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로 20대국회 입성 ‘바둑진흥법’ 발의 준비중…“상황 판단하고 배우는 입장…9단은 9단의 관록이 있다”
“날더러 구태여 왜 여의도에 가려고 하냐고들 했다.”
한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이가 전혀 다른 분야를 처음부터 시작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만큼 드문 일이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고수’에서 다시 부딪히고 깨지는 ‘하수’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20대 국회에서 그 어려운 길을 구태여 가는 이가 있다. ‘바둑 황제’ 칭호를 받다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여의도에 입성한 초선의 조훈현(63) 의원이다.
지난 3월 조 의원이 새누리당의 러브콜을 받아들이자 기대만큼 우려가 터져 나왔던 것이 사실이다. 바둑의 전설이 된 ‘국수(國手)’가 치열한 정치권에서 상처받지 않을까, 9살에 입문해 바둑만 둬온 이가 의정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 의원은 추호의 흔들림 없이 말했다. “한국 바둑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여의도에 왔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국수에서 의원으로 호칭을 바꿔 단지 겨우 2주 남짓 지난 15일, ‘바둑 9단, 정치 초단’ 조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바둑만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이 초미의 국민 관심사였던 지난 3월, 조 의원의 새누리당 입당 소식은 바둑계의 또 다른 ‘핫 이슈’였다. 그는 “일반인들, 아마추어 선수들은 ‘구태여 왜 여의도까지 가느냐’고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바둑을 위해 정치 입문을 택했다. 기왕 바둑의 보급과 중흥을 위해 일한다면,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다.
조 의원은 “내가 이세돌 9단, 박정환 9단처럼 일선에 있었으면 꿈도 못 꾸고 필요도 못 느꼈겠지만, 오래 전부터 2선으로 물러났으니 여의도에서 일하는 것도 바둑에 도움이 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조 의원에게 비례대표직을 제안한 건 19대 국회 기우회 회장이자 평소 그와 인연이 깊었던 원유철 전 새누리당원내대표였다.
조 의원의 과감한 선택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9년 인터넷 바둑게임 ‘바투’ 투자자로 나서고, 월드바투리그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격이 떨어진다’는 바둑계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지만 바둑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내린 결단이었다. 사업은 결국 실패했지만 체면보다 실리를 우선하는 신념은 의원직 도전까지 이어졌다.
조 의원은 “내가 바둑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고 했다. 이어 “뭘 하더라도 변화와 진보는 따라오게 돼있다, 좋든 싫든 항상 변화해야지 제자리에 멈추면 도태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빠른 속도로 상대를 공격하는 ‘승부사’적 기풍이 삶의 지론과도 맞닿아 있는 셈이다.
▶최저임금도 못 버는 체육인들 안타까워=조 의원이 준비하는 ‘1호 법안’은 역시 바둑 관련법이다. 그는 ‘바둑진흥법 제정안’ 발의를 눈앞에 두고 막바지 작업 중이다. 바둑진흥기본계획의 수립ㆍ시행, 바둑지도자 양성, 바둑기보의 지적재산권 보호 대상 포함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7대 국회부터 바둑 진흥을 위한 법안은 다수 발의됐으나 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 바둑계 인사인 그가 직접 법안을 추진하면서 진전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
조 의원은 “바둑의 첫 수를 두는 경우의 수가 361개인데, 나도 이제 막 정치의 첫 수를 놓은 것 뿐”이라며 “새로운 길이기 때문에 4년 동안 제대로 하려면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오전에도 여의도연구원에서 개최하는 초선 의원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오는 길이었다.
조 의원은 최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배치됐다. 처음부터 굳게 고수해온 상임위다. 첫 수는 바둑 관련 행보였지만, 이후론 문화체육 전반으로 보폭을 넓힐 계획이다. 특히 열악한 여건의 문화ㆍ체육ㆍ예술계 종사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바둑도 그렇지만 문화ㆍ체육 전반에서 1인자를 제외하곤 최저시급(2016년 6,030원)도 벌지 못하는 현실”이라며 “명색이 프로라면 생활 가능한 일당은 받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조 의원은 앞으로 은퇴 후 진로가 불투명하고 복지대책이 열악한 체육인의 권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체육인 복지법’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스포츠 외교에도 뜻이 있다. 바둑이 서양에선 아직 낯선 문화라는 현실이 아쉽다. 최근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 덕분에 바둑에 대해 세계가 궁금해하는 건 다행인 부분이다. 조 의원은 “알파고 때문에 서양에서 바둑에 관심 갖는 사람이 5배, 10배 늘었다고 한다”며 “바둑 뿐만 아니라 스포츠 한류를 이끌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고 고민하겠다”고 했다. 그는 최근 세계적인 축구구단 레알 마드리드의 파코 우 아시아태평양 최고경영자(CEO)와 면담하며 한국과 레알 마드리드의 스포츠 산업 관계 활성화 방안을 모색했다.
▶정치 계속? 인생은 모른다=조 의원은 아직 ‘금배지’가 어색하다. 바둑 기사와 정치인의 가장 큰 차이는 ‘말’이다. 생각만으로 승부하는 바둑 대국을 할 땐 하루 종일 한 마디도 안 해도 괜찮았다. 정치인은 말이 생명이다. 끊임없이 관계자와 시민을 만나야 하고 언론 대응도 필수다. 그는 “농사를 짓다 갑자기 어부가 돼서 물고기를 잡는 기분”이라고 했다.
낯선 만큼 정치 현안에는 말을 아꼈다. 총선 패배 후 혁신 작업이 한창인 새누리당에 ‘생각의 고수’로서 조언을 묻자 “정치 9단이 수두룩한데 초단이 뭘 어떻게 하라고 할 순 없다”며 한사코 신중한 태도였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은 있지만 나는 그저 상황을 판단하고 배우는 입장”이라며 “고수는 고수고, 9단은 9단의 관록이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의 저서 ‘고수의 생각법’ 중 ‘아플수록 복기해라, 사람에게서 배워라, 판을 정확히 읽어라’ 같은 대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이제 막 정치인으로서 두번째 인생을 시작한 조 의원은 훗날을 어떻게 계획할까. 그는 20대 임기 이후에는 한국기원으로 돌아갈 거냐는 질문에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다. 정치에 발을 담갔으니 4년 동안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훗날을 고민하겠다는 얘기다. 다만 국회의원 겸직 금지 규정 때문에 바둑 대국을 당분간 멈춰야 하는 건 아쉽다. 그는 평생 1938번 승리해 바둑 기사로서 세계 최다승 기록 보유자다. 조 의원의 승부사 기질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죽기 전에 2000승 정도는 해봐야지”라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유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