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바실리 베레샤긴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전쟁 화가
전쟁의 민낯 직접 경험해 그리다
총칼은 낭만도, 신화도 아니었다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전쟁의 ‘신격화’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해골이 보인다.
입 다물고 넋을 놓은, 입 벌린 채 비명을 지르는 머리뼈가 보인다. 정수리가 찢긴, 턱이 빠진, 눈코입이 땅에 깔린 채 나뒹구는 뼛조각도 보인다. 그런 해골을 모아 해골 피라미드를 쌓았다. 예우도 없고, 배려도 없다. 그저 던지고, 짓밟고, 메다꽂는 식으로 올려다놓았다. 그곳으로 까마귀가 몰린다. 부리로 틈을 휘젓는다. 굳은 채 엉겨붙은 마지막 핏덩이를 쪼아먹는다. 이 해골은 한때 아버지였을 것이다. 아기를 안은 어머니, 꿈을 안고 도시로 온 청년, 눈을 크게 뜨고 세상과 마주한 아이, 장군과 병사, 시인과 제빵사, 서로에게 연인과 이웃이었을 것이다. 수천개의 백골에는 수천개의 서글픈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 못다 핀 잠재력이 다 여기서 멈춘다. 잠시 닫히는 게 아닌, 영원히 소멸한다. 무너진 성벽, 메마른 대지, 바싹 마른 풀과 나무 틈에서 새롭게 피어날 수 있는 꽃은 없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뻔한 선동.
(…)
화가는 상종도 못 할 짐승이거나, 완전히 정신이 나간 자다.
훗날 알렉산드르 3세가 되는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그는 이 그림이 주력으로 걸린 전시회를 돌며 위와 같은 악평을 가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화가는, 비슷한 주제의 자기 작품 세 점을 찢고 태워버렸다고 한다. 황태자에게 찍혔다는 공포감이 아닌, 황태자조차도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느냐는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가는 바실리 베레샤긴이었다. 황태자의 분노를 자극한 그림 제목은 <전쟁의 신격화>. 액자 틀에 새겨진 글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위대한 정복자에게 바친다”였다. 무엇을? 이 해골 탑을.
“전쟁에 두 얼굴이 있는가?”
쩌렁한 목소리로 돌격을 명령하는 지휘관, 함성과 함께 돌진하는 기병 부대, 적과 맞서 구출하고, 탈환하고, 압도한 후 선점하는 고지.
그때는 전쟁이 낭만이자 신화, 찬미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시기였다. 전쟁화라고 하면 금빛 훈장, 허를 찌르는 전략, 땀과 모래, 거대한 북과 트럼펫을 함께 그리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총칼은 과연 감미로울 수 있는가.
베레샤긴은 본인부터도 화가이기 앞서 군인이었다.
그는 군모를 쓴 채 직접 전장을 달린 적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쌓을수록 점점 더 주전(主戰)론자가 아닌, 반전주의자의 색채를 진하게 품었다. 언뜻 보기에는 역설적이지만, 되짚으면 전혀 역설적이지도 않았다.
전쟁이라는 게 그랬다.
베레샤긴은 직전까지 함께 밥을 먹던 동료의 죽음을 직접 봤다. 너무도 쉽게 떨어져 나가는 전우의 팔다리도 마주하고,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멎는 호흡도 옆에서 직면했다. 황궁의 벨벳 의자에 앉아 지도나 짚는 이들은 알 수 없겠지만, 진흙탕 속 병사에게 전쟁은 언제나 또 다른 지옥만 보여줄 뿐이었다.
전쟁에 두 얼굴이 있나?
유쾌하고 매혹적인 표정,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다 가질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전쟁은 오직 하나다.
가능한 많은 이를 죽이고,
다치게 하고, 포로로 붙잡는 일.
더 강한 적수가 더 약한 적수를 굴복시켜
자비를 구걸할 때까지 짓밟는 일.
이것만이 전쟁이 지을 수 있는 유일한 표정(실체)이다.
이는 베레샤긴이 남긴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내 남기는 건 영광 아닌 해골과 시체, 무수히 많은 삶의 종말뿐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뒤 쓴 문장이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가 볼 때 ‘신격화’된 세상 모든 전쟁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 영웅을 기리는 시, 고상한 노래나 우아한 연설 따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무더기의 뼈만을 남기는 것.
해군 장교 관두고 화가로
베레샤긴은 1842년 러시아 노브고로드현 체레포베츠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 지주였다.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었다. 베레샤긴은 여덟 살에 유소년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3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관학교에 이름을 올렸다. 직접 항해도 했다. 그는 호위함에 올라 덴마크, 프랑스 등에서 파견 생활도 경험했다. 그는 이곳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60년, 나이는 아직 창창한 열여덟이었다. 이대로 복무를 더 이어갈 법도 했지만… 베레샤긴은 부모 뜻도 거스르고 돌연 제대를 해버린다. 발길이 닿은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였다. 베레샤긴은 진작부터 그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릴 적 유소년 사관학교에서 미술을 교양 수업 일환으로 접하면서부터 흥미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내 재능을 다듬어 전문 화가의 길로
이끌어 줘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해군 장교라는 탄탄한 길을 버리고
화가라는 불확실한 직업을 택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봤을 것이다.
베레샤긴은 그 미친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서 그의 용돈부터 끊었다고 한다.
베레샤긴은 괘념치 않고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찾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우선 아카데미에서 역사화를 배웠다. 그러나 아카데미 특유의 정답을 정해두고 그리게끔 하는 지도 방식에 금방 질렸다. 그는이에 “더 넓고 자유로운 곳에서”,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코카서스산맥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다. 얼마 후에는 프랑스 파리로 넘어가 아카데미즘 화가 장 레옹 제롬의 가르침을 받았다. 베레샤긴은 다시 마주한 딱딱한 가르침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세부 묘사에 대한 집착 등은 제롬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참상을 직접 체험하다
우리와 함께 전장으로 가지 않겠소?
1867년, 베레샤긴은 당시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총독으로 있던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의 제의를 받는다. 종군(전속) 화가의 자격 등으로 현장을 기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기꺼이 받아들였다. 베레샤긴 또한 생도 경험이 있었기에 전투를 알고 있었다. 다만, 주로 책상에서 읽고, 쓰고, 듣기만 했을 뿐 제대로 된 전장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약간의 환상이 있었을 수도 있다. “책에서 읽고 말로만 수없이 들은 전쟁의 실체가 무엇인지 직접 알고 싶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글도 남겼다.
환상은 금방 깨졌다.
베레샤긴은 요새에서 첫 실전을 치렀다. 이른바 사마르칸트 방어전이었다. 이곳은 러시아군이 점령한 땅이었다. 다만, 상대군의 역습도 만만치 않아 당장은 되레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다.
숭고한 결단? 영웅적 희생? 음유시인들이 매번 앞장세운 주인공들은 이 순간에 잘 보이지 않았다. 현장을 지배하는 건 공포와 불안이었다. 병사 대부분은 매일 밤 울고, 떨고, 신음하는 듯보였다. 이들이 써내려간 일기에선 영광이니, 헌신이니 하는 단어 따위 찾아볼 수 없었을 터였다. 밖에서는 쉼 없이 포성이 울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조롱이 오가고, 매캐한 먼지와 돌가루가 떠다녔다. 하루가 한 달 같았다. 그렇게 여드레를 버텼다. 군 간부의 증언 또는 화실 속 연출에만 기댄 여러 화가와 달리, 베레샤긴은 이때 자신이 그려야 할 것을 절감했다. 그뿐인가. 베레샤긴은 떨고 있지만도 않았다. 때때로 그는 총을 들고 뛰어나가 수비대의 사기를 띄우기도 했다. 그는 요새 방어 공로로 4급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다만, 그에게 남은 건 이 반짝이는 훈장만은 아니었다.
이 시점부터 베레샤긴은 있는 힘껏 전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노래하듯 미화한 장면이 아닌, 본인이 직접 보고 겪은 풍경을 되짚으며.
성벽에서, 들어오라
흰 군복을 입은 병사 무리가 보인다. 규모는 중대 수준이다.
무장한 이들은 사마르칸트 성벽을 따라 살금살금 나아간다. 햇볕은 뜨겁다. 군복은 하얗지만, 피부는 빨갛게 그을렸다. 총칼은 길고 크지만, 몸은 잔뜩 움츠리고 있다. 모두가 공습에 지쳤다. 겁먹고, 긴장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듯 전우의 어깨를 잡은 이도 있다. 당당한 행진은 없다. 호쾌한 총성도, 극적인 승리도 없다. 느껴지는 건 공포와 피로뿐이다. 베레샤긴의 그림, <성벽에서 : 들어오게 하라>다.
그렇게 전투가 치러지면 어떻게 되는가.
수없이 죽는다. 아군과 적군 구분 없이 사지가 뒤엉킨 채 생을 마친다. 피는 물만큼 익숙해지고, 단말마 비명은 주고받던 잡담 따위 잊게 만든다.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고개를 바로 들 수 없다. 이들에게 깃발과 트럼펫은 사치일 뿐이다. 베레샤긴이 뒤이어 그린 작품, <성벽에서 : 들어왔다>다.
선동 취급 받은 진실
적어도 그가 본 전장은 이랬다. 그가 겪은 전쟁은 이 따위였다.
베레샤긴은 1874년 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 그림들을 내걸었다. 거기에는 <전쟁의 신격화>도 같이 있었다. 황태자는 이곳에서 베레샤긴을 향해 “짐승”, 그리고 “정신이 나간 자”라는 혹평을 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태자에 이어 비평가들 또한 비판에 동참했다. 우리의 용감한 군인, 제국의 명예로운 전쟁을 이렇게 그린 건 죄악과 같다는 비난도 뒤따랐다. 정작 그들 대부분은 실제 전장에서, 병사들 틈에 낀 채, 불어오는 피바람을 맞은 적 한번 없으면서.
한편 황태자와 함께 당시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2세 또한 그의 그림을 놓고 노여움을 표했다는 말도 돌았다.
이는 베레샤긴이 겪은 핍박 서사에 더 얹을 수 있는 좋은 소재지만, 확실한 내용이지는 않다. 가령 당시 언론인 표도르 불가코프는 “(…) 이 소문은 완전히 낭설이었다. 황제는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 (황제 직속 비서실 또한) 황제가 조금도 불쾌감을 표한 적이 없다고 확인해줬다”는 기록도 남겼다. 실제로 그해 아카데미 예술협회는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그 시절 영향력 있는 인사 상당수가 그의 그림을 선동이자 왜곡으로 받아들인 건 사실이다. 화가가 직접 <성벽에서 : 들어왔다> 등을 액자에서 도려내 없앤 건 분명 그러한 분위기 탓이었다. 제의받은 교수 자리? 이 또한 여지 없이 거절했다.
전쟁은 끊이지를 않고
베레샤긴은 세계 곳곳을 돌았다.
유럽은 물론, 몽골, 티베트, 히말라야, 영국령 인도 등 대륙을 넘나드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전쟁터도 또 찾았다.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재차 “추위와 굶주림을 겪고”, “부상과 죽음의 위험을 경험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새롭게 나선 곳은 1877~1878년에 벌어진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었다. 진심으로 바란 순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에는 총알도 직접 맞아봤다. “둔탁한 충격이 허벅지를 덮쳤다. 도끼등으로 얻어맞은 듯했다.” 그의 회상이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치료가 늦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을 뻔도 했다. 베레샤긴은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장교로 함께 참전했던 친동생은 전투 중 전사했다. 온 부대가 그의 공적을 기린들 늦었다. 죽은 자는 받아 갈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다.
전 세계를 방랑하며 인생을 짚어보는 동안,
나는 요즘에도 인간이 온갖 핑계와 수단으로
서로를 죽이고 있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집단 학살은 여전히 전쟁으로 불리고,
(…)
무자비한 완력 숭배와 자가당착이 판을 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베레샤긴을 놀라게 한 건, 시대가 어느덧 현대에 이르렀음에도 전쟁이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쓰이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사랑과 평화를 가르친 신의 이름을 빌린 국가들조차 이러한 일(전쟁)을 벌이고 있다.” 실제로 그랬다. 당시 그의 기록에는 거짓이 없었다.
가장 커다란 폭력
베레샤긴은 시야를 넓혔다. 이제는 조국을 넘어 대륙과 인류를 생각하는 듯했다. 1884년께 공개한 <영국령 인도의 대포 처형> 작업도 그 일환이었다.
영국군이 인도인을 포신에 묶었다. 이른바 ‘포형(대포 처형·Blowing from a gun)’을 위해서였다. 이대로 곧 대포알을 쏠 것이었다. 신체는 수습할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조각이 날 터였다. 앞서 1857년, 영국군은 인도인 용병 세포이(Sepoy) 중심의 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당시 영국은 동인도 회사의 깃발과 함께 인도를 식민지로 부리고 있었다. 이번 ‘세포이 항쟁’은 영국이 벌이는 가혹한 수탈과 배제 정책의 결과였다. 그리고, 전쟁의 끝은 또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가장 약한 자에게 가장 먼저, 가장 커다란 폭력을 가할 뿐이었다. 영국인 대부분은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그림 속 군인이 현대의 군복을 입은 것을 보고 쓴소리를 했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과거 사례인데, 마치 우리가 지금도 그런 짓을 하는 양 오해하게 하는 그림”이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베레샤긴은 《더 매거진 오브 아트(The Magazine of Art)》 기고를 통해 응수했다. “만약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면, 영국인은 틀림없이 이 방식을 다시 쓸 것”이라고.
다만 <영국령 인도의 대포 처형> 자체는 1872년의 일명 쿠카 학살의 결과를 그린 것이었다.
이는 소 도축 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반발에 나선 인도 내 시크교도 중 예순여섯 명 안팎을 영국군이 포형으로 학살한 사건이었다. 그런 그림을 보고 세포이 항쟁부터 떠올린 영국인이 많았다는 건, 흔한 말로 그만큼 도둑이 제 발이 저린 격이었다. 영국의 지배층 또한 은연중에라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전쟁의 민낯을. 무슨 명분을 덧씌우고, 어떤 의의로 포장하든 그것이 낳을 수 있는 건 결국 이런 식의 장면뿐인 것을. 화가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한 점 그림으로 두 개의 잔혹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셈이었다. 그림의 실물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전설처럼 들리는 말에 따르면, 한 영국인이 미국에서 이를 사들인 후 직접 태워버렸다고 한다. 확실한 근거는 없긴 하다.
“복수의 여신이 나를 뒤쫓았다”
여러 의미에서 전쟁의 화가로 불린 베레샤긴은 죽음 또한 전장에서 맞이했다.
때는 1904년 4월13일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 등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맞붙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베레샤긴은 제독 스테판 마카로프의 기함인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호에 있었다. 이번에도 종군 화가 격이었다. 배는 뤼순항 정박지 인근에서 기뢰 두 발을 피하지 못했다. 그대로 폭발했다. 베레샤긴은 거기서 죽었다. 당시 나이는 예순둘. 그와 함께 제독도 죽고, 700여명 승조원 중 620~650명가량도 사망했다. 베레샤긴은 죽기 직전, 마카로프 제독 주재의 작전 회의 장면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선체 수색을 했을 때 찾을 수 있는 유해는 여섯 구뿐이었다. 사망자는 600명이 넘는데, 수습할 수 있는 유해는 고작 1% 수준. 전쟁은 끝까지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평생 태양을 사랑했고, 태양을 그리고 싶었다.
전쟁을 직접 겪고, 전쟁에 대한 내 목소리를 내고,
나 자신을 다시 태양에 바칠 수 있게 됐을 때 한없이 기뻤다.
하지만 전쟁,
그 복수의 여신은 나를 끝없이 뒤쫓고 있었다.
베레샤긴은 언젠가 자신의 속마음을 이렇게 밝혔다. “더 이상 전쟁화를 그리고 싶지 않았다. (…) 나는 그리는 대상을 너무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부상자와 사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픔을 눈물로 쏟아야 했다.” 그는 또 이런 식의 말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명 전쟁의 화가였지만, 숨겨둔 조수가 있다는 억측이 나올 만큼 수많은 전쟁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궁극적인 꿈은 전쟁화를 그리지 않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려도 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이었다.
그 이상은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복수의 여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시기에, 세상은 외려 그녀를 거듭 자극만 하고 있다. 애석한 일이다.
참고자료
Vasily Vereshchagin, Essays, Sketches, Reminiscences, Publishing Technologies / Palmira
Vassili Verestchagin, On progress in art, New York : American art galleries
Barooshian, Vahan D., V.V. Vereshchagin : Artist at War. Gainesville, University Press of Florida
Leonard D. Abbott, Verestchagin, Painter of War., The Comrade (New York), vol.1, no.7
yul@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