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尼 스타작가 누그로호 아라리오갤러리서 첫 내한전
선으로 강조된 흑백 페인팅과 자수 우스꽝스러운 인물 형상 조각 등
획일성 강요하는 격변기 인도네시아 섬뜩한 유머로 사회 부조리 꼬집어
“다름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 사회 개개인 박물관 전시품될까 두려워”
도무지 거침이 없다. 고도로 시각화된 벽화에서부터 회화 조각 드로잉은 물론 자수 만화 애니메이션까지 온갖 장르를 왕성하게 넘나들며 작업한다. 책도 펴내고 그림자극도 펼친다. 인도네시아 미술계의 ‘떠오르는 샛별’ 에코 누그로호(Eko Nugroho·36)다. 30여년간 이어졌던 수하르토 치하에서 벗어나, 격변기를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사회·정치적 이슈를 대담하게 다룬 작업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로 부상한 그가 서울에 왔다.
누그로호는 1일부터 11월 3일까지 청담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대표 김창일)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갖는다. 그는 파리 퐁피두센터와 호주, 미국에서 전시를 열었고,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인도네시아관 대표작가로 참여했다. 또 글로벌 미술전문지 ‘아트 앤 옥션’이 선정한 ‘50세 이하 가장 유망한 작가 50인’에 포함됐으며, 루이비통과 막 콜래보레이션도 마쳤다.
누그로호의 작업은 고유한 독자성과 함께 세계성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개개인의 개성은 무시된 채 획일화를 강요받는 인도네시아의 갑갑한 현실을 강렬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반영하지만 누가 봐도 고개를 끄떡일 정도로 쉽고, 흥미롭다. 시니컬하나 무겁지 않다. 특유의 굵고 거침없는 선으로 자신과 이웃이 처한 억압적 상황을 회화, 만화, 낙서로 드러내지만 어둡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 따라서 강하면서도 유연한 미술인 셈이다.
그의 작품은 만화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인물은 만화에 등장하는 로봇이나 캐릭터와 흡사하다. 캐릭터들은 손에 날카로운 물체를 쥐고 흔든다. 손과 발은 무기로도 변한다. 마치 B급 영화 속 괴생명체들은 모든 구멍에서 플라스틱꽃이나 이상한 물체가 자라나 마치 실패한 과학실험을 보는 듯하다.
또 검고 두툼한 선으로 표현된 인물은 눈만 빼꼼히 드러낸채 얼굴이 송두리째 가려져 개성을 잃어가는 인도네시아의 민중을 은유한다. 섬뜩한 유머와 풍자로 부조리한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그의 작업은 자수, 조각으로도 이어진다. 조각작업에서도 캐릭터들은 기이한 마스크나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엉뚱한 행동을 취한다.
작가는 “개개인의 다름이 점점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 사회는 다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언젠간 박물관 유리전시장 안 전시품이 될까 봐 두렵다”고 했다. 허나 그는 비판의 날을 세우기보다, 모순된 상황을 역설어법으로 희화시킨다. 그런데 그 작업은 우리 스스로를,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묘한 흡인력을 지녔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과밀도시 욕야카르타에서 나고 자란 누그로호는 어릴 적부터 미술학교에 가기 위해 할머니의 쌀가게에서 일했고, 방학 때는 시장통에서 행상도 했다. 미대 재학시절 레포마시(혁명)를 경험하며, 치열한 격동기에 데뷔했다. 초창기 거리에 벽화를 그리고, 만화작업을 하며 시각적 저항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불공평, 부패, 가난, 광적인 종교인들, 폭력 등 외면할 수 없는 이슈들이 많지만 나는 작품에 의도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넣고 싶진 않다. 현실은 매우 복잡미묘하니까. 그보다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걸 뒤집어놓고, 인식의 틀을 깨고 싶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과의 소통이 가장 소중하다는 누그로호는 큰 내러티브와 작은 내러티브, 거창함과 소소함을 자유분방하게 오가며 인도네시아는 물론, 전 세계 소시민이 처한 현실을 오늘도 재기발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서울전시에는 대형 벽화작업과 함께 자수, 조각, 회화 등이 망라됐다. (02)541-5701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