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경쟁사 미국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전직 연구원 A씨를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인용했다. 첨단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던 연구원의 이직을 통해 핵심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행태에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다.

A씨는 2022년 7월 하이닉스를 퇴직한 지 1년도 안돼 마이크론의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2년간 경쟁 업체에 취업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법원은 7월 24일까지인 전직금지 기간을 지키라며 위반시 하루 1000만원씩을 물어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이닉스가 1년간 A씨의 동향을 눈치채지 못한데다 가처분 인용까지 7개월이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면서 이미 기술과 노하우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첨단 기술이 국가 생존을 좌우하는 시대에 핵심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보다 사법 절차 속도를 높이고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

A씨는 20여 년간 하이닉스에 근무하며 메모리연구소와 D램설계개발사업부 등을 거친 반도체 설계 베테랑이다. 특히 지난 2013년 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 초기부터 2022년 양산을 시작한 4세대 HBM3 개발까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메모리 반도체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HBM은 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으로 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시장을 양분해 왔다. 후발 주자인 마이크론은 최근 세계 최초로 5세대 HBM인 HBM3E 양산에 성공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업계에서는 A씨가 이직하면서 하이닉스의 HBM 기술 노하우가 마이크론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가 한두 사람의 힘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 연구진을 영입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어서다.

우리 기업이 피땀흘려 개발한 선도 기술이 국내도 아닌 해외 경쟁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만큼 맥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공급망 재편 시기를 맞아 이런 암투가 더 빈번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반도체 공장 설계도면을 빼내 중국에 공장을 세우려 한 삼성전자 임원이 적발됐고, 인도네시아 파견 기술자가 한국형 전투기(KF-21) 기술을 빼돌리다 들통나 충격을 줬다.

핵심 기술과 인력의 유출 방지는 우선 기업 스스로 자체 감시망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 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면 정부가 단호히 대응해야 할 사안이다. 기소돼도 형량이 너무 낮은 솜방망이 처벌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2022년 선고된 영업 비밀 해외 유출 범죄 형량은 평균 14.9개월에 불과하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최근 기술침해범죄 등에 대한 양형 기준을 최대 징역 18년형까지 선고하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했는데 전향적 검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