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상 김광진 5시간33분간 연설 故 김대중 前 대통령 기록 깨뜨려 바통 이어받은 은수미 6시간 넘겨
의원들 졸거나 휴대전화 만지작 불성실 참여태도 부끄러운 모습
누구의 역사가 될 것인가. 약 반세기 만에 국회에서 펼쳐진 ‘필리버스터(Filibusterㆍ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는 대한민국 헌정사에 또렷이 기록될 터다. 그러나 그 역사가 여야 둘 중 누구의 것이 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매 순간 ‘신기록’을 경신 중인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과연 테러방지법의 직권상정을 저지하고 ‘승자의 무용담’으로 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끝내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는 것은 여당일까. 역사적 현장의 오늘을 기록한다.
▶매 순간이 신기록, 극한의 토론=필리버스터가 각 당의 명운을 건 ‘끝장전’ 형태로 펼쳐지면서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매 순간 기록이 경신되고 있다. 우선 지난 23일 처음으로 단상에 오른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부터가 총 5시간 33분을 발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5시간 19분)을 깼다. 이후 문병호 국민의당 의원(1시간 49분 발언)에 이어 세 번째로 바통을 이어받은 은수미 더민주 의원은 다시 김 전 대통령과 김 의원의 기록을 가뿐히 넘겨 버렸다.
이에 따라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은수미 의원에게 “발언이 6시간을 넘겼는데 괜찮겠느냐”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의사진행 발언에 나선 자당 소속의원을 응원하는 야권의 분위기도 진풍경이다. 이날 더민주 의석에서는 “조금만 더 시간을 버텨달라”, “화이팅” 등 응원의 목소리가 간간히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말이 너무 빨라요, 천천히 하세요”라며 발언 시간 연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외에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가 트위터에 “김광진 잘했다!”, “은수미 대단하다. 힘내라!” 등의 글을 올리는 등 장외 응원전도 치열한 분위기다.
▶참여태도는 불성실, 부끄러운 역사 남을 것=다만 장시간 발언에 지친 의원들의 불성실한 본회의 참여 태도는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날 새누리당 의원들은 1~2명씩 교대로 본회의장을 지키며 야당 의원들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더민주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의원 중 일부는 밀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고 앉은 채 선잠을 자거나 휴대폰을 만지는 등 집중력이 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날 본회의장을 짙키고 있는 의원도 전체(300명)의 1/10에 불과했다.
한편 야권은 은수미 의원의 발언이 끝난 이후에도 박원석 정의당 의원을 비롯해 유승희, 최민희, 강기정, 김경협 더민주 의원 등을 차례로 발언대에 세울 예정이다.
▶필리버스터, 반세기 만에 돌아오다=소수당이 다수당을 견제하고자 합법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는 보통 ‘무제한 토론’의 형태로 나타난다. 과거 국민의 정치혐오를 부추겼던 ‘동물국회’ 식 몸싸움이 아니라, 안건에 대한 반대파의 입장을 소상히, 그리고 장시간 발표함으로써 의사진행 자체를 중단하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196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5시간19분 발언(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통과 저지)과 1969년 박한상 신민당 의원의 10시간15분 발언(3선 개헌안을 저지)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이후 필리버스터는 1973년 폐기된 뒤 2012년 5월 통과된 개정 국회법(국회선진화법)에 포함돼 부활했다. 사실상 반세기만의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인 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관건은 테러방지법=중요한 것은 과거의 필리버스터가 여론의 찬반이 다소 분명한 안건에 대해 진행됐던 반면, 현재의 필리버스터는 대상 안건의 가치판단이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다. 테러방지법에 명시된 주요 권한을 국정원에 줘도 되는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이 지난 15년간 정권 교체기마다 뒤집힌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실제 테러방지법은 지난 2001년 11월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발의됐지만, 참여정부에서는 한나라당의 반대로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에서는 야당의 반대로 공전을 거듭해왔다. 여러 차례 정부와 결탁해 여론조작 논란을 빚어온 ‘국가정보원’을 향한 불신이 어떤 성향의 정치세력이 야당이 되든 반대에 반대를 거듭하게 한 것이다.
이번에도 테러방지법의 핵심인 휴대전화 감청과 금융정보 추적 권한(법안 제9조)을 국정원에 주느냐 마느냐가 쟁점이 됐다. 그러나 ‘북한 등 국내외 테러세력의 위협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여당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심사기일) 결정도 ‘지금은 안보 비상사태’라는 판단에 따라 이뤄졌다. 여야 모두 ‘끝장’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