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용호·김선경 등 광폭 행보 중국·러시아 방문 우군 챙겨 외교 실익·안보 확보 극대화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적극적 외교정책을 전개하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행보는 1998~2000년 김정일 정권의 외교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확정된 이후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유럽 등에 접촉하며 보다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5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전날 비동맹운동(NAM) 각료회의에 참석할 목적으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리 외무상은 비동맹 각료회의에 이후 러시아를 방문해 북러 외교장관회담을 갖는다.
같은 날 김선경 북한 외무성 유럽2국 국장은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해 유럽연합(EU) 외교관들과 고위급 회담을 가졌다. 김 국장은 EU 집행기관인 유럽위원회의 국제협력ㆍ개발총국과 EU 외무성에 해당하는 대외관계청 고위 관료와 회담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이번 회담은 북한 측 요청으로 이뤄졌다. NHK는 EU 대변인을 인용해 북-EU관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 북한의 움직임과 닮아있다. 남북 및 북미 관계가 개선할 기미를 보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세적 대유럽외교를 펼쳤다. 1998년 12월 북한 외무성은 최초로 EU에 접촉, 북-EU 고위급 정치대회를 개최했다. 이를 계기로 EU 의회대표단의 방북이 이뤄졌고, G7(주요7개국) 국가로는 최초로 이탈리아와 북한이 정식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남북 고위급회담이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해 북한과의 접촉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상급 외교도 마찬가지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첫 방중을 택했다. 2000년 김정일 위원장도 그랬다. 김정일은 남북 정상회담이 임박한 시점에 첫 방중을 통해 중국의 지지를 얻어내고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리 외무상의 러시아 방문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같은해 2월 러시아와의 관계를 다지는 ‘북러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990년 한-소련 수교 이후 소원해진 북러 관계를 정상적 관계로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조소우호조약은 러시아가 조약연장 불가 방침을 밝히면서 1996년 폐기됐었다.
김정일은 남북 및 북미관계 개선작업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의 ‘중소 등거리외교’를 차용해 북핵협상 과정에서 외교적 실익과 안보를 최대 확보하려 했다. 리 외무상의 방러 또한 유엔 대북 안보리제재가 역대 최고수준으로 가해져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협상카드로 쥔 제재압박을 완화하고, 미중러 3국의 역학관계를 이용해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한편, 러시아 외무부는 4일(현지시간) 리 외무상이 오는 9일 러시아를 방문해 이튿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소식통은 여기에 “5월 초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다”며 “현재 크렘린궁에서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문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