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식 사찰·숲에서 느끼는 자연의 순리

90개 축구장 크기 수목원 전통·첨단 공존

세종청사 위 세계 최대 규모 옥상정원 볼만

이응다리 위에서 누리는 느린 곡선의 쉼

국립세종수목원 내 앙리 마티스의 작품 세계를 재현한 전시 포토존 [김명상 기자]
국립세종수목원 내 앙리 마티스의 작품 세계를 재현한 전시 포토존 [김명상 기자]

[헤럴드경제=김명상 기자] 국가 행정과 일상이 공존하는 세종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반된 풍경을 보여준다.

계획도시답게 반듯하게 구획된 도로망과 현대식 건축물로 도시의 큰 틀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로 숲과 수목원, 강물 등이 존재하며 도시에 숨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낮의 소란이 잦아들고 밤이 찾아오면, 금강 물줄기를 따라 도심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반듯한 도시 구조 위에 여유를 품은 세종시는 낮과 밤을 넘나들며 입체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숲의 순환을 일깨우는 현대식 사찰

녹야원 대웅전 [김명상 기자]
녹야원 대웅전 [김명상 기자]

세종시 부강면에 자리한 ‘녹야원’은 언뜻 보면 사찰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렵다. 화려한 단청이나 배흘림기둥, 전통 기와지붕 대신 노출 콘크리트가 만들어내는 담백한 질감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2020년 완공된 녹야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 설법을 펼친 인도 사르나트의 사슴 동산, 녹야원(鹿野苑)에서 이름을 따왔다. 명칭은 전통적이지만, 외관은 보통의 사찰 건축 문법을 과감히 벗어났다. 어떤 건축물보다도 현대적인 공간으로 조성된 것. 특히 대웅전은 삼장법사의 고깔모자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지붕선을 갖췄다.

녹야원의 숲길을 안내하는 숲 해설가 [김명상 기자]
녹야원의 숲길을 안내하는 숲 해설가 [김명상 기자]

녹야원의 매력은 건물에만 머물지 않는다. 템플스테이와 숲 체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사찰 주변의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숲길로 접어들자 소나무 군락이 나타났다. 한 나무의 가지 끝에는 유독 많은 솔방울이 매달려 있는데, 현장을 안내한 숲 해설가는 이를 풍요가 아니라 ‘소멸 직전의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소나무에 솔방울이 빽빽하게 달린 걸 보면 흔히 잘 자란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 반대입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때, 나무가 종족을 보존하려고 마지막 힘을 다해 씨를 맺는 위기 신호죠.”

녹야원의 숲길을 안내하는 숲 해설가 [김명상 기자]
녹야원의 숲길을 안내하는 숲 해설가 [김명상 기자]

그렇게 쓰러진 고목도 눈에 띈다. 쓸모를 다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그 위로 버섯과 이끼가 돋아나며 새로운 생명의 터전이 된다. 생명이 다해 흙으로 돌아가는 숲의 순환을 마주하며 걷다 보면 자연스레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화려한 법당의 위용 대신, 스스로를 비우고 다시 채우는 자연의 순리가 녹아든 이 숲길이야말로 녹야원이 중생에게 건네는 가장 큰 가르침인 것 같았다.

축구장 90개 규모의 녹색 영토

사계절전시온실과 국립세종수목원의 야경 [국립세종수목원 제공]
사계절전시온실과 국립세종수목원의 야경 [국립세종수목원 제공]

도시의 중심부로 다시 들어서자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 하나 없이 광활하게 탁 트인 대지가 펼쳐진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국립세종수목원’이다. 산자락을 따라 조성한 일반적인 수목원과 달리 완만한 평지를 활용해 만든 국내 최대 규모의 도심형 국립수목원이다.

축구장 약 90개를 합쳐놓은 대지에는 4367종, 248만여 본의 식물 자원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연을 가까이에서 누리기 어려운 도심에 거대한 녹색 쉼터가 됐다는 점에서 인기를 끈 이 수목원은 지난 6월엔 누적 관람객 500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정문을 지나 가장 먼저 발길을 이끄는 곳은 세 잎의 붓꽃을 형상화한 ‘사계절전시온실’이다. 꽃잎이 활짝 벌어진 듯한 유려한 곡선의 건축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온실 내부는 지중해온실과 열대온실, 특별전시온실 등으로 구성돼 있어 기후와 식생에 따라 전혀 다른 식물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특별기획전 ‘앙리 마티스가 그린 오색정원’ 전시 작품 [김명상 기자]
특별기획전 ‘앙리 마티스가 그린 오색정원’ 전시 작품 [김명상 기자]

온실 내부에서는 특별기획전 ‘앙리 마티스가 그린 오색정원’이 12월 31일까지 이어진다. 화가 앙리 마티스의 강렬한 원색과 조형미를 식물, 공간 연출로 재해석한 전시다. 작품 속 색채와 오브제를 입체적으로 배치한 테마 공간은 화폭 속 공간을 현실에서 마주하는 듯 생생한 예술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국립세종수목원 내 한국전통정원의 솔찬루 야경 [김명상 기자]
국립세종수목원 내 한국전통정원의 솔찬루 야경 [김명상 기자]

온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또 다른 공간이 열린다.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와 부용정 일대를 재현한 한국전통정원이다. 궁궐 기록화인 국보 ‘동궐도(東闕圖)’를 고증해 조성한 이곳은 실제 조선 궁궐의 정원에 들어선 듯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에 있는 솔찬루의 누각에 올라 연못을 바라보니 차분한 전통의 정취가 감돈다. 한쪽에는 첨단 기술로 구현한 유리온실이, 다른 한쪽에는 수백 년 전 조선의 정원 미학이 펼쳐지는 모습은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도시, ‘세종’의 성격과 닮았다.

권력의 기록에서 역사의 흔적을 만나다

대통령기록전시관의 외관 [한국관광공사 제공]
대통령기록전시관의 외관 [한국관광공사 제공]

수목원을 나와 세종호수공원 수변을 따라 걸으면 큐브 형태의 독특한 유리 건축물 ‘대통령기록전시관’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은 대통령이 재임 중 생산한 문서와 사진, 영상, 외교 선물 등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건물 외관은 국가의 상징인 국새 보관함을 형상화해 설계됐다. 유리와 석재를 활용한 단정한 외관은 기록을 보존하는 공간의 엄숙함을 드러내면서도 주변 풍경과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2층에 있는 대통령의 선물 전시관 [대통령기록전시관 제공]
2층에 있는 대통령의 선물 전시관 [대통령기록전시관 제공]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대통령의 얼굴을 형상화한 거대한 텍스트 아트가 보인다. 전임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주요 단어를 추출해 얼굴 형태로 배열한 작품이다.

2층 ‘대통령의 선물’ 전시실은 관람객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다. 세계 각국 정상과 주요 인사들이 우리 대통령에게 전달한 선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으로, 상대 국가의 문화와 역사, 우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국가 간 외교가 거대한 협상 테이블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선물 하나에도 마음과 상징을 담아 전해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대통령의 접견실을 재현한 공간 [대통령기록전시관 제공]
대통령의 접견실을 재현한 공간 [대통령기록전시관 제공]

3층 ‘대통령의 공간’에서는 청와대의 주요 공간을 재현한 전시가 이어진다. 집무실과 접견실, 춘추관 등을 둘러보면서 한 시대의 권력이 작동했던 공간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직접 보면 대통령이라는 이름 뒤에 놓인 무거운 책임감과 선택의 순간마다 펼쳐졌을 긴박감이 잠시나마 눈앞에 그려진다.

통제의 문이 열리자 빛이 들어왔다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에서 본 세종시 야경 [김명상 기자]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에서 본 세종시 야경 [김명상 기자]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은 세종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15개 청사 건물을 하나로 연결한 옥상정원은 길이만 3.6㎞에 달한다.

2016년 5월 ‘세계에서 가장 큰 옥상정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이곳은 거대한 정부청사 지붕 위에 조성된 녹색 산책로로서 도시의 또 다른 브랜드가 됐다. 통제와 보안 문제로 닫혔던 정부청사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세종시의 남다른 시선을 방증한다.

기네스북 등재 기념 표지석 [정부세종청사 제공]
기네스북 등재 기념 표지석 [정부세종청사 제공]

평소 일몰 후 출입이 제한되던 공간이 야간 개방으로 불을 밝혔다. 지난달 30일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 별빛야행’이 열리면서다.

신분증 확인을 거쳐 옥상에 들어서자 청사초롱과 대형 달 조형물이 어둠 속 산책로를 밝혔다. 엄격한 행정 공간이던 청사 옥상이 시민과 여행자를 위한 공간으로 전환된 모습이었다. 시선을 멀리 돌리자 세종호수공원과 정부세종컨벤션센터 등 도심 건축물이 환하게 빚어내는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단한 빗장이 풀린 자리에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세종의 화려한 밤빛이 가득 들어찼다.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에서 본 세종시 야경 [김명상 기자]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에서 본 세종시 야경 [김명상 기자]

이번 야행은 세종시가 추진해 온 야간관광 활성화 브랜드인 ‘세종 밤마실’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됐다. 세종시의 야경을 즐기려는 방문객이 늘고 이들의 발길이 인근 공연과 식음, 상권 소비로 이어지면서 체류형 관광을 유도하는 효과를 거뒀다.

박영국 세종시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는 “대전이나 청주 같은 인근 지역에서 유입된 관람객이 많아지면서 이 기간 지역 매출이 10% 이상 증가했다”며 “밤마실은 다른 도시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행사로 성장했는데, 세종만의 야간관광 브랜드로 정착되도록 키워나가겠다”고 말했다.

올해 야간 관람은 종료됐으나, 주간 일반 관람은 11월 29일까지 이어진다. 관람은 해설사 인솔로 하루 세 차례 정각에 출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회차당 정원은 50명이며 네이버 예약과 현장 접수를 병행한다.

금강 위에 그려진 둥근 쉼표 ‘이응다리’

이응다리(금강보행교)의 석양 [한국관광공사 제공]
이응다리(금강보행교)의 석양 [한국관광공사 제공]

밤의 세종을 온전히 느끼려면 금강을 빼놓을 수 없다. 금강변으로 향하면 둥근 원형의 다리 하나가 시선을 붙잡는다. 한글 자음 ‘ㅇ’을 형상화한 ‘이응다리’다.

정식 명칭은 금강보행교로, 한글 반포 연도인 1446년을 기념해 전체 길이를 1446m로 설계한 다리다. 위아래 두 층으로 구성된 복층 교량으로 상층은 보행자 전용, 하층은 자전거 전용으로 운영돼 다른 다리들과는 또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이응다리(금강보행교) 전망대에서 본 야경 [김명상 기자]
이응다리(금강보행교) 전망대에서 본 야경 [김명상 기자]

상층 보행로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라서자 금강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난간에 기대어 보면 강 건너편 신도심의 건물들이 환하게 빛나고, 강물 위에는 도심의 불빛들이 잘게 부서진다. 원형의 동선을 따라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 비로소 이 다리의 진가가 드러난다.

빠르게 질주하는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원형 조형물을 걷다 보면, 걷는 행위 자체가 일상의 작은 쉼표가 된다. 반듯한 계획도시의 직선 너머, 금강 위에 드리운 둥근 곡선의 다리는 지친 일상에 건네는 다정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terr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