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보다 변화·혁신 미래 대비
위기엔 ‘관리형 리더’ 공식 깨져
한화·한진·LS, 3·4세 최전선에
GS도 세대교체 흐름 적극 동참
안정보다 변화였다. 2020년을 앞둔 재계 연말 인사의 키워드다. 기존 글로벌 경기악화와 경쟁 격화에 대응하기 위한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세계 경제와 시장 규칙의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위기 속에 기존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위기 때는 ‘관리형 리더’라는 공식도 깨졌다. 경기하강과 불확실성의 2020년을 앞두고 국내 기업들은 큰 실패 없이 유지되는 기존 경영진의 안정보다는 변화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는 과감한 결단력을 보였다.
재계는 빠르게 젊어졌다. GS와 한화, 한진, LS그룹의 3·4세가 경영 최전선에 대거 포진했다. 전문경영인도 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전환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50대 융합형 전략가’로 재정비됐다.
지난 3일 전격 용퇴를 발표한 허창수(71) GS그룹 회장의 선택 또한 ‘변화를 위한 도전’이라는 것이 재계의 재배적인 시각이다. 2005년 취임 후 지난 15년간 GS그룹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온 허 회장이지만 대내외적인 경영환경 변화와 세대교체 흐름에 선제적으로 동참했다는 평가다.
허창수 회장은 퇴임을 발표하면서 “GS가 새 역사를 써내려가기 위해 전력을 다해 도전하는 데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시기”라면서 “혁신적 신기술이 기업 경영환경 변화를 가속화하고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는 절박감 때문에 지금이 적기로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신임 회장은 허 회장의 막냇동생인 허태수(62) GS홈쇼핑 부회장이 맡는다. 내년 1월 취임하는 허태수 신임 회장은 ‘디지털 혁신 전도사’로 불린다. 허태수 회장은 2007년 GS홈쇼핑 대표이사에 오른 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디지털 전환)’에 사활을 걸고 당시 TV홈쇼핑에 의존하던 사업 구조를 모바일로 전환시킨 인물이다.
GS 4세 경영도 본격화했다. 허창수 회장과 함께 허명수 GS건설 부회장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 ‘수’자 돌림에서 ‘홍’자 돌림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며 허창수 회장의 장남 허윤홍(40) GS건설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했다.
한화그룹 역시 최근 정기인사에서 김승연(67) 회장의 장남 김동관(36) 한화큐셀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승계구도를 구체화했다. 김동관 부사장은 그룹의 핵심 미래먹거리인 태양광 사업을 진두지휘하며 ‘젊은 한화’의 얼굴로 경영 수업을 받아 왔다.
김 부사장은 내년 1월1일 출범하는 한화케미칼과 한화큐셀의 합병법인(가칭 한화솔루션)에서 전략부문장을 맡아 태양광 사업을 주력으로 미래 신소재 개발 등 성장동력 확보를 책임질 전망이다.
LS그룹도 구본혁(42) LS니꼬동제련 부사장을 서울·경기도 도시가스 공급업체인 예스코홀딩스 대표이사 CEO에 임명했다. 구 신임 대표이사는 고(故)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으로, LS그룹 내 오너 3세 경영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표이사에 선임됐다.
한진그룹의 경우 조원태(44) 회장이 선친 고(故) 조양호 전 회장 별세 후 경영권을 이어받아 지난 4월 회장에 취임했다. 한진가(家) 3세인 조 회장은 취임후 첫 임원인사에서 우기홍(57) 대한항공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그룹 전반에 50대 대표를 내세우면서 젊은 조직으로 변화를 꾀했다.
4대 그룹 중 처음으로 작년 ‘4세 경영’ 닻을 올린 LG그룹의 구광모 회장은 지난달 28일 취임 후 두번째 임원인사에서 기존 6인 부회장 체제를 4인 체제로 전격 교체했다. ‘가전신화’ 조성진 LG전자 부회장(63)이 용퇴하고 50대 권봉석 MC사업본부장 겸 HE사업본부장 사장이 LG전자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됐다. 그동안의 성공 방정식에서 벗어나 대대적인 혁신에 나서겠다는 구광모 회장의 ‘뉴LG’ 구상이 본격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젊은 임원도 대거 발탁했다. LG 신규 임원 106명 중 21명이 45세 이하였다. 특히 LG생활건강에서는 심미진(34)·임이란(38) 30대 상무가 탄생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신동엽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국내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과 신(新)보호무역주의는 물론 과거 대량생산이나 품질경영과 같은 기존 시장규칙이 아닌 새로운 것을 계속 창조해내야 하는 초(超)경쟁 시대의 동시다발적인 변화에 직면했다”며 “이같은 경영환경에서는 기존 방식으로는 위기를 넘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새로운 지식이나 가치관, 역량을 가진 경영자를 내세우게 된다”고 말했다.
이정환·천예선·이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