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자인 동시에 전원합의체 재판장, ‘재판거래’ 가능한 지위 -재판연구지시, 판사 인사권도 가져… ‘직무권한 없었다’ 주장 어려워
[헤럴드경제=좌영길 기자]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은 향후 재판에서 직권남용 혐의 성립 여부를 놓고 검찰과 치열한 다툼을 벌일 전망이다. 하지만 현행법상 대법원장의 직무권한 범위가 매우 넓어 양 전 대법원장으로서는 재판 대응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2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47개 혐의를 적용했다. 공소장 분량만 296쪽에 달한다. 골자를 이루는 혐의는 직권남용이다. 직권남용죄는 말 그대로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누군가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도록 했을 때 성립한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특정 성향의 판사들에게 인사불이익을 주는 등 주어진 권한을 위법하게 행사했다는 내용이다.
이번 수사를 통해 구속된 피고인은 임종헌(60·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양 전 대법원장 뿐이다. 법원행정처장을 지내며 임 전 차장과 양 전대법원장을 잇는 ‘연결고리’로 지목됐던 박병대(62·12기) 전 대법관과 고영한(64·11기) 전 대법관은 영장이 기각되면서 구속을 면했다. 대법원장을 제외한 13명의 대법관 중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업무에서 배제된다. 애초에 재판에 관여할 직무상 권한이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 혐의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두 전직 대법관의 영장이 기각된 사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로 다스 해외 소송에 청와대를 동원한 혐의를 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 상식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없는 행위지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대통령의 권한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적인 소송에 관여하라고 지시할 직무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상황이 다르다. 현행 법원조직법은 대법원장에게 사법행정권과 재판권을 폭넓게 부여하고 있다. 그만큼 직권남용 혐의를 다툴 여지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권한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가능하겠지만, ‘나에게 직무상 권한이 아예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법원조직법상 대법원장은 대법관 전원이 사건을 심리하는 전원합의체 재판장이 된다. 검찰이 주요 ‘재판거래’ 사건으로 지목한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도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했다. 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동시에 대법원 심리에도 관여할 수 있는 지위가 있는 셈이다. 법원조직법은 재판연구관이 조사,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대법원장의 명을 받아’ 수행하도록 규정한다. 이 법은 대법원장에게 사법행정권을 부여하고 법관의 보직도 결정할 수 있도록 정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정책에 협조적이지 않은 판사 30여명의 목록을 추려 인사 불이익을 줬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