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7월 집권 이후 반미(反美) 친중(親中) 행보를 보였던 두테르테 대통령은 오는 18일부터 사흘간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놓고 두테르테가 “주사위를 던졌다”고 평가했다.

방중에 앞서 두테르테는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두테르테는 16일(현지시간) 다바오 기자회견에서 “나는 그 어떤 것도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며 “지난 7월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근거없다고 판결한 헤이그 상설 중재재판소 결정은 지켜질 것”이라고 밝혔다. 영유권 분쟁 중인 남중국해 섬에 대한 수호 의지를 밝히며 자국민을 안심시킨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반미적인 자세와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지나치게 중시해온 행보는 필리핀이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를 중국 측에 유리하게 다룰 것이라는 우려를 키워왔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번 방중에도 필리핀 기업인들을 대거 동행하며 중국과의 협력을 도모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필리핀과 오랜 기간 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해온 미국 입장에서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두테르테는 동행할 기업인 수를 200명에서 400명으로 늘렸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방중 기간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리커창 총리, 장더장 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장과 회담할 예정이다. 두테르테는 우선적으로 필리핀의 해외자금 유치 및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중국과 정책개선을 도모할 것으로 전해졌다.

두테르테, 마침내 주사위 던졌다…동남아 질서 놓고 中과 도박
[사진=게티이미지]

필리핀상공회의소는 현지 언론에 “관광비자 문제가 해결되면 매년 중국인 관광객 500만 명이 필리핀을 찾게 된다”라고 전했다. 라몬 로페스 필리핀 무역장관도 “중국 은행 및 민간기업들과 최소 30억 달러(3조 4000억 원) 규모의 금융투자 협장이 체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두테르테 대통령이 방중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지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욕설을 하며 미국을 비난해왔지만, ‘동맹관계는 이상없다’라는 입장을 거듭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번 방중으로 필리핀이 중국의 안보정책에 동조하게 된다면 미국은 필리핀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두테르테는 이미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연합순찰을 하지 않기로 했다.

‘두테르테 리스크’로 외국인 자금도 빠져나가고 있다. 필리핀 주식과 채권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지난 8월부터 급감하기 시작했다. 8월 외국인 순매수액은 4조2700만 달러로 전달보다 60% 폭락했다. 10년 만기 필리핀 국채 금리는 9월 들어 0.22%포인트 오른 3.63% 수준을 기록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매도세로 돌아섰다는 뜻이다.

이처럼 필리핀과 미국 간의 균열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에르네스토 아벨라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우리는 어떤 문제에도 타협할 계획이 없다”라며 자국민에게 필리핀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필리핀 내부에서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이번 방중에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떠보았다가 친미로 외교 행보를 밟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클라리타 카를로스 필리핀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두테르테는 성과지향적 인물이자 마키아벨리주의자”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미국의 국제전략연구소(CSIS)의 아시아해양투명성 이니셔티브(AMTI) 센터장인 그레고리 폴링은 “매우 특이한 협상 전략”이라면서 “두테르테는 중국에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협상 카드인 ‘미국의 안보우산’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