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은 ‘정상주’ 찾는 음주 등산객에 몸살 -고성ㆍ술 냄새에 술병 투기하고 주변 시비 -소방본부 “산악사고 상당수는 음주가 원인” -법상 문제 없어 제재 사실상 불가능해 -서울시 “조례 통해 점차 없애나갈 방침”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지난 21일 오후 7시 가을맞이 가족 나들이차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낙산을 찾은 김우준(44) 씨는 불쾌한 경험만 하고 돌아왔다. 좁은 등산길을 앞서 걷던 한 무리에서 새어나오는 술 냄새가 계속해서 코 끝을 건드린 것이다. 40~50대 등산 동호회원들로 보이는 이들 중 몇몇은 이미 얼큰하게 마신 듯 귀가 빨개진 채 비틀거리기도 했다. 김 씨는 “정상에 올라서니 이번에는 ‘정상주’라면서 시끌벅적하게 술을 먹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상식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했다.

도를 넘은 ‘음주 등산’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가을철을 맞아 서울시내 산이 북적이는 상황에서 음주 등산객도 함께 느는 추세지만, 이들을 제재할 방안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최근 중구 예장동에 있는 남산을 가보니 등산객은 해가 중천에 뜬 오후 시간대에도 붐볐다. 단풍 구경에 나선 관광객이 대부분이었지만 등산길에 있는 정자와 벤치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들 중 일부는 주변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건배를 하며 구호를 힘껏 외치기도 했다.

(주말)단풍에 안 취하고…술 취하기 바쁜 ‘음주 등산객들’
(주말)단풍에 안 취하고…술 취하기 바쁜 ‘음주 등산객들’

얼마 전 운동 삼아 남산 등산길을 오르다가 음주 등산객에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는 직장인 임모(29) 씨는 “맥주 캔을 벤치에 두고 가려고 해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니 무리 중 한 명이 다가와서 다짜고짜 몇 살이냐며 어깨를 밀치려고 했다”며 “주변 사람들이 말려 일단락됐지만,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음주 등산 행위는 다른 등산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물론 본인의 안전도 위협해 좋을 게 없다.

서울 소방재난본부 119 구조통계를 보면 지난 2014년부터 3년 동안 서울에서 이뤄진 산악구조활동은 모두 4645건이다. 시간대로 보면 하산 시간대인 정오부터 오후 6시에 65.9%가 집중됐는데, 이 안에는 ‘정상주’를 마신 후 내려오다 부상 당한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국립공원관리공단도 지난 2010~2012년 국립공원에서 생긴 산악사고 1686건을 정밀 조사해보니 약 30%가 음주로 인한 사고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음주 등산행위를 제재해야 한다는 지적은 계속 나오지만, 매번 공염불에 그친다.

이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어서다. 관련 공원법에서는 ‘오물이나 폐기물을 함부로 버리거나 심한 악취가 나게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는 행위’만 제한할 뿐 음주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서울시도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

시는 다만 지난 5월 제정된 ‘건전한 음주문화 조성에 관한 조례’에 따라 시가 관리하는 102곳 크고 작은 산ㆍ공원부터 ‘음주청정지역’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시는 다음 달 중순부터 전체 단속요원 200여명을 투입해 본격적으로 일대 음주 행위를 잡아낼 계획이다.

무엇보다 시민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시 관계자는 “단속 인력들이 음주 행위를 종일 단속한다 해도, 넓은 산ㆍ공원을 관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등산 중 음주로 인한 사고와 피해가 계속 발생하는 만큼, 등산객 스스로의 각성과 조절도 필요하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