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바야흐로 ‘극우의 시대’다. 현대 민주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 극우 정치세력이 득세하며 기존 정치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민주ㆍ공화 양당체제를 무너뜨릴 기세고, 난민 위기에 빠진 유럽에서는 통합을 향한 정치 실험이 난관에 가로막혔다. 서구의 극우는 경제위기, IS 테러, 시리아 난민 사태를 양분으로 자라났고, 미 공화당 분열, EU 붕괴, 브렉시트 등의 열매를 낳았다는 점에서 현재의 국제 이슈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와 관련 “유럽에서 세속주의, 중도주의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지적하기도 했다.
■극우 바람세기 가늠자는 ‘트럼프’
미국의 트럼프 열풍은 극우를 향한 바람의 세기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는 가늠자다. 기성 정치의 이단아인 트럼프는 반(反) 이민, 보호무역과 같은 정책으로 엄청난 지지를 끌어모아 공화당 경선의 선두 주자가 됐다. 그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만리장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쿠클럭스클랜(KKK)와 같은 백인우월주의 단체의 지지를 받으며, 그의 유세장에서는 흑인이 아무 이유없이 쫓겨나는 일도 일어난다.
‘미국인의 상식’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기행에,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주류와 주요 오피니언 리더, 정치자금 후원단체 및 주류 언론 모두가 그를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지만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조지 부시 정권의 핵심축이었던 네오콘을 비롯한 일부 보수층에서는 상대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것이 낫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트럼프를 막기 위해서라면 민주ㆍ공화당이 손이라도 잡을 기세다.
■유럽도 지금은…이주민 폄하ㆍ인종주의적 발언에 몸살
이는 2002년 프랑스 대선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펜은 이주민을 폄하하고 인종주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지만, 1차 투표에서 좌파 사회당 후보를 누르고 결선 투표에 올랐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좌파와 중도우파가 연합해 중도우파인 자크 시라크에게 투표하자는 운동을 펼침으로써 르펜을 막을 수 있었다.
비슷한 일은 석달전에도 있었다. FN은 지난해 12월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28%의 지지율로 사회당, 공화당을 물리치고 1위에 등극했다. 충격에 빠진 사회ㆍ공화당은 2차 투표에서 연합해 표를 한쪽에 몰아 주고서야 FN을 간신히 저지했다. 좌우가 합작하지 않고서는 막기 힘들만큼 세력이 커져 버린 것이다.
이밖에도 유럽 각국에서는 극우정당과 단체가 힘을 과시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극우 자유당이 지난해 10월 빈 시장 선거에서 작은 차이로 패배했을 정도로 수권 능력을 보여줬고, 네덜란드 자유당도 지난 1월 당장 총선을 치른다면 제 1당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받았다. 이밖에 영국의 독립당, 덴마크의 국민당, 스웨덴의 스웨덴민주당, 이탈리아 북부연맹 등이 최근 몇 년 사이 선거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또 독일에서 탄생한 극우단체 페기다(PEGIDAㆍ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는 지난 2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체코 등 14개 국가에 지부를 설립해 국제적 단체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수권 정당이 되는 것까지는 힘들더라도 극우 세력의 주장은 기성 정치인에 흡수돼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난민 위기에 EU 각국이 대처하는 방식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국은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EU 탈퇴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할 예정이고, 다른 나라들도 국경을 봉쇄하며 유럽 통합의 상징인 ‘솅겐 조약’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슬라모포비아’와 같은 민족주의적 극우 정서가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경제 위기가 키운 극우
극우가 서구 정치사회에서 이처럼 세력을 크게 팽창할 수 있었던 근본 배경으로는 경제 위기가 꼽힌다. 독일 ifo 경제연구소가 1870~2014년 사이 유럽 등 20개 선진국의 정치ㆍ경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후 항상 극우정당 또는 포퓰리즘 성향의 우파 정당이 득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1929년 대공황 후 이탈리아와 독일 민심을 장악한 파시스트당과 나치당이 대표적이다. 또 1980년대 후반 스칸디나비아 금융위기 때는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극우 정당이 활개를 쳤다.
최근 극우의 팽창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제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빈부격차가 심화한 것이 원인이다. 빈곤층의 분노는 극우 세력이 뿌리를 뻗는 중요한 토양이 됐다. 트럼프 지지자 10명 가운데 8명이 고졸 이하고, 4명꼴로 연소득 5만 달러(미국 1년 연간 중위소득은 5만3500 달러) 이하라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트럼프는 지난 ‘슈퍼 화요일(1일)’ 경선에서도 실업률이 높고 소득은 낮은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실제 미국 경제는 고용, 임금 등 서민 생계와 직결된 경제지표가 좋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의 U6 실업률(한계근로자와 경제적 이유로 인한 파트타임 근로자까지 포함한 실업률)은 9.9%로 금융위기 이전의 저점인 2006년 12월의 7.9%보다 높고, 고졸 미만 학력자 공식 실업률은 8.6%에 달한다. 또 물가 인상을 고려한 실질 중간가구 소득은 2014년 기준 5만3657 달러로 18년 전인 1996년 수준이다.
유럽도 그렇다. 유로존 실업률은 2011년 8월 이후 꾸준히 떨어졌지만, 1월 기준으로 10.3%에 달한다. 특히 하늘 높이 치솟은 청년실업률이 문제다. 유럽의 청년 실업률은 25%에 달한다. 유럽의 청년들은 해외로부터 들어온 이주민, 특히 무슬림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여긴다. 또 수십년 내에 무슬림이 낳은 자녀가 유럽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은 공포감을 키운다. 청년들이 난민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브렉시트ㆍ덴시트ㆍ첵시트(영국ㆍ덴마크ㆍ체코의 EU 탈퇴) 주장에 힘을 보태는 이유다.
독일 일간 도이체벨레는 “20년 동안 만성화된 높은 청년실업률과 사회복지 감소를 지켜본 유럽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극우 정치에 빠져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국제노동기구(ILO) 연구소의 책임자를 맡고 있는 레이먼드 토레스는 “청년 실업률의 증가는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사회 불안 정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라며 청년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사회적 약속이 약화돼 사회 문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테러보다 더 잔혹한 극우
여기에 IS의 테러 위협과 올해 초 독일 쾰른 등지에서 벌어진 난민들에 의한 집단 성범죄 사건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난민이 사회에 심대한 위협을 끼치는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사례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무색케 만들었다. 독일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풀이를 했다면, 이제는 무슬림이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극우 세력의 확산으로 다원주의, 똘레랑스 등 서구가 오랜 기간 이룬 민주주의적 가치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극우 세력은 인종주의적 편견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극우 세력은 종종 테러집단보다 더 짙은 공격성을 표출해왔다.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와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 등 영국의 3개 연구기관과 네덜란드 라이덴대 전문가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극우 테러리스트들은 조국의 이슬람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슬람 지하디스트보다 더 잔혹한 방식으로 테러를 저질러 온 것으로 분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