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대부분 직권남용 인정
‘블랙리스트’ 김기춘 사건 남아
직무범위·권한 남용 기준 제각각
문재인 정부 적폐수사 기준상
조국·백원우 기소 가능성 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청산하는 법리가 됐던 직권남용죄가 정권핵심을 찌르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정부 핵심인사들의 사법처리 여부는 공교롭게도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직권남용 혐의 판단여부에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10일 대법원에 따르면 현재 박근혜 정부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판단은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혐의를 받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안종범 전 경제수석 등의 판결에서 대법원 전합은 “부당한 행위여도 직무권한이 없다면 직권남용이 아니다”라는 기존 판례를 재확인했지만,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형법 제123조에 따르면 공무원은 직권을 남용해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할 때 5년 이하의 징역, 3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법원은 직권남용 혐의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지만, 대법원에서 ‘직무권한’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어떤 경우가 권한을 남용한 게 되는지에 관해 기준이 제시된 적이 없다.
김 전 실장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면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 중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물론, 현재 감찰 무마나 선거개입 하명수사 의혹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청와대 인사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김 전 실장 대법원 전합 판결에 따라서 현재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결국 각 고위공직자의 직무권한을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종전 적폐수사 기준을 따른다면 조국(54) 전 법무장관과 백원우(53) 민정비서관은 기소가능성이 크다. 청와대 감찰권이 직권남용의 대상이 되는지는 명확하게 문제된 사례는 없다. 다만 비슷한 예를 찾아보면 대법원 판례상 경찰의 범죄수사권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에서 말하는 ‘권리’로 인정된다. 2010년 대법원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관련 규정을 토대로 “범죄수사권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서 말하는 권리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상급 경찰관이 직권을 남용해 부하 경찰관의 수사를 중단시켰다면 형사 처벌이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즉, 조 전 장관이 감찰중단을 지시했을 때 비위 첩보를 구체적으로 인지했는지에 따라 혐의향방이 크게 갈릴 수 있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하명수사 의혹은 첩보 처리 주체가 누구이고, 어떤 성격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대통령비서실 운영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민정수석실 산하 민정비서관실 업무는 ▷국정 관련 여론수렴 및 민심동향 파악 ▷대통령 친인척 등 대통령 주변인사에 대한 관리다. 공직 비리 동향 파악이나 고위공직자 등의 비리 상시 사정 및 예방은 반부패비서관실과 그 아래 특별감찰반의 업무로 규정돼 있다.
김 전 시장에 대한 비위 첩보 접수 및 가공의 주체가 부정부패에 대한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반부패비서관실이 아닌 민정비서관실인 만큼 직권남용 소지가 크다. 대법원은 수사를 중단시키는 행위 외에도 상급 경찰관이 임의로 사건을 다른 경찰서로 이첩하게 한 경우도 직권남용이 성립할 수 있다고 판결한 사례가 있다. 다만 김 전 시장 첩보를 경찰로 보낸 사건은 관련 첩보 수집이 애초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업무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면, ‘직무에 관한’ 것이 아니어서 범죄성립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직권남용죄는 모호한 성립요건으로 헌법재판소 심판 대상에 오른 적도 있다. 헌재는 2006년 합헌 결정했지만, 권성 재판관은 당시 소수의견을 내 직권남용죄가 정략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 그는 “직권이나 의무 등은 그 내용과 범위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게 아니어서 적용범위가 무한정으로 넓어진다”며 “(직권남용죄가) 정권교체 시 전 정부의 실정을 들춰내거나 정치보복을 위해 전 정부 고위공직자를 처벌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