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135점

비구름 걷힌 인왕산 절경 겸재 ‘인왕제색도’

300년에걸친 시대상 보여주는 불상 여섯점

국내 최고 경매가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한땀 한땀 붓터치 이성자 역작 ‘천 년의 고가’

인왕제색도·여인들과 항아리...‘美의 성찬’을 누리다 [문화 플러스-‘이건희 컬렉션’을 마주하다]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한국미술명작’언론설명회에서 참석자가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를 관람하고 있다. [연합]
인왕제색도·여인들과 항아리...‘美의 성찬’을 누리다 [문화 플러스-‘이건희 컬렉션’을 마주하다]
조선 18세기에 만들어진 ‘백자청화 대나무무늬 각병’(국보 제 258호)와 보물 1069호인 분청사기[연합]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현존하는 유일의 ‘천수관음보살도’,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무엇을 떠올려도 상상 그 이상이었다. 교과서를 통해 숱하게 보던 명작과 보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기증 발표 당시부터 ‘세기의 기증’으로 불렸던 ‘이건희 컬렉션’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부터 시작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실 2층 서화실에서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열고 기증품 9797건 2만1693점 중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 45건 77점을 공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 1전시실에서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을 열고, 기증품 1488점 중 국내 작가 34명의 작품 58점을 걸었다. 모든 기증품이 놓칠 수 없을 만큼 빼어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반드시 만나야 할 작품들을 소개한다.

인왕제색도·여인들과 항아리...‘美의 성찬’을 누리다 [문화 플러스-‘이건희 컬렉션’을 마주하다]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언론 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겸재 정선의 최고 걸작 ''인왕제색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

정선의 시그니처 ‘인왕제색도’

1751년 음력 5월 25일. 비구름이 걷히며 인왕산이 절경을 드러냈다. 양력으로 치면 바로 지금 이 맘때인 7월 하순. 시력이 떨어진 76세의 정선은 안경을 쓰고 붓 두 개를 들었다.

가로 138.2㎝, 세로 79.2㎝의 거대한 화폭엔 겸재 정선이 속속 들이 알고 있는 인왕산을 담기 시작했다. 등성이를 따라 점점이 한양 성곽을 찍어 넣었고, 비가 와야 얼굴을 내미는 수성동 계곡부터 치마바위, 코끼리 바위까지 섬세하게 담았다. “정선은 워낙에 작품의 주문이 많아 빨리 그리고 묘체만 대충 그렸는데 ‘인왕제색도’ 만큼은 섬세하게 그렸다”고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가 귀띔했다.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탁월한 필치로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나고 자라 돌멩이 하나하나까지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정물로 만난 ‘인왕제색도’는 말년의 노(老) 대가가 자신감 있게 담아낸 역작이다. 붓을 눕혀 짙은 먹을 여러 번 칠하는 ‘강렬하고 힘 있는 필묵법’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실제 인왕산과 달리 화강암 봉우리는 검게, 숲은 안개로 가려 하얗게 그리며 ‘반전의 묘미’를 살렸다.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먹을 쌓듯이 여러 번 때리는 칠법인 적묵법은 당시에도 유행했지만, 정선의 시그니처였다”며 “인왕산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인왕산=인왕제색도’가 된 것은 정선의 박력있는 필법을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이 작품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홍라희 여사와 가장 처음 수집한 작품”이다.

인왕제색도·여인들과 항아리...‘美의 성찬’을 누리다 [문화 플러스-‘이건희 컬렉션’을 마주하다]
삼국 통일신라 금동불[연합]

300년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불상들

국보 제 134호 일공일광삼존상(삼국시대, 6세기)부터 부처(통일신라 9세기)로 이어지는 여섯 점의 불상은 300년의 시간 동안의 제조법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권강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삼국시대 초기 불상을 제조할 땐 주물을 찍어 만드는 통주조 기술이 유행했다”며 “이후 주조 기술이 발달하며 속을 비워 만드는 중공식 주조 방식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6세기 당시 만들어진 일광삼존상은 8.8cm에 불과할 만큼 크기가 작았다. 이후 삼국시대 말~통일신라 초인 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보물 제780호 보살은 28㎝까지 커진다. 권 연구사는 “청동은 당시 워낙 고가였다. 불상의 크기가 커지며 동을 아끼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속을 비워 불상을 제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불상의 비율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도 흥미롭다. 권 연구사는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신라로 갈수록 인체 비례가 세련돼졌다”며 “삼국시대는 어린아이와 같은 4~5등신으로 만들어 얼굴과 손발이 크고 몸 비율이 짧은 형태라면 통일신라는 등신이 잘 맞고 보다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고려로의 이행 직전 시기인 통일신라 말기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이 붕괴되면서 지방에서 불상이 만들어지며 전성기 양식에서 벗어나 퇴행한 불상이 나온 것도 특징이다.

인왕제색도·여인들과 항아리...‘美의 성찬’을 누리다 [문화 플러스-‘이건희 컬렉션’을 마주하다]
김환기의 ‘산울림 19-Ⅱ-73#307’ [연합]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산울림 19-Ⅱ-73#307’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면 누굴 떠올리세요?”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단연 김환기”라며 “그 중 ‘여인들과 항아리’는 대작 중의 대작”이라고 말했다. 가로 길이 5m, 세로 3m에 달하는 방대한 이 작품은 작가의 조형적 특성이 선명히 드러난 작품이다.

김환기는 유달리 항아리를 사랑한 작가다. 그는 “항아리를 모으다 못해 온 집안에 항아리를 뒀고, 둘 데가 없어 마당에 둘 정도”로 항아리를 사랑했다.

박미화 학예연구사는 “그만큼 우리 것을 좋아하고, 달항아리를 좋아했다”며 “이 작품의 선, 투박한 색 등 모든 것이 ‘달항아리’에서 연관된 정형 요소가 많다”고 설명했다. 작품은 1950년대로 추정된다. 박 연구사는 “파리에 다녀온 1959년 이후 일기장에 그려진 꽃장수의 수레가 이 작품에도 그려진 것을 보아 1959년 즈음으로 작품연대를 추정한다”고 말했다.

1950년대 방직기업 재벌 삼호그룹 방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집을 지으면서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해 제작했으며, 1960년대 말 삼호그룹이 쇠락하며 미술시장에 나온 뒤 삼성이 인수했다.

푸른 점화 ‘산울림 19-Ⅱ-73#307’(1973)은 뉴욕 시기 점화 양식의 완성 단계를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환기의 일기에 “1973년 2월 19일 시작해 3월 11일, 근 20일 만에 307번을 끝내다”라고 써있다. 작품 제목에 작품을 시작하거나 마친 날짜를 쓰고, 점화에서 나오는 번호를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권행가 미술사가는 “작은 점들의 파동이 광대한 우주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자아내는 듯하다”며 “동양적이고 시적인 추상화의 세계를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무릉도원을 그린 세 명의 작가

세 명의 작가가 표현한 ‘무릉도원’이 한 공간에서 걸렸다. ‘한국화의 대가’ 이상범의 ‘무릉도원’(1922)이 전시장 입구 왼쪽에 자리하고, 그것의 정면으로 1세대 여성 서양화가 백남순의 ‘낙원’(1936년경)이 걸렸다. 왼쪽으로 다시 돌아보면 6폭 병풍에 담아낸 변관식의 ‘무창춘색’(1955)을 볼 수 있다.

고운 비단 위에 채색된 이상범의 ‘무릉도원’은 1920년대 초반 안중식의 산수화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작품이다. “근대적 감각을 반영하지 않고 안중식의 초기 청록산수화풍을 계승한 한국적 실경 산수”다. 백남순의 ‘낙원’은 작가가 오산 시절, 전라남도 완도에 사는 친구 민영순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작품이다.

박미화 학예연구사는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과 동양의 무릉도원, 무이구곡도의 전통을 결합한 것처럼, 동서양이 혼합된 독특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변관식의 ‘무장춘색’은 작가가 전라북도 전주의 완산을 여행하며 그렸다. 최경현 미술사가는 “지팡이를 든 노인과 머리에 짐을 얹은 소녀는 현재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그곳이 무릉도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시각적 장치다”라고 설명했다.

이성자, ‘천 년의 고가’(1961)

1951년 파리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성자는 우리 미술사에서 반드시 조명받아야 하는 중요한 작가로 꼽힌다. 익히 알려지지 않은 이성자의 작품은 이건회 회장의 기증작에도 있었다. ‘천 년의 고가’는 이성자의 ‘여성과 대지’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파리에서 제작됐다. 네 번의 출산 경험에 대한 자긍심과 여성성에 대한 시작을 대지로 보고 화폭에 담았다. “한 번 붓을 들면 아이들이 밥 한 숟가락을 더 먹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고국에 두고 온 세 아들을 생각하며 작업한 시기의 작품이다.

박미화 학예연구사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한 땀 한 땀 붓을 터치해 완성한 걸작”이라며 “이성자자의 가장 기본적인 기하 형태를 구성하고 땅으로 파고 곡식을 심듯 붓터치를 해나간 시기의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시기 이성자의 대표작을 비로소 소장하게 돼 의의가 매우 깊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