세기 초·중반에 등장한 사실주의, "그림은 빛과 함께해야 한다"며 뒤이어 나타난 인상주의에 이어 "그림에는 정신이 담겨야 한다"는 표현주의의 땅을 개척한 겁니다.

이는 위대한 한 걸음입니다. 고흐는 사실 그 이상의 진실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피사체를 과장하고 변형했습니다. 선, 형태, 색채도 마음대로 왜곡했습니다. 인상주의처럼 "빛 때문에…"라는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껴서, 내가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서'가 이유였습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사람처럼 그려야지"라는 틀을 깨버린 겁니다. 미술 화풍이 또다시 신(新)항로로 나설 수 있도록 닻을 힘껏 올려버린 셈입니다.

예컨대 모델로 선 이에게 깊은 우울감을 느낀다면, 그 사람이 설령 웃고 있다고 해도 슬픈 사람처럼 그리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는 게 이유입니다. 모델의 눈매가 유독 슬퍼 보인다면 그의 생김새와 상관없이 그 눈이 과장돼 표현될 가능성이 큽니다. 15세기 르네상스 정신은 '신이 아닌 인간'입니다. 고흐가 일깨운 표현주의 정신은 '인간보다 더 와닿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완성하기 위해…이렇게까지도 했다

"내가 나를 농민 화가라고 하는 이유?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야. 농민들을 그리면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아. 광부들, 직조공, 농민들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게 헛되지 않았다고 봐. 농민들의 삶을 종일 지켜보면 다른 어떤 일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 빠져들게 돼."

고흐, 테오에게 쓴 편지 중 일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표현주의적 관점으로 다시 봅니다.

1884년,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리려고 한 그 해에 그는 때마침 사실주의의 딜레마를 마주한 뒤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루트 가족의 절절한 모습을 봅니다. "그래. 그림이 잘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없이 이들의 혼을 듬뿍 담아보자"라고 다짐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Head of a Young Peasant with a Peaked Cap
빈센트 반 고흐, Head of a Peasant Woman with White Cap

고흐는 이들의 마음까지 그려내기 위해 가족을 한 명씩 떼어내 따로 여러 차례 그렸습니다. 근처 주민들도 연습 모델로 데려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애환을 직접 느꼈습니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Still Life with Copper Coffeepot and Two White Bowls

감자에 커피 주전자도 따로 그렸습니다. 심지어 그림에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 그루트 가족의 집도 화폭에 담아봤습니다. 인물의 표정과 몸동작, 여러 물건의 배치까지 뜯어고치기를 반복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작업에 나서기 전 이렇게 연습 느낌으로 그린 그림만 56점으로 알려졌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Two Hands

가뭄에 쩍쩍 갈라진 땅을 참고해 그린 양 과장되게 황폐해진 손, 인물들의 부자연스러운 주름살, 토굴처럼 어두운 집, 벽시계와 액자 등 답답함을 더하는 빽빽한 벽 구조, 유독 많이 쓰인 회색톤 등은 모두 고흐가 의도적으로 '오버'해 그린 결과입니다. "하나도 안 아름답지? 이게 진짜 노동자의 삶이야!"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그림 덕에…삶의 의지 불태우다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테오에게 "이 그림은 금빛 액자에 끼워 넣으면 훨씬 좋을 거야. 벽에 건다면 잘 익은 밀의 강렬한 색조를 품은 벽지와 어울릴 거야"라며 직접 코칭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고흐에게 이 그림은 축복이었습니다. 의도와 상관없이 표현주의의 문을 열게 된 일도 그랬지만, 스스로 "내가 화가의 길을 가도 되겠구나"라는 확신과 만족감을 채워진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 고흐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절실했습니다. 고흐가 본격적으로 붓을 들기 시작한 해는 1880년인데요. 그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전도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미술 화상으로 일해봤습니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흐는 삶의 종착역으로 화가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붓을 든 지 5년 뒤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겁니다.

삶에 서툰 고흐는 붓을 제대로 든 이후부터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하는 1880~1885년 사이 여러 불행을 겪었습니다. 특히 시엔(Sien)과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1882년, 고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시엔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 시엔은 알코올 중독에 매독 환자였습니다. 몸을 파는 게 직업이었고요. 이미 다섯 살 난 딸이 있었고, 두 번째 아이를 배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그런 시엔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쯤 테오에게 "임신한 여인을 알게 됐어.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인….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어. 하루치 모델료를 다 주지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눠줬지. 그녀와 그녀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단다"는 편지를 쓰지요. 얼마 지난 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야. 그래서 함께 지내며 서로의 짐을 나눠서 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닐까?"라는 편지도 보냅니다. 고흐가 시엔을 마음으로 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슬픔(시엔을 모델로 한 그림)

그림 모델을 들일 돈이 없던 고흐는 시엔과 아이들을 꾸준히 그렸습니다. 꾸밀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듯 이들의 모습을 솔직히 담아냈습니다. 이때부터 고흐는 표현주의의 등불을 쥐고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들 만큼 꾸밈없이 표현했습니다. 이게 고흐만의 애정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고흐의 가족이 이 둘의 사이를 못마땅히 여겼습니다. 특히 부모님은 두 사람이 하루빨리 찢어지길 바랐습니다. 심지어 이번만큼은 테오마저 고흐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보란 듯 잘 살았다면 좋았을 테지만, 두 사람이 동거하는 집에서 뒤룩뒤룩 살이 찌는 건 가난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관계는 1년을 조금 넘긴 뒤 끝났습니다. 고흐는 시엔을 탓하고, 부모님을 미워하고, 세상을 증오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어떤 극단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만큼 크게 좌절했습니다.

기진맥진해진 고흐는 부모님 집이 있는 네덜란드 뇌넨으로 갑니다. 헤이그에 더는 있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사고가 터졌습니다. 고흐에게 푹 빠진 그 동네의 한 여인이 독을 먹고 발작을 일으킨 겁니다. "고흐가 나를 멀리한다"는 이유였습니다. 크지 않은 이 마을에선 굉장한 스캔들이었습니다. '나는 손만 대면 실패해. 내가 있는 곳에서는 늘 문제가 터지고 말이야….' 고흐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쯤 되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겁니다. 고흐가 '감자 먹는 사람들'을 만난 건 이처럼 휘청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 덕분에 삶의 의지를 다시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감이 전혀 없어” 혹평마저 극복

아쉽게도 같은 시대 사람들은 '감자 먹는 사람들'을 깎아내렸습니다.

들뜬 고흐는 이 그림의 석판화 버전을 절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내봤는데요. 돌아온 건 비판 뿐이었습니다. "자네는 그보다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모든 것을 그처럼 피상적으로 보고 피상적으로 다루는가. 왜 움직임을 배우지 않는가. 사람들은 그저 포즈만 취하고 있을 뿐이야. 배경에 있는 여인의 귀여운 작은 손은 사실감이 전혀 없어. (…) 그처럼 그리면서 뻔뻔하게 밀레와 브르통의 이름을 들먹이다니. 제발! 예술이란 너무 숭고해서 그처럼 무심히 다루면 안 된다고 생각하네." 라파르트의 답장이었지요.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믿는 구석이던 테오마저 떨떠름했습니다. 걸작의 탄생을 확신한 고흐는 이 그림을 다 그리기 전부터 테오에게 "미리 홍보나 해둬"라며 설레발(?)을 쳤습니다. 착한 테오는 '돌직구'를 날리지 못한 채 최소한의 도리만 다했습니다. 물론, 그 시대 주류들이 모인 프랑스 파리 화단에는 진출조차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뒤부터는 불행에도 마냥 좌절하지 않습니다. "여태 그린 그림은 다 습작이었고, 내 첫 작품은 바로 이거야"라며 스스로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불행에 푹 젖은 삶도, 혹평 일색인 그림도 최후의 가치에 대해선 신의 심판에 맡기기로 다짐합니다.

이 그림 덕에 삶의 불꽃은 더욱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고흐는 이후 뛰어난 화가들이 모인 프랑스 파리 땅을 밟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여러 번 큰 상처를 받은 그가 고갱과 로트레크 등 당시 신진 화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다시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붓을 쥔 지 고작 2년 만에 테오에게 "이제 팔 수 있는 수준의 그림을 그릴 날이 머지않았다"며 득도한 양 자신했던 그는 일본 우키요에 등 새로운 화풍도 익혔습니다.

그 결과, '감자 먹는 사람들' 이후 그가 그린 그림은 높은 확률로 걸작이 됩니다. 고흐의 작품을 놓고 "첫 5년(1880~1885)의 그림은 실력이 썩 좋지 않았는데, 죽기 직전까지의 남은 5년(1886~1890)간 작품은 좋았다"는 평도 있습니다.

초기작 중 유일한 걸작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90년, 고흐는 파리에서 가까운 시골 마을 오베르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끝내 불행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습니다. 결국 살아있을 당시에는 화가로 실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생전에는 딱 한 작품만 팔렸습니다. 고흐가 죽은 그 해,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현재가로 약 100만원 정도인 400프랑에 사들인 게 전부입니다.

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이제야 고흐의 그림 대부분이 명작으로 평가받지만, 그가 생전에 "이건 걸작이야!"라고 칭한 자신의 그림은 겨우 4점뿐입니다. '침실', '해바라기', '룰랭 부인의 초상', 그리고 '감자 먹는 사람들'입니다. 앞에 있는 작품 3점은 1888~1889년 고흐가 프랑스 남부 지방 아를에 있을 때 그린 그림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만이 이 가운데 가장 초기작이면서,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그 작품이 여전히 초라한 것이었다면? 네가 무릎을 굽히고 있는 농부들을 며칠 동안 그렸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그 그림이 틀렸다고 하지 않느냐. 몇 년이고 그려도 잘못된 것이라면?" "예술가란 거기에 도박을 거는 거예요." "도박을 걸 만한 보답이 나오니?" "보답이요? 무슨 보답을 말하는 건가요. 돈? 지위? 전 우리가 그간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줄 알았어요."

어빙스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1981) 중 아버지와 고흐의 대화 일부

〈참고 문헌〉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위즈덤하우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