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최진성 기자] ‘종교’는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성역처럼 다뤄진다. ‘동성애 찬성’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낙태도 마찬가지다. 종교계의 반발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 청원으로 시작된 ‘낙태죄 폐지’ 논의에 공론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신고리 원전 5ㆍ6호기 건설 문제에 이어 두번째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공론화위는 문재인 정부가 밀고 있는 ‘숙의 민주주의’ 제도다. 종교계의 반발을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공론화위로 무마시키겠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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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청와대가 “내년부터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하겠다”고 밝히자, 더불어민주당은 ‘공론화위’ 카드를 꺼내들었다. 천주교계는 낙태죄 폐지 반대를 위한 100만명 서명 운동에 들어간다고 압박했다. 낙태죄 폐지 여부는 종교계와 의료계의 갑론을박을 차치하더라도 생명을 다루는 민감한 이슈라는 점에서 국민적 관심 사안이다. 정부ㆍ여당 입장에서 ‘낙태죄 공론화위’는 신의 한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숙의 민주주의가 정치적 또는 정책적으로 악용될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정부의 책임의식이 동시에 요구되는 대목이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28일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낙태죄 공론화위 구성에 대해 “당에서 논의해보겠다”고 말했다. 다른 여권 관계자는 “정치권에서 논의하는 것보다 일반 시민사회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안이나 파급력이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경우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종적인 행정 행위와 정책 결정의 책임은 정부가 진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신고리 원전 5ㆍ6호기의 건설이 재개된 이후 경제적ㆍ사회적 비용을 지적하는 목소리에 비해 정부의 정책 실패를 비판하는 여론은 크지 않았다. 공론화위가 일종의 ‘범퍼’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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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부도 각종 태스크포스(TF)와 위원회를 만들어 민감한 정책 결정을 대신했다. 민간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해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명분에서다. 박근혜 정부는 ‘TF 공화국’, 이명박ㆍ노무현 정부는 ‘위원회 공화국’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있다.

문제는 정부 정책이 위원회로 넘어가면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는 점이다. 찬반 양론이 팽팽한 ‘뜨거운 감자’를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하다 실패하면 장관이 물러나고, 대통령과 여당은 정치적 책임을 지고 향후 선거에서 심판을 받는다. 이 때문에 정부가 정책을 입안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더한다. 반면 공론화위는 정치적 부담이 거의 없다. 위원장은 물론 위원들도 민간인 경우가 많은데다 ‘돌아갈 곳’이 있어 공무원보다 책임감과 사명감이 결여돼 있다는 평가가 많다. 위원회에서 추진한 정책이 실패하더라도 정부의 실패로 인식하는 국민은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 이슈의 파급력을 감안하면 공론화위에서 결정하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문제 의식이 있다. 종교적으로 편향되거나 시민의식이 부족한 인원들이 결정 과정에 참여한다면 왜곡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만약 공론화위가 낙태죄 폐지를 결정할 경우 그 후폭풍을 누가,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문제에 직면한다. 어차피 정부가 후속 대책을 추진해야 하는 만큼 처음부터 책임감을 갖고 낙태죄 폐지 여부를 ‘숙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공론화위를 구성하는데 긍정적이지만,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고 조언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제한적이었던 만큼 공론화위의 기본 방향이나 취지는 옳다”면서도 “다만 공론화위의 구성 방식이나 운영 방식은 좀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