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선구자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일부 확대), 1304~1306년경.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1306년 이탈리아 북부 도시 파도바(Padua). 그 사람은 계약금을 받은 뒤 곧장 떠났다. 짧은 작별 인사가 끝이었다. 두 해가량에 걸친 긴 벽화 작업이었지만, 지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새로 짓는 예배당이 구색을 갖춰가던 2년 전, 그쯤 내게 필요한 건 최고의 화가였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1등으로 남을 화가였다. 위엄 있게 세워질 예배당을 불멸의 성전으로 꾸며줄 수 있는 천재여야 했다. 그때, 그래서 나는 그 화가를 불렀다. "우리 가족을 위한 예배당을 거의 다 지었소. 당신은 그 안에서 벽화를 그려주시오. 다만…." 내 목소리가 떨려왔다.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 말을 끊고 목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마냥 잘 그려도 부족하오. 하늘이 탄복할 수 있는, 악마가 넋을 잃고 도망칠 수 있는 그런 벽화여야 하오. 나는, 나는…." 나는 정말 두렵소. 정말 미칠 듯이 두렵소…. 차마 이 말은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그러나 당시 그 화가는 공포에 휩싸인 내 마음을 다 아는 듯했다. 그의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앞에서 나는 이미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내가 예배당을 짓기로 한 이유, 그건 1303년에 꾼 꿈 때문이었다.

정신 차려보니 지옥에 떨어져 있었다. 새까만 하늘에서 불덩이가 쏟아졌다. 꼬리가 긴 악마가 시시덕거리며 사람들을 뒤쫓았다. 도망쳐야 했다. 이상하게 발이 무거웠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얼굴도, 몸도 너덜너덜했다. 사람 형상으로 보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허우적거리며 잠에서 깼다. 식은땀으로 푹 젖은 상태였다. 그날 이후로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부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나도 그 일을 이어받아 돈을 쓸어 담았다. 당연히 세상은 우리 일을 좋게 보지 않았다.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불리는 건 성스러운 일이 아니라며 손가락질했다. 그쯤 "사악한 직업을 가진 가문"이라는 말도 들었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보란 듯 더 호탕하게 웃었다. 꿈속이었지만, 불 화산이 요동치는 그 지옥에 있는 아버지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그 악몽에서 아버지의 현재, 내 미래를 본 듯했다.

아버지를 따라 지옥에 가야 할 운명….

참회해야 했다. 그 꿈을 꾼 날, 신을 위한 예배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을 바치기로 했다. 신의 추상(秋霜)같은 노여움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눈물 서린 예배당이어야 했다. 그리고 2년여 세월이 흐른 1305년 초, 예배당은 거의 다 세워졌다.

이제부터 작업해야 할 건 예배당을 채울 벽화였다. 그래서 그쯤 그 화가를 부른 것이다. 그 화가라면 신도 통곡할 수 있는 벽화를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내 금고 속 돈은 늘 차고 넘쳤다. 얼마를 줘도 괜찮았다. 나는 그 화가의 모든 요구를 들어줬다. 그 화가의 장난, 짜증, 독설도 다 견뎠다. 그에게 내 미래를 통째로 내맡겼다.

그렇게 또 만 2년이 지난 1306년 오늘, 그 화가가 돈만 받고 쓱 떠난 이날에 나는 홀로 예배당에 들어섰다.

그 안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을 끊고 멈춰서야 했다. 차마 내부 한가운데로 발을 딛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 화가가 꾸민 이 공간은 성스러웠다. 또 다른 우주였다. 비틀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벽에 손을 댔다. 그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죽은 예수가 있었다. 비탄하는 성모 마리아가 있었다. 울부짖는 천사들도 있었다.

"이건, 천재다." 내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렇다. 얼음장과 같은 신도 이 그림 앞에서는 무너질 것이다. 통곡하며 감동할 것이다. 안도감과 벅차오름을 함께 느꼈다. 나는 그 벽화 앞에 무릎 꿇고 오랫동안 기도했다.

신마저 인간처럼 눈물을 흘릴만한 그림을 남기고 휙 떠난 화가, 그의 이름은 조토입니다.

조토가 남긴 벽화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은 의뢰자뿐 아니라 동시대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안겼습니다. 이 그림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인 르네상스를 여는 스위치가 됩니다.

모두가 울고 있는 이 종교화, ‘사연’이 뭐길래?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 1304~1306년경.

예수의 주검이 십자가에서 내려졌습니다.

사실상 벌거벗은 예수는 잠든 듯 평온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들의 목을 감싸 안습니다. 오른쪽에서는 예수가 가장 아낀 제자인 요한이 팔을 벌리고 다가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발을 어루만집니다. 그 발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이 그대로 보입니다.

두 사람은 등을 보인 채 있습니다. 둘 중 왼쪽 사람은 예수의 머리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오른쪽 사람은 예수의 손을 쥐고 상처에 입을 맞추는 듯합니다. 오른편 구석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로 추측되는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예수를 둘러싼 모든 이가 저마다의 몸짓으로 슬픔을 표합니다. 옷매무새를 다듬을 틈도 없는 듯 옷에는 주름이 가득합니다. 날고 있는 아기 천사들도 괴로워합니다. 앙상한 나무, 메마른 바위가 황량함을 느끼게 합니다. 산등성이 모양의 바위는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예수로 향하게 합니다.

조토의 그림 '애도'는 이탈리아 파도바(베니스에서 약 40㎞ 떨어진 도시)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안 벽화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그의 손으로 꽉꽉 채운 예배당 내 벽화 중 가장 감동적인, 제일 혁신적인 '컷'으로 거론됩니다.

1303년 당시 조토는 엔리코 스크로베니에게 주문을 받고 작업을 했습니다. 구두쇠 아버지의 일이었던 대부업을 이어받은 스크로베니는 자신의 가문이 지옥에 갈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끼던 때였습니다. (실제로 단테는 1308년부터 쓴 신곡 중 그의 아버지 레지날도를 지옥 불에서 등장시킵니다.)

돈이 차고 넘친 스크로베니는 가문의 죄를 덜기 위해 파도바에 신을 위한 예배당을 짓기로 합니다. 당시 최고 명성을 날린 조토에게 예배당 내 벽화 작업의 책임 권한을 줍니다. 조토는 스크로베니의 불안함을 꿰뚫은 양 그림의 주제를 '구원'으로 잡았습니다. 그 성격에 맞춰 애도를 그리게 된 겁니다.

‘중세’를 깨뜨릴 혜성 등장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는 14~16세기 유럽 전역을 뒤덮은 르네상스 회화선구자입니다.

미술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화가입니다. "오랜 기간 '조토'라는 말 자체가 '화가', '최고의 그림'과 동의어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토는 미술의 주인공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꾼 화가였습니다. 조토로 인해 화가들은 '인간의 눈'을 찾았습니다. 그림 속에 '진짜 인간'을 담아냈습니다.

"그럼 중세 화가들은 눈을 못 떴나? 중세 그림 속 사람들은 인간 아닌가?"라는 말이 있을 수 있는데요.

반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14세기 들어 르네상스 바람이 불기 직전까지 중세 미술계는 비잔틴(Byzantine) 양식이 지배했습니다. 지금도 이콘(icon·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에서 볼 수 있는 이 기법은 쉽게 말해 '신에 의한, 신을 위한' 화풍입니다. 딱딱한 선과 둔탁한 무게감, 화려한 색채와 눈부신 장식 등이 특징입니다.

르네상스 개화 전, 중세를 장식한 비잔틴 화가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배운 대로 그렸습니다. 구도, 색깔, 소품 모두 정해진 대로 칠했습니다. 중세의 그림은 성경을 쉽게 알려주는 수단이었지요. 그러니까 그림은 그림도 아니고 학습지 내지 그림책 정도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걸음마도 못 하는 상대에게 달리기를 가르칠 수 없듯, 이들에게 성경 구절을 조목조목 가르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모르는 이도 쉽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교육 도구로 택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중세 그림은 그 자체로 공식이 필요했습니다.

'낫 놓고 기역 자를 모르는' 이도 그림을 보는 일만으로 신에 대한 경외감 두려움을 함께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 겁니다. 그 시절 그림은 이 때문에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으로 그려졌습니다. 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그림도 엄숙하고 신성해졌습니다.

조토와 동시대에 산 화가 두초의 그림 '마에스타'를 볼까요.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두초, 마에스타, 1308~1311년경.

그림은 조용하고 평면적입니다.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합니다. 신의 시선으로 공식에 맞춰 그리다 보니 가장 중요한 성모 마리아가 제일 크게 그려졌습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두초, 마에스타(일부 확대), 1308~1311년경.

또 주목할 점은 성모 마리아가 밟고 있는 육각형 발판입니다. 그런데요. 두초가 애초 직사각형을 그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게 육각형이 아니고 직사각형이라는 겁니다. 두초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신의 눈을 빌렸습니다. 인간이야 얼굴에 있는 눈으로 그 앞만 볼 수 있지만, 신은 어디서든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앞뒤 양옆을 다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의 눈에선 직사각형의 뒤쪽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 자리에서 모든 면을 다 볼 수 있는 만큼, 신의 시선에선 직사각형도 그림 속 저런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고 짐작한 뒤 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득도한 양 별다른 표정이 없습니다. 인간처럼 감정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배경에는 화려한 금박이 반짝거립니다.

신이 아니다, 이제 ‘인간의 눈’이다

조토가 중세의 이 공식을 싹 다 깨부쉈습니다.

조토는 신의 눈에서 벗어나 인간의 눈으로 대상을 관찰합니다. 중세가 '배운 대로'라면 조토가 띄운 르네상스 '보이는 대로'입니다. 조토는 인간의 표정과 감정을 공부합니다. 신이든, 성인(聖人)이든 상관없이 그 대상에 자신이 탐구한 형형색색의 감정을 그려 넣습니다.

조토는 인체의 구조와 해부학에도 관심을 둡니다. 그림 속 인물의 생동감 있는 동작도 그의 연구 결과를 그대로 옮겨온 겁니다. 배경도 금박에서 벗어났습니다. 현생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담았습니다. 조토는 그렇게 신과 성인을 모두 웃고, 울고, 화낼 수 있는, 어딘가 한적한 시골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인간으로 그려냈습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성전의 환전상을 쫓아내는 예수(성전 정화).

조토의 그림 '성전(聖殿)의 환전상을 쫓아내는 예수'(성전 정화)를 볼까요. 이 그림도 스크로베니 예배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이른바 '환치기'를 하려고 한 환전상들에게 격분한 표정으로 강펀치(?)를 날리려는 장면입니다. 성질나면 욱하고, 가끔은 법보다 주먹을 먼저 찾으려고 하는 인간처럼요.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황금문에서 만난 요아킴과 안나(황금문에서의 만남)

'황금문에서 만난 요아킴과 안나'(황금문에서의 만남)도 흥미롭습니다. 예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 칭해지는 요아킴과 안나가 뜨겁게 입을 맞춥니다. 뒤에 있는 한 여성은 이를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반쯤 가립니다. 성스러움을 강조하던 당시로는 두 그림 모두 파격적이었습니다. 조토는 유머와 반항기가 함께 있는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뜻합니다. 이는 그리스, 로마 등 고대 시대 문화예술의 재탄생을 의미하는데요. 생각해보면, 고대 시대의 신은 꽤 인간적입니다. 하늘의 신 제우스는 트러블 메이커였습니다. 명색이 죽음의 신(타나토스)이라는 이는 인간(시시포스)에게 잡혀 지하실에 갇히는 엉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토는 신조차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 시대를 다시 불러낸 겁니다.

이로써 인간의 회화가 시작됐습니다.

이렇게까지 슬퍼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조토가 그린 애도에서 르네상스의 기운을 느껴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일부 확대), 1304~1306년경.

예수를 끌어안은 성모 마리아가 '인간'처럼 슬퍼합니다. 짙은 상실감에 젖어 이내 피눈물을 흘릴 듯합니다. 억지로 비통함을 참아내는 그 모습에 모성애가 물씬 느껴집니다. 두초의 그림 속 철의 여인 같은 성모 마리아와 비교하면 아예 다른 사람 같습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일부 확대), 1304~1306년경.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일부 확대), 1304~1306년경.

두 팔 벌린 요한도 온몸으로 애통해합니다. 주변 성인들도 슬픔을 감추지 않습니다. 아기 천사들도 고통에 몸부림칩니다. 제 마음대로 맴돌며 애처롭게 통곡합니다.

조토는 이들이 있는 곳이 책 속이 아니라 '우리 세상'이란 점도 강조했습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일부 확대), 1304~1306년경.

회화에 처음으로 배경다운 배경을 그렸습니다. 번쩍이는 금박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속 어딘가에는 있을 법한 곳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바위와 나무에는 그림자도 넣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원근감을 표현한 겁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일부 확대), 1304~1306년경.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애도·일부 확대), 1304~1306년경.

등 돌린 두 사람도 주목해야 할 지점입니다.

앞만 볼 수 있는 인간의 시선으로 그린 그림이어서 있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신의 시선이었다면 이들 또한 앞을 봤겠지요. "얼굴도 안 나온다면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며 그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그림에는 공간이 가득 찰 만큼 '엑스트라'가 많습니다. 이 덕분에 보는 이는 그림을 통한 학습을 넘어 자신도 그림 속 일원이 된 양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조토가 연극 무대를 보고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청출어람 조토, 억세게 운 좋았다?

"모든 그림은 신성한 항구로 가는 여정이다."

조토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 동상.

조토의 생에 대해선 모호한 점이 많습니다.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토는 1266년 혹은 126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22㎞쯤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습니다. 아버지는 농부였고, 조토는 양치기 소년이었다는데요.

그런 그가 화가가 된 데는 전설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치마부에가 여행 중 우연히 조토를 봅니다. 조토는 때마침 양 떼를 돌보다 말고 바위에 양의 윤곽을 그리는 등 딴짓에 빠져 있었습니다. 치마부에는 그 그림을 넌지시 봅니다. 바위에 새겨진 양이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치마부에는 감명받습니다. 곧장 조토를 스카우트합니다. 그렇게 조토는 치마부에의 작업실에서 붓을 들기 시작했다는 설입니다.

이 밖에 피렌체의 한 양모 상인의 도제로 있던 조토가 치마부에의 작업실을 자주 기웃거리자 치마부에가 그림을 가르쳐줬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토의 천재성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조토가 스승 치마부에를 상대로 장난을 칩니다. 치마부에가 자리를 비운 틈에 스승이 그린 인물 코 위에 파리를 그린 겁니다. 돌아온 치마부에는 조토의 그림이 진짜 파리인 줄 알고 계속해서 손으로 내쫓으려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토가 억세게 운이 좋았던 건 맞습니다.

어쩌다 만나게 된 스승이 치마부에라니요. 별생각 없이 나간 집 앞 권투장 관장이 알고 보니 마이크 타이슨급 선수였다는 식의 일이었습니다. 치마부에는 그 시절 가장 영향력이 큰 화가면서, 제일 깨어있는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치마부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치마부에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겠습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화려하지만, 예수의 표정과 자세가 비교적 부드럽습니다. 치마부에 또한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잔틴 화풍과 르네상스 화풍 사이 경계선까지 발을 디뎠습니다. 치마부에가 놔둬도 알아서 쌩쌩 내달리는 조토의 '부스터'가 돼준 겁니다.

조토는 치마부에와 함께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에서 행한 작업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치마부에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마음껏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붓끝에서 생명체가 태어나는 듯했다고 합니다. 조토는 치마부에를 따라나선 로마에서 고대 유적과 조각품을 볼 기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중심된 그 작품들을 보고 르네상스의 영감을 일깨울 수 있었을 겁니다.

조토는 1290년께 결혼한 후 딸 넷과 아들 넷을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토의 인기는 스크로베니 예배당 작업 후부터 끝없이 차올랐다고 합니다.

단테가 당시 이탈리아 내 조토의 인기를 저서 '신곡'에서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교황과 고위 성직자, 왕과 귀족 등에게 꾸준히 제작 의뢰를 받고, 나폴리에서는 궁정화가까지 지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조토는 1337년 7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피렌체시는 그의 업적을 기려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줬습니다. 시신은 산타 레파르타 성당(現 피렌체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안치됐습니다.

피렌체에 남아있는 그의 예술혼

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조토의 종탑. [위키백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지금도 '조토의 종탑'을 볼 수 있습니다. 좁은 계단 414개를 따라 올라가면 82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를 수 있는데요. 피렌체 시가지를 단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종탑은 조토가 구상한 구조물입니다.

1334년 피렌체시는 조토에게 '위대한 거장'이라는 칭호를 줍니다.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며 조토에게 두오모(대성당) 장식 작업을 하는 석공 조합 책임자이자, 그 옆 종탑 건설의 지휘를 함께 맡깁니다. 조토는 직접 종탑을 구상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조토는 조각도 잘했고, 설계도 잘했습니다. 공사가 딱 시작될 무렵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혼은 종탑에 장엄히 남아있습니다.

단테와 함께 '서유럽 문학 거장'인 보카치오는 조토를 놓고 1349~1351년 쓴 작품 '데카메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 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중

〈참고 문헌〉

서머셋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후암동 미술관 읽는 순서(연재 중)〉

①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②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③‘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④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⑤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⑥“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⑦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⑧“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⑨‘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⑩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⑪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